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창작’을 말하다] “영화를 계속 만드는 게 내 나름의 페미니즘 운동”
[‘여성-창작’을 말하다] “영화를 계속 만드는 게 내 나름의 페미니즘 운동”
  • 오혜진 문화연구자
  • 승인 2018.09.18 17:40
  • 수정 2018-09-22 19: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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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력’을 남성의 전유물로 간주해온 신화 앞에서 ‘펜은 곧 페니스인가?’라는 질문을 거듭해야 했던 여성의 역사는 길다. ‘왜 위대한 여성예술가는 존재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누가, 무엇을 예술이라고 규정하는가’라는 권력에 대한 물음으로 고쳐 써야 한다는 항변도 이미 존재한다. 이 코너에서는 ‘여성-창작-새로움’의 의미망을 확장·갱신하기 위해 도전하는 동시대 젊은 여성창작자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서울시여성가족재단과 여성신문이 공동 기획한 이 인터뷰는 문화연구자 오혜진과 만화평론가 조경숙이 함께 총 10회에 걸쳐 진행한다.

서울시여성가족재단 - 여성신문 공동기획

[‘여성-창작’을 말하다] ③ 영화감독 전고운

영화 <소공녀>, <내게 사랑은 너무 써>의 감독 전고운을 만나다

영화 <소공녀>를 청년영화, 여성영화, 도시영화 등 뭐라 불러도 좋겠지만, 무엇보다 이 영화는 ‘기호품’에 관한 영화다. 취향이 곧 재산이라는 ‘취존’의 시대에, ‘가난한 젊은 여성의 취향’이란 얼마나 손쉽게 평가절하되는가. 하얗게 세어버린 긴 머리를 한 채 위스키를 마시는 ‘미소’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어디 한 번 계산해보라고. 어떤 ‘가성비’ 셈법으로도 답 안 나오는 ‘취향의 값’을.

내게 너무 쓴 페미니즘

오혜진(이하 ‘오’): 감독님의 대표 단편 <내게 사랑은 너무 써>를 봤어요. 고등학생 남녀가 고시원에서 첫 섹스를 하는데, 남학생이 자리를 비우자 옆방 남자가 들어와 여학생을 협박하죠. ‘가만히 있지 않으면 너의 섹스 사실을 너희 엄마에게 알리겠다.’ 그게 두려웠던 여학생은 남자에게 강간당해요. 방 밖에서 그 상황을 인식한 남학생은 도망치고요. 꽤 자극적인 영화라, ‘이 연출은 여성주의적인가?’라는 의문도 들긴 했습니다.

전고운(이하 ‘전’): 포인트는, 여학생이 처한 딜레마적 상황은 남학생이었다면 겪지 않을 거라는 거죠. 청소년에게 섹스는 자연스러운 거라고 생각해요. 신체는 이미 성숙했고 성적 호기심도 왕성한데, 청소년의 섹스가 금기시되다 보니 그게 총칼도 아닌데 협박수단이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제가 이런 영화를 종종 찍다 보니 “너는 영화로 운동을 하려고 하는 거냐”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제 영화는 그냥 ‘영화’가 아니라 ‘여성영화’로 분류됐죠. 그 이후 여성주의적으로 보이는 이슈를 우회적으로 표현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소공녀>는 그런 전략의 산물이기도 해요.

 

영화  한 장면. 주인공 미소는 가난하지만 담배와 위스키를 좋아하는 자신의 취향 만큼은 고수한다.
영화 <소공녀> 한 장면. 주인공 미소는 가난하지만 담배와 위스키를 좋아하는 자신의 취향 만큼은 고수한다.

“담배 피우는 여자, 괜찮잖아?!”

오: <내게 사랑은 너무 써>와 <소공녀> 모두 ‘공간’ 문제를 중요하게 다룹니다. <내게 사랑은 너무 써>에서 학생들이 섹스하는 고시원은 벽이 너무 얇아 그들의 대화가 옆방 남자에게까지 들리고요. <소공녀>는 비싼 집세 때문에 집을 버리고 친구들 집을 전전하는 여성청년 ‘미소’의 이야기죠.

