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추석 연휴가 끝난 직후 교수회의를 하고 회식이 있었다. 추석은 잘 쇠셨느냐, 명절 즐겁게 보내셨느냐 하고 인사를 주고받았다. 나는 네 네 하다가, 참석자의 90 퍼센트인 남자들이 그런 인사를 나누는 상황에 좀 심술이 나서 “그런데, 명절 좋아하는 여자는 없어요”하고 덧붙였다. 회식 분위기 망치면 안 되니 슬쩍 웃으며 말했지만 뼈가 들어 있었다. 그런데 의외로 이 말이 대대적인 호응을 받았다. 한 분이 “남자도 명절 싫어요!”하니 여기저기서 고개를 끄덕이며 맞아 맞아 하는 것이 아닌가.

“휴일이라고 쉬고 싶은데 새벽 같이 일어나 차례 지내러 가야죠, 대강 끝나면 눈치껏 처가에도 가야죠, 우리도 힘들어요.”

“와이프는 일에 지쳐 저기압이고 여기저기 아프다니 어깨라도 주물러줘야죠. 나도 지쳤는데.”

“차례 끝나고 식사하고 차 마시고 나니까 집사람이 그만 일어서서 친정 가자고 눈짓하잖아요. 그 때 어머니가 ‘누나네 온다고 지금 전화 왔다. 만나고 가라’하시니 어떻게 해야 돼요? 어휴, 골치 아파요. 명절 끝나면 지쳐요.”

“명절은 도대체 왜 있는 거야?”

이렇게 해서 이구동성으로 남자도 명절이 싫다는 것이 결정되었다. 아직도 가부장제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기는 하나, 더 이상 성차별주의자로만 살 수 없는 남자들은 명절이 불편하고 힘들다. 즐거우라는 명절이 어쩌다가 그 의의를 잃어버리고 여자도 남자도 다 싫어하는 골칫거리가 되었을까?

 

추석연휴를 앞둔 서울역 승강장에 귀성객들이 열차를 타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추석연휴를 앞둔 서울역 승강장에 귀성객들이 열차를 타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음식문화 평론가 황교익씨는 요즘의 차례문화는 오래된 유교예법과 거리가 멀다고 했다. 조선조 말 양반으로 신분 세탁을 한 상민들이 양반 행세를 하려고 집집마다 차례를 지내게 되었는데, 어떻게 지낼 줄 모르다보니 양반집 의례를 따라하면서 '홍동백서', '조율이시' 등 없던 법도들을 이 때 만들었다고 한다. ‘주자가례’를 봐도 유교 예법에는 어떤 음식을 올리라고 지정한 바가 없으니 가족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차례상에 올리면 되고, "본래 추석은 노는 날"이니 조상께 예를 갖추는 날로 제한하지 말고 축제를 즐기라고 권했다.

무리한 관습이다 보니 변화가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다. 부모님이 도시로 역귀성해서 차례를 간소하게 지내기도 하고, 콘도에 모여 차례상을 주문배달 시키기도 한다. 젊은 세대는 불평등한 관습을 더 못 참는다. 귀하게만 키운 딸들이 결혼했다고 시댁에 가서 갑자기 고된 노동을 묵묵히 하겠나. 자식들 다 해 먹이느라 시어머니가 힘든 집도 많다. 그나마 한두 해 오다가 그 다음에는 아예 해외여행을 떠나 버린다. 이제 차례상의 간소화는 필수다.

명절을 평등하게 마음 편히 보낼 방법은 없을까? 오전에는 시댁, 오후에는 친정, 또는 설에는 친정, 추석에는 시댁? 누군가의 희생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어느 집도 형제자매가 배우자까지 명절에 다 모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때그때 사정 되는대로 하거나 평소에 자주 뵙지 못한 쪽으로 갈 수도 있지 않을까. 무리한 원칙은 어차피 무너지고 있으니 대안이 필요하다.

그 동안 워낙 의례를 중시하느라 사라져 버린 명절의 즐거움도 되살리자. 다 같이 영화를 보러 갈 수도 있고, 고향에 모였다면 이웃들을 만나면서 ‘동네 한 바퀴’를 할 수도 있다. 취미가 맞는다면 고전적으로 윷놀이, 화투놀이를 해도 좋고, 음주가무를 해도 좋다. 정치와 종교 이야기, 결혼하라는 압력만 빼고, 수다 삼매경에 빠지는 것도 서로 회포를 푸는 좋은 놀이다. 내 막내 동생은 부모님 댁에 가면 늘 안마 서비스로 두 분을 즐겁게 해 드렸다. 집집마다 개성을 살리고 창의성을 발휘하여 즐거운 명절을 되찾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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