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영 작가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정은영 작가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정은영(44)은 국내외에서 꾸준히 이름을 쌓고 있는 중견의 시각예술가다. 지난주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의 작가상'(SBS문화재단 공동주최) 최종 수상작가로 선정된 것은 미술계가 그의 활동을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반영하는 가장 최근의 사례다.

“정은영의 시도는 현대미술의 형태를 빌어 사라져 가고 있는 전통예술을 다루고, 성 정체성의 위치를 무대 형식의 예술로 풀어낸 점이 돋보였다.” 이 같은 국립현대미술관의 심사평이 시사하듯 그는 오랜 기간 ‘여성국극(女性國劇)’이라는 전통에 기반을 둔 공연예술을 연구하고 아카이브 작업을 해 왔다. 이제는 거의 잊힌 공연예술 장르의 발자취를 추적한 것을 토대로 공연·전시 작업을 한 것이 작가상 수상에 기여한 것이다. 2008년부터 시작된 그의 ‘여성국극 프로젝트’에는 2016년 가을 남산예술센터에서 공연한 연극 ‘변칙 판타지’, 2013년 국제다원예술축제인 페스티벌 봄에서 선보였던 '오프스테이지/마스터클래스'를 비롯해 공연물도 여럿 끼어 있다.

 

여성국극을 소재로 한 연극 ‘변칙 판타지’의 한 장면. 정은영 작가가 연출을 맡았다. ⓒ남산예술센터 제공
여성국극을 소재로 한 연극 ‘변칙 판타지’의 한 장면. 정은영 작가가 연출을 맡았다. ⓒ남산예술센터 제공

여성국극은 여자배우들만 출연하는 창극이다. 자연히, 극중 남자 역을 남장한 여자배우들이 맡게 된다. 해방 후에 생겨나 한국전쟁 시기를 포함해 1950년대에 전성기를 맞았지만 오래 가지 않아 1960년대부터 소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한창때에 여성국극의 남역 배우들은 지금의 아이돌과 같은 대스타였다. 정은영은 여성국극의 쇠퇴 배경에 대해 합리성이 결여된 문화정책과 여성으로만 구성된 예술단체에 대해 남성집단이 가진 편견이 깊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의 눈초리를 보낸다. 

여성국극은 1990년대 초반부터 몇몇 1, 2세대 배우들을 주축으로 부활의 시도가 있기는 했으나 2000년대에 이르러 지원기금의 축소와 배우들의 노쇠로 다시 동력을 잃었다. 일본의 다카라즈카 가극단이 지금도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다카라즈카 역시 여배우들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백 년이 넘는 오랜 역사를 가진 예술단체다.

정은영이 연출을 맡았던 ‘변칙 판타지’는 2000년대 초반, 부활 움직임이 일었을 때 여성국극 ‘춘향전’을 우연히 보고 매료된 30세 여성 직장인 N을 주인공으로 한다. 여성국극 남역 배우 L의 제자로 입문한 N은 약 10여 년간 훌륭한 여성국극 남역 배우가 되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으나 결국 그것이 거의 불가능한 것임을 깨닫고 도망친다. 정은영은 이 작품에 아마추어 게이 합창단 지(G)보이스를 참여시켜 이들이 N에게 던지는 질문을 통해 젠더, 정치, 삶과 무대에 대한 관객의 사유를 자극했다.

 

여성국극을 소재로 한 연극 ‘변칙 판타지’의 한 장면. 정은영 작가가 연출을 맡았다. ⓒ남산예술센터 제공
여성국극을 소재로 한 연극 ‘변칙 판타지’의 한 장면. 정은영 작가가 연출을 맡았다. ⓒ남산예술센터 제공

남역 배우를 꿈꾼 N이나 게이 합창단이 연극에 출연하는 것에서 암시되듯 정은영의 여성국극 프로젝트는 젠더 문제에 대한 그의 천착이나 여성주의적 시선에서 비롯됐다. 

“오랜 기간 성별규범에 저항하는 작업들을 해왔습니다. 2008년에 우연히 한국 여성문화 연구를 하던 선배를 따라 1세대 여성국극 남역 배우 조금앵 선생의 인터뷰를 따라가 참관한 것이 첫 인연이 되었고, 그때부터 여성국극을 보다 분석적으로 접근하게 되었습니다.”

정은영이 여성국극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초기에 남역 배우들에 관해 기록하던 방식은 더욱 적극적으로 배우들의 수행적 삶을 공연실험을 통해 드러내는 것으로 점차 변했다. 그는 또 여성국극에서 읽어낸 전복적이고 저항적인 언어들을 페미니스트-퀴어(성소수자) 정치학으로 풀어내는 작업을 해왔다. 

그는 오는 12월에는 인도 고아의 세렌디피티 아트 페스티벌에서 한국-대만-일본판에 이은 ‘변칙 판타지-인도판’을 공연할 예정이다. 그 외에도 11월에 상하이 비엔날레에 참가하며, 내년 5월에는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에 신작을 출품한다. 

올해의 작가상 선정에 앞서 정은영은 에르메스재단 미술상, 신도리코 미술상을 받았었다. 정은영과 ‘올해의 작가상 2018’ 후원작가로 선정된 3인의 작품은 올해 11월 25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전시된다. 정은영은 이번 전시에서 여성국극단의 대표적 공연장이었던 명동예술극장(구 시공관)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촬영한 ‘유예극장’ 등 총 11점의 영상·아카이브·설치 작품을 선보였다. 

 

강일중 공연 칼럼니스트. 언론인으로 연합뉴스 뉴욕특파원을 지냈으며 연극·무용·오페라 등 다양한 공연의 기록가로 활동하고 있다. ringcycle@naver.com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