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간 새롭고 창의적인 프로젝트로 세상을 놀라게 한 디자인 전문가, MoMA 건축·디자인 선임 큐레이터이자 연구개발센터장인 파올라 안토넬리(55). 지난 17일 서울 DDP에서 그를 만났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24년간 새롭고 창의적인 프로젝트로 세상을 놀라게 한 디자인 전문가, MoMA 건축·디자인 선임 큐레이터이자 연구개발센터장인 파올라 안토넬리(55). 지난 17일 서울 DDP에서 그를 만났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디자인 대사’ 파올라 안토넬리

MoMA 건축·디자인 선임큐레이터

디자인 통념 깬 프로젝트 선보여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계 인사’ 선정

10대 때 조르지오 아르마니와 일했고, 테트리스와 팩맨 게임을 뉴욕 현대미술관에 데려온 장본인. 24년간 디자인에 대한 통념을 뒤집는 프로젝트들을 선보여 유명해진 파올라 안토넬리(55)가 한국을 찾았다. 세계 3대 미술관으로 꼽히는 뉴욕 현대미술관(MoMA)의 건축·디자인 선임 큐레이터이자 연구개발센터장이며, 이 시대 최고의 디자인 전문가로 꼽힌다. 2004년 영국 아트리뷰(Art Review)지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계 인사 100인‘ 에 선정된 바 있다. 미국, 이탈리아, 프랑스, 일본 등 각국에서 다양한 건축·디자인 전시와 쇼를 기획했다. TED 강연도 여러 번 나섰다. 

안토넬리는 “디자인은 ‘예쁜 장식’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과 맞닿은 모든 것”이고, 따라서 “디자이너들은 자신의 디자인이 이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민감하게 자각하며 늘 깨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만연한 성차별이 디자인계 내 여성들을 위축시키고 재능을 펼칠 기회를 앗아가 사회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고도 지적했다. 그는 “여성들은 자신감과 담대함을 갖고 스스로를 지지하길, 남성들은 ‘롤 모델’로 삼을만한 지적이고 똑똑한 여성들이 얼마나 많은지 깨닫길 바란다”라고 했다. 

 

파올라 안토넬리는 2015년 ‘Design and Violence’ 전시를 통해 디자인이 생명을 해하고 폭력을 정당화하는 용도로도 발달해 왔음을 보여줬다. 사진은 2013년 미국의 ‘무정부주의 활동가’ 코디 윌슨이 세계 최초로 3D 프린터로 만들어낸 권총 ‘Liberator’. ⓒMoMA
파올라 안토넬리는 2015년 ‘Design and Violence’ 전시를 통해 디자인이 생명을 해하고 폭력을 정당화하는 용도로도 발달해 왔음을 보여줬다. 사진은 2013년 미국의 ‘무정부주의 활동가’ 코디 윌슨이 세계 최초로 3D 프린터로 만들어낸 권총 ‘Liberator’. ⓒMoMA

츄파춥스부터 AK-47까지

디자인의 사회적 영향 주목

“좋은 데 쓰여야 좋은 디자인

디자이너는 늘 깨어 있어야”

안토넬리는 20여 년 전부터 물건의 기능과 조형미를 넘어 그것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주목해왔다. 현대 업무환경 디자인을 돌아보고(2001년 Workspheres 전), 츄파춥스 사탕, 립스틱 용기, 콘택트렌즈까지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모든 것들이 곧 디자인의 손길을 거친 물건임을 보여줬고(2004년 Humble Masterpiece 전)와 비상시 필요한 물건들을 디자인 관점으로 다시 보게 했고(2005년 Safe 전), 급변하는 디자인과 과학기술의 관계에 주목한(2008년 Design and the Elastic Mind 전·2001년 Talk to Me 전) 기획전시도 열었다. 2015년엔 ‘Design and Violence’ 전시를 통해 디자인은 선한 목적으로만 개발되지 않으며, 생명을 해하고 폭력을 정당화하는 용도로도 발달해 왔음을 보여줬다. 

- 디자인이란 ‘평범한 것들의 비범함’을 찾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디자인 = 멋지고 예쁜 물건’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지요. 실은 우리 일상의 모든 게 디자인입니다. 포스트잇, 투표용지, 투표 방식, 비디오 게임, 애들 장난감까지 모두 디자인의 영역이죠. 좋은 디자인은 사소하게 보이는 것일지라도 아주 긍정적인 영향을 불러옵니다. 레고가 올해 초부터 식물성 플라스틱을 이용한 친환경 장난감을 만들기 시작한 것처럼요.” 

- 디자이너들에게 ‘책임감을 가져라’라고 당부하셨죠. 