전: ‘미소(微所, microhabitat)’는 ‘미생물이 서식하는 아주 작은 곳’을 의미해요. “도시에서는 인간이 인간에게 공간이 돼줘야 한다.”라는 문장을 읽은 적 있는데 무척 공감했어요. 물리적인 공간이 없어도 내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사람은 견딜 수 있거든요. 그런 물리적・관계적 의미의 공간이 모두 없어진 상황에 대해 말하고 싶었어요.

오: 아주 좁은 공간에서 거주할 수 있게 공간을 효율적으로 분할한 청년주거 프로젝트가 있었어요. 책꽂이를 펴면 그게 침대나 소파가 되는 식. 그 효율적인 공간 활용에 놀랐지만, 그건 청년들에게 계속 욕망을 줄이라는 강요 같더라고요. 사람이 살려면 어느 정도의 넓이가 필요하잖아요. 누구는 넓고 높은 빌딩에 외부인은 들어오지 못하는 자기만의 왕국을 짓고 사는데 청년에게만 욕망을 줄이라는 건 기만적이죠. 그래서 미소가 그 좁고 비싼 공간을 버리고 떠나는 게 통쾌했어요.

전: 제가 집 문제에 특별히 관심이 많다기보다는, 늘 겪는 일이니 그 문제에 대한 화가 쌓여 있어요. 서울에서는 지불한 돈에 비해 만족스런 집을 구할 수 없어요. 그렇게 희생해도 제대로 된 집을 못 얻을 바에야 과감하게 다 포기하는 인물을 보고 싶었어요.

오: 겨울에 섹스하려 옷을 벗다가 너무 추워서 “봄에 하자”라고 포기하는 미소와 남자친구 ‘한솔’의 대화가 인상적이에요. 청년담론을 촉발한 책 <88만원 세대>도 그렇게 시작하죠. 청년들이 돈 없어서 모텔 못 가고 섹스 못하는 상황을 ‘섹스의 경제학’이라고 불렀어요. ‘N포세대론’과도 통하죠. 이 담론들은 두 가지 이유로 비판됐습니다. 그 논의들이 상정하는 생애주기별 과업이 남성에게만 자연스러운 것인 만큼 청년의 얼굴을 남성으로 상상하게 한다는 점, 청년을 비용의 문제에 매몰된 경제동물의 형상으로 이해하게 한다는 점. 그런데 <소공녀>는 유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지만 전혀 달라요. 오히려 돈이 없는 상황에서도 절대로 ‘취향’을 포기하지 않는 여성청년을 내세우죠. 저는 이게 청년담론의 남성 중심적이고 경제환원론적인 성격에 대한 대항으로 읽혔어요. 영화에서 돈 문제는 핵심적이긴 하지만, 미소가 어떻게든 돈을 더 벌려고 하는 인물은 아니잖아요.

전: 그 책 쓴 분은 88만원 세대 아니잖아요. 저는 정확히 88만원 세대, N포세대에 속한 여자에요. 옛날과는 상황이 꽤 달라졌어요. 청년들의 가방끈도 길어지고 대중매체에서는 자꾸 취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돈 벌기는 점점 힘들어져요. 즉 취향을 갖고 있어도 그걸 구현할 수가 없어요. 직장도, 집도.

오: 이 영화를 그냥 ‘청년영화’로 분류하는 게 불철저하다고 생각됐어요. 남성청년과 여성청년이 경험하는 현실은 다르니까요. 주인공이 ‘한솔’이었다면 영화는 달라졌겠죠. 생계방편으로 가사도우미를 선택하지 않았겠고, 담배나 위스키라는 취향의 맥락도 달랐겠죠.

