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장게장 한통을 사들고 친정에 가서 어머니와 둘이 점심을 먹었다. 한 십년 전 일이다. 지금은 돌아가신지 삼년이 넘어 그 장면을 생각하면 그리움만 솟는다.

게 한 마리를 잘라놓고, 게딱지를 어머니께 드렸다.

“엄마, 여기 진지 비벼 드세요.”

“아니다, 너 먹어라.”

“아니에요. 저희 집에도 사놓고 어제도 먹었어요.”

“그래? 그럼 내가 먹어볼까.”

맛있게 드시다가 하시는 말씀,

“얘, 나 이 게딱지 하나를 다 먹어 보는 게 처음이구나.”

나는 너무 놀라서 말이 막혔다.

“엄마... 정말?”

“응, 너희들이 먹은 데다 다시 비벼 먹기는 했지만... 잘라 놓으면 뭐 내가 그리로 손이 가나.”

나는 밥 잘 먹다가 울 뻔 했다. 어머니 놀라실까봐 간신히 참았다.

어머니는 그 때 팔십이 넘으셨다. 우리 집은 어렵지 않게 살았다. 그런데 어찌 게딱지 하나를 드시지 못했을까? 대가족 시절엔 할아버지, 할머니께 드렸다. 그 다음엔 아버지께 건네셨겠지. 아버지가 안 계신 밥상에서는 아이들을 주신 것이다. 어머니가 한 번도 못 드신 것도 모르고 우리는 넙죽 잘도 받아먹었다. 다른 식구 없을 땐 아껴뒀다 주려고 드시지 않았겠지.

다른 사람도 아닌 우리 어머니가 게딱지 하나를 드시지 못했다는 것은 나에게 충격이었다. 어머니는 전형적인 주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 문화에는 온갖 풍상을 겪으면서 한 평생 자식을 위해 희생하신 어머니에 대한 눈물겨운 칭송이 있다. 소설, 영화, 드라마의 영원한 주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난 어릴 때부터 그에 별로 공감하지 못했다. 우리 어머니는 가엾고 눈물겨운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라고 살면서 왜 고생이 없었겠나.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부산 피난시절에 결혼하고 전쟁폐허를 복구하는 시절에 사남매를 키우셨으면 어떻게 고생이 없었을까. 구구절절이 말하지 않아도 “소설책 몇 권은 된다”는 그 시절 할머니들의 사연이 어머니의 삶에도 있다.

어머니에게는 하지만 대학교수로서의 삶이 있었다. 학교를 다닐 때 공부를 잘 해서 외할아버지의 자랑이었다. 대학을 다니다가 1948년에 미국 장학금을 받아 배를 타고 미국 유학을 가셨다. 학장님이 몸소 집에 찾아가셔서 장래가 촉망되니 꼭 보내야 한다고 보수적인 외할아버지를 설득하셨다고 한다. 부산 피난시절에 돌아와 교수가 되셨고 대학 다닐 때부터의 애인과 결혼하셨다. 공부한 것을 사회에 유용하게 써보고자 학교 밖에서도 많은 노력을 하셨다.

어린 나에게 어머니는 무조건 사랑을 주는 우리 엄마였지만, 존경스러운 역할모델이기도 했다. 책 읽고 공부하는 어머니, 단정하게 차려입고 출근하는 어머니는 내 일상의 풍경이었다. 멋진 대학생 언니들이 가끔 집에 찾아와 어머니를 대하는 모습에는 하늘같은 존경심이 묻어났다. 나도 크면 엄마처럼 되어야지 하고 생각했다.

그런 어머니가 팔십이 넘도록 게딱지 하나를 드시지 못한 것은 진정 난 몰랐다. 성역할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그 날 그 하나를 어머니 접시에 건넨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그 이후로 나는 게딱지를 보란 듯이 여자들에게만 권한다.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행하는 이 소심하면서도 혁명적인 반란은 늘 동석한 남자들을 놀라게 한다. 당연히 자기 것인 줄 알았던 게딱지가 내 손에 들려 다른 접시로 갈 때의 그 표정을 슬쩍 관찰하면서 나는 속으로 말한다.

“세상을 좀 바꾸고 있어요.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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