“디자인의 특징은 그 역할과 방향이 모호하다는 겁니다. 어떤 디자인이 세상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 혹은 해를 끼친다고 잘라 말하기 힘들죠. 디자인이 어디에 쓰이는지, 어떤 결과를 낳는지에 대해 끝없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가장 혁신적인 디자인이 가장 해로운 결과를 낳을 수도 있으니까요. 2013년 3D 프린터로 권총을 만든 미국인을 기억하실 겁니다(편집자주 : 2013년 4월, 미국의 ‘무정부주의 활동가’ 코디 윌슨은 3D 프린터를 이용해 세계 최초로 직접 권총을 제작하고, ‘누구나 자신을 지킬 권리가 있다’며 권총 설계도를 온라인 배포해 파문을 일으켰다). 칼라시니코프 자동소총(AK-47)도 대량 생산·수리·보완이 쉽다는 점에서는 훌륭한 디자인입니다. 혁신적인 디자인이 악의 진영으로 흘러들지 않기를 바랍니다. 디자이너들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돈이나 욕심 때문에 분별력을 잃지 않고,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파올라 안토넬리는 2019년 3월 열릴 밀라노 트리엔날레에서 ‘부서진 자연(Broken Nature)’ 프로젝트를 선보일 계획이다. ⓒ밀라노 트리엔날레
파올라 안토넬리는 2019년 3월 열릴 밀라노 트리엔날레에서 ‘부서진 자연(Broken Nature)’ 프로젝트를 선보일 계획이다. ⓒ밀라노 트리엔날레

“도시의 인간소외 심각

‘회복을 위한 디자인’ 절실

우리 세대 디자이너들은

다음 세대 잘 살 터전 만들고 떠나야

특정 계급·젠더 아닌

‘모두’를 위한 공간 디자인해야”

안토넬리는 17일 ‘서울 디자인클라우드’ 개막식에서 ‘인간, 디자인 그리고 도시’를 주제로 기조연설을 했다. 그는 ‘인간은 행복하게 살기 위해 도시를 건설했지만, 정작 자연과 다른 생명체들과 유기적 관계를 맺지 못하고 소외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지금 그는 ‘부서진 자연(Broken Nature)’이라는 제목으로 2019년 3월 열릴 밀라노 트리엔날레를 준비 중이다. 

- “도시는 인간이 만든 최고의 걸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정작 인류의 절반인 여성과 성소수자·장애인 등은 오래도록 도시에서 환영받지 못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근현대 도시 공간 대부분은 ‘상위 계급’ 남성들만을 위한 공간이었지요. 

“남성들이 수 세기에 걸쳐 만든 많은 것들이 그렇습니다. 요즘 미국에선 실내 적정 냉방 온도가 남자들의 체온에 맞춰져 있어 문제라는 지적이 높아요. 여자들은 얼어 죽겠는데 남자들은 ‘어, 이제 좀 시원하다!’(웃음) 이제 바뀌어야죠. 특정 젠더나 계급만이 아닌 ‘모두’를 위한 공간이 필요합니다. 모든 젠더를 위한 화장실, 직장 내 수유실, 여성이 월경 중에도 안전하고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는 공공장소... 섬세한 디테일이 중요하죠. 이런 문제를 여성들이 직접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혁명적인 변화라고 봅니다. 특히 월경 등 여성의 몸과 성을 고려해서 공간을 디자인해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최근 높아졌죠. 반갑고 기뻐요.”

- 차기 프로젝트에 이런 논의들을 담을 계획이시죠. 

“우리 세대 디자이너들은 다음 세대의 생명들이 잘 살아갈 터전을 마련하고, 우아한 최후를 맞을 준비를 해야한다고 봐요. 이제 ‘회복의 디자인(restorative design)’을 논의할 때입니다. ‘회복(restorative)’이라는 단어는 ‘식당(restaurant)’의 어원인데요. 여러 재료로 만든, 기운을 북돋는 스프를 가리키는 말이 그러한 음식을 먹고 기뻐하는 공간을 뜻하는 말로 변했죠. 그런 디자인이, 인간과 자연·인간과 인간 간 유대를 회복하는 디자인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인류의 역사는 시민권 발달의 역사이지만, 어떤 시민들의 권리는 오히려 약화되거나 공격받았고요. 이제 디자이너가 망가진 가닥들을 회복해 나가야 합니다. 샤워기 타이머처럼 일상에서 실천 가능한 아이디어도 모색 중이고요. 희생이 아니라 ‘정상’을 되찾기 위해 필요한 일들이죠.”

 

이어보기▶ 여자들 재능 펼치려면? 남성 육아가 자연스러운 사회 돼야 (http://www.womennews.co.kr/news/144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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