진선미 여성가족부장관 후보자가 20일 서울 여의도 국회 여성가족위원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진선미 여성가족부장관 후보자가 20일 서울 여의도 국회 여성가족위원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너무 많은 차별 속에서 저 스스로

무장하고 발전시켜야 했다”

“제도는 사람 앞에 있는게 아니다

“힘들어하는 사람 손 붙잡아주며

함께 살아보자, 저는 딱 이 수준”

[여성신문] 진선미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가 인사청문회에서 한 답변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20일 국회 여성가족위원회가 개최한 인사청문회에서 진 후보자는 위원들의 질의에 대해 답변하면서 인권과 차별에 관한 경험과 고민을 드러냈다.

그는 성소수자의 인권에 대해 고민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면서 본인이 유년시절 당했던 각종 차별 경험, 변호사를 하면서 알게 된 동성애 청년의 이야기 등을 전했다. 또 “여성가족 문제는 단 한 번도 똑떨어지는 게 없는 것 같다”면서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청문회를 지켜본 이들은 진 후보자의 발언에 대해 “인상적인 얘기가 많았다”는 소감을 내놨다. 특히 “본인의 경험에서 나온 발언들에서 진정성이 느껴진다” “깊은 고민과 성찰이 담겨있다”는 평가도 나왔다.

그러나 진 후보자 가족의 주식 보유와 해당 주식의 상임위의 직무관련성 심사 절차에서 발생한 문제와 관련해 거듭되는 야당의 질문에 대해 입장을 밝혔지만 석연치 않다는 평가도 여전하다.

질의응답 중 답변의 일부를 전한다.

 

<제도는 사람의 삶을 편하고 행복하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일 뿐>

14년간 변호사를 하면서 가정 문제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게 됐다. 저 스스로도 너무 많은 차별 속에서 저 스스로를 무장하고 발전시켜야 했다. 제가 이 문제에 대해 관계하는 건 의뢰인으로 만난 수많은 사람, 성소수자들도 나와 똑같은 사람이다. 성소수자라는 것만으로 차별 받으면 안 된다는 인간적, 인권적 관점에서 함께 하고 있다. 기독교 교리에 부합하지 않지 않느냐고 하지만, 기독교가 애초에 탄생하게 된 수많은 국가에서 여전히 국민 속에 성소수자에 대한 고민을 하고 미국도 얼마 전 동성혼을 통과시켰다.

호주제 폐지 소송을 10년간 했는데, 가족제도라는 건 한곳에 멈춰서 있었던 적이 없다. 누군가에겐 수십 년 간 차별과 억압 기제로 작용하지만 그것이 수십 년 지나서 구성원의 합의가 모아지면 그 제도 또한 변화되는 것이 사람들의 삶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정책과 법을 담당하는 장관 후보로서 사회적 합의를 존중할 충분한 의지가 있다. 다만 제도는 사람 앞에 있는게 아니다. 제도는 사람의 삶을 편하고 행복하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일 뿐이다. 제도가 사람의 삶에 도움이 되는지 언제나 고민해야 한다.

 

<하느님의 가르침은 포용과 사랑...동성애 차별 고민해야>

시골에서 태어나서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전주로 못가고 시골에서 여고를 다니며 지역격차, 교육격차 등 시골의 어리고 가난한 여학생으로 수많은 차별을 겪었다. 그러나 그때는 차별이라는 생각조차 못했다. 시골에서는 ‘애비없는 자식’이라는 말을 너무 쉽게 하는데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아서 사회에 순응하며 살았다. 9년간 사법시험을 준비하면서 겨우 합격했다. 뭘하며 살아야 후회하지 않을까 고민하다가 우연히 들어간 사무실에 선배들이 소외된 계층에 대한 고민과 관심을 가졌고 제가 신입일 때 호주제를 고민하게 됐다. 제가 가지고 있었던 생각과 신념이 있다면 민법이 처음 만들어진 1945년에 호주제는 이미 없었어야 했다. 그러나 수많은 여성이 문제제기 해왔지만 40년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고 제가 참여했던 1999년 이후 10년이나 지나서야 호주제가 없어지고 호적법이 개인별 신분등록부으로 바뀌었다. 저는 인내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중요한건 수많은 사람들이 제도에 억압되더라도 그것이 변경되는 데는 너무나 많은 시간과 수많은 요소들이 있어야만이 그것들이 이뤄진다는 것이다.

저는 이렇게 말씀드린다. 제가 성소수자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됐냐면, 모태신앙을 가졌던 한 아이가 점점 나이 들어가면서 다르다는 걸 느꼈고 다니는 교회에서 끊임없이 동성애는 죄악이라는 교육을 받기 때문에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병원에도 가고 온갖 치료를 받고자 노력했고 스스로를 부인했다. 그러나 10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 모습에서 부모에게 버림받고 자기의 삶을 마무리 하려고 손목에 그었던 자국을 잊을 수 없다.

청소년 정책에도 자살, 자해라는 것, 끊임없이 심각하다고 말씀하시지 않나. 그런데 그 아이들을 그렇게 외면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기독교에서도 포용과 사랑이라는 하느님의 가르침이 있다. 대체 어떤 입장이 더 가까운지 고민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

 

<용기도, 급진적이지도 않다, 인간적이고자 노력>

모태신앙자로 정말 열심히 살아보려했던 20대의, 그러나 부모에 버림받고 삶을 마감하고자 했던 친구의 눈빛이 저의 눈빛 같았다. 시골에서 아버지를 잃은 것도 고통스러운데 여학생에게 애비없는 자식이라는 차별 언사를 너무 쉽게 하고 제가 전라도라는 거, 가난하다는 것, 우리 아버지도 함경남도에서 19세에 내려오셨는데 우연하게 파견대장 하다가 마지막 근무지 가까이 정착했지만 태어난 저는 전라도라고 구박받고, 함경남도라고 시골에서 소외당하고 이런 것 다 잊고 살다가 다른 사람들을 변호하면서 그 모든 것이 다시 되살아났다.

저는 그런 사람이 되지 말자, 그렇게 힘들어하는 사람 손 붙잡아주며 함께 살아보자, 저는 딱 이수준이다. 저는 그렇게 명민하지도 그렇게 용기있지도 그렇게 급진적이지도 않다. 조금 더 인간적이고자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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