전: 저는 <소공녀>가 최대한 많은 관객이 보는 여성영화가 되길 바랐어요. 계속 영화를 찍을 수 있다는 보장이 돼야 하니까. 그래서 여성문제를 대놓고 전면화해서 강요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게 했어요. 그냥 “담배 피우는 여자, 괜찮잖아?!” 이런 느낌으로. 전 제가 영화를 계속 찍는 게 저 나름의 페미니즘 운동이라고 생각해요.

 

영화  속 미소와 정미의 대화 장면.
영화 <소공녀> 속 미소와 정미의 대화 장면.

“왜 이렇게 처절하게 살아야 돼?”

오: <소공녀>의 주인공은 역시 ‘담배’와 ‘위스키’ 같아요. 중후한 남자의 귀족적 취미라고 생각되는 것들인데, 빈곤한 젊은 여자가 이 취미를 정체성처럼 끝까지 고수한다는 게 핵심이죠. 사실, 모든 사물에 계급과 성별이 기입돼 있는 듯해요. ‘스타벅스 커피’는 ‘된장녀’의 상징이고, 좌파는 ‘샤넬백’을 들면 안 되고, 세월호 유가족은 ‘국궁’ 취미를 가지면 안 되고……. 이런 기준은 여성의 취향과 소비에 더 가혹하게 적용돼요. 미소가 유일하게 사랑하는 게 담배랑 위스키인데, 그게 친구 ‘정미’에게 “그 사랑 참 염치없다”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첨예한 문제가 되잖아요. 그 장면을 보고, 청년문제가 돈만 있으면 다 해결되는 것 같지만 돈 문제로 설명되지 않는 게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미소가 위스키를 마시는 바 장면은 마치 미소가 소망하는 미래 같더라고요. 남녀노소 누구나 남들 신경 쓰지 않고 오롯이 자신의 취향에 집중하는, 도래하지 않은 민주적인 풍경.

전: 나보다 위에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뭘 하든 신경 안 쓰는 반면, 아래에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고급한’ 취향을 갖고 있으면, ‘네가? 나랑 같은 걸 소비해?’라고 재단하죠.

오: 전 미소가 친구들 집에 얹혀사는 값을 다 지불했다고 생각했어요. 매번 계란도 사갔고. 특히 아내랑 이혼한 남자 후배를 달래려고 미소가 감정노동 엄청 하잖아요. 미소가 집세 내듯 가사, 감정노동, 돌봄노동 같은 성별화된 노동을 하는 게 의미심장했어요.

전: 친구가 힘들어하면 이야기 들어주고, 밥 안 먹으면 밥해주는 건 성별화된 노동이기 전에 그냥 당연한 것 같아요. 집값이 이렇게 비싸지 않았다면, 이렇게 공간에 쪼들리지 않았다면 친한 옛 친구를 재워주는 일에 대가를 바랄까요? ‘네가 우리 집에 있는 동안 이만큼의 일을 했어’ 같은 계산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옛날엔 그냥 ‘이리 오너라’ 하면 객식구도 군말 없이 재워줬잖아요. 하지만 우리 모두 공간이 없다 보니 친구가 재워달라는 게 부담되고 계산하게 되는 거죠. 힘든 친구도 재워줄 수 없을 만큼 처절하게 사는 내 인생이 잘못된 거라고 생각했어요.

 

영화  포스터
영화 <소공녀> 포스터

‘품위’ 만큼은 돈으로 살 수 없어

오: 정미와의 식탁 대화 장면은 이 영화의 정점입니다. 미소가 정미에게 ‘왜 그렇게 멀리 앉냐’라고 묻자, “여기가 편해”라고 답하는 정미의 대사는 결정적이에요. ‘너랑 나는 친구지만 계급이 달라’라고 명백히 선언하는. 그런데 영화가 유독 정미에게 냉혹한 듯해요. 남편 눈치를 보며 사는 정미도 복잡한 심경일 텐데, 미소를 대하는 태도는 너무 위악적이죠. 정미가 미소에게 “너는 가정이 없어서 모르겠지”라고 말하는 장면에 이르면, 대부분의 관객은 이미 미소에게 연민이 생긴 상황이니 손쉽게 정미를 비난하고 싶어져요.

전: 친구 간에도 계급이 있다는 걸 표현하고 싶었어요. 정미는 인식하지만 미소는 감지하지 못하는 벽. 사실 제가 정미 같은 인간이에요. 그래서 저를 혼내고 싶었어요. “너를 위해서, 내가 너를 보내야겠다”라는 정미의 대사를 통해서, 사실은 보수적인데 ‘진보’를 빙자해 폭력적으로 구는 사람들을 풍자하고 싶었어요. 어떤 분들은 미소가 민폐 캐릭터라는데, 전 동의하지 않아요. 미소가 부탁할 때 ‘싫다’라고 솔직하게 얘기했으면 됐거든요. 하지만 자기가 좋은 사람이고 싶으니까 거절하지 못한 거죠.

오: 미소의 노년을 생각하니 ‘맥도날드 할머니’로 알려진 권화자 씨가 떠올랐어요. 백발의 미소는 그분의 조로한 모습 같아요. 그분은 젊은 날 외교부에서 일하다가 노년에 혼자 맥도날드를 떠돌며 살았죠. 커피 한 잔과 영자신문을 들고요. 이분이 타인이 베푼 호의를 거절했다고 사회적 비난이 거셌어요. 노년 여성의 허영으로 매도됐죠.

전: 그걸 왜 비난하죠? 아무에게도 피해 주지 않았잖아요. 저는 ‘품위’ 만큼은 돈으로 살 수 없다고 생각해요. 미소는 품위 있는 인간이고, 그건 결코 돈으로 환산될 수 없어요.

오: 마지막 질문입니다. 한국영화계에서 여성감독으로서 어떻게 ‘존재’하고 계신가요?

전: 어떻게 존재하는지는 제가 판단할 수 없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존재하는지도 잘 모르겠네요. 단지, 제가 관심 있는 건 여성 이야기인데 이게 흥행 가능성이 낮다고 생각된다는 게 좀 슬퍼요. 남자들은 당연하다는 듯 자기가 잘 아는 남자 얘기를 쓰고, 티켓 파워 있는 남자배우를 캐스팅하니 흥행할 확률이 더 높아지잖아요. 그거 좀 억울하던데요.

전에 누군가 차기작 계획을 물으면 전고운 감독은 이렇게 답하곤 했다. “없어요. ‘여성’ 감독이니까.” ‘웃으며 싸우는 방법’을 터득했다는 전 감독만의 화법이다. 하지만 분명히 이렇게도 말했다. 언젠가 ‘몸 쓰는 여성’이 등장하는 영화를 만들겠다고. 힘 있는 여자가 주는 카타르시스가 있다고. 그러니 기다려 볼 일이다. “좀 공격적인 여자라도 괜찮잖아?!”라고 넘길 만한 마음의 근육을 키우며.

* 전고운: 영화감독. <내게 사랑을 너무 써>로 제1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아시아단편 경선’ 우수상을, <소공녀>로 뉴욕아시안영화제 최우수영화상, 판타지아국제영화제 ‘AQCC 국제섹션상’ 등을 수상했다. ‘광화문시네마’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여성-창작’을 말하다] ① 웹툰 <먹는 존재>, <족하>, <홍녀>의 작가 ‘들개이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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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창작’을 말하다] ② 소설집 『쇼코의 미소』·『내게 무해한 사람』의 작가 최은영www.womennews.co.kr/news/144347

 

 

 오혜진 문화연구자.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공저), 『그런 남자는 없다』(공저), 「퇴행의 시대와 ‘K문학/비평’의 종말」 등의 책과 평론을 썼다. <한겨레신문>에 칼럼을 연재했고, <문화/과학>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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