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간(rape)’은 미국의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시인 에이드리언 리치(Adrienne Rich)의 시집 『난파선 속으로 잠수하기』(Diving into the wreck, 1973)에 수록된 작품이다. 지난 8월 14일 대한민국 1심 재판부는 성폭력 피의자 ‘안희정 무죄’ 판결을 선고했다. 공교롭게도 이날은 고 김학순 할머니가 대한민국 사회에 외친 #미투(Metoo·나도 말한다) 목소리가 무려 27년 만에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이기도 했다.

 

일관성을 잃고 표류하는 사회 정의와 모순을 증명할 뿐인 역사. 세상의 절반인 여성의 분노와 냉소가 서로 다른 온도로 온라인 담론 장을 거세게 뒤덮을 때, 김승희 시인이 엮고 쓴 페미니스트 여성 시 앤솔로지 『남자들은 모른다』에서 시를 찾아 읽었다. 엮은이는 ‘강간(rape)’을 성폭행으로 옮겼다.

“당신은 그를 잘 모르지만 그를 알아야만 한다. 그는 당신을 죽일 수 있는 기계를 갖고 있다. 그와 그가 타고 다니는 준마는 쓰레기 더미 속을 마치 장군처럼 뚜벅뚜벅 걷는다. 그가 가지고 있는 이상은 공중에 떠 있어 그의 미소 없는 입술 사이에 한 점의 언 구름이 된다.”

형사사법 조직이라는 살인 기계를 가진 남성 대명사 ‘그(he)’의 세계는 인류애를 망각한 채 미소 없는 입술 사이 언 구름을 뱉을 뿐. 반면 소수자인 당신(‘you’)은 무엇을 가졌나. ‘그’를 알 리 없는 당신에겐 소명할 언어조차 없는 현실이 리치가 인식한 여성 소수자의 세계다. 살아남기 위한 피해 소명은 장군 흉내를 내는 ‘그’의 통치를 영속화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시간이 되면 당신은 그에게 달려가야만 한다. 미친놈의 정액이 당신의 사타구니에서 미끈거리고, 당신의 정신이 미친 듯 소용돌이칠 때 당신은 그에게 자백해야 한다. 당신은 강제로 성폭행을 당한 죄가 있다고.”

강제로 성폭력을 ‘당한’ 죄.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역설이 다시금 대한민국 역사상에 노골적으로 기록된 잔인한 여름이다. 8월 안희정 사건 1심 판결로 사법부는 스스로 위력의 주인이며 가해자를 옹호하는 동료, 피해자를 가해하는 공동정범(共同正犯)임을 투명하게 전시했다. 그들이 세상의 김지은들에게 대한민국이 지옥이며 떠나야 할 곳임을 ‘피해자다움’ 이나 ‘건전하고 순결한 정조’ 등 저급한 언어로 전할 무렵, 나 역시 풀기 어려운 숙제와 법체계 모순으로 얼마간 고난을 겪었다.

첫 칼럼에 썼듯 나는 미투 운동 사각지대라 불리는 친족 성폭력 피해를 겪었고 어린 시절 친형제들에게 성폭력을 당한 일로 부모에게 역설적 ‘죄인’이 되었다. 공소시효 만료로 법적 대응에 나설 수조차 없어, 이 일을 미투 문학 시리즈 『코끼리 가면』에 기록해 가해자를 두둔하는 부모와 세상 일부를 향한 인정 투쟁을 시작했다. 하지만 지난 4월 말 아버지의 부고를 받고 원 가족 중 어느 누구도 원치 않는 조문을 강행하며 나는 한때는 사랑했으며 한때는 몹시 미워해야 할 대상이었던 지인을 잃은 충격과 내적 갈등으로 정신적 탈진 상태가 되었다.

부고 이후 내가 곧장 넘겨받은 생의 숙제는 ‘상속’이었다. 아버지의 재산은 법적 이혼 상태인 어머니 앞으로 돌려져 있었고 극히 제한된 정보를 들고 아버지의 채무와 마주해야 했다. 나는 가족을 벗어났고 동시에 버려졌지만 상속법 상 채무에 책임이 있는 그의 자녀였다. 수년간 연락이 없었던 어머니한테서 수십여 통에 달하는 전화, 문자가 밤낮으로 쏟아졌다. 처음엔 인감 증명서 등 서류를 두 배 분량으로 요구하는 내용이다가 점차 ‘상속 포기’를 강요하는 내용으로 바뀌었다. 지난 5월부터 8월까지, 3개월 간 어머니는 상속 문제를 빌미로 다시 가해자 입장의 폭언을 퍼부었다.

어머니가 내뱉은 가장 최악의 말은 “언제까지 (성폭력 사건을) 우려먹을 셈이냐?”였다. 그는 더 이상 어머니도 여성도 아닌 성폭력 사건의 공동정범일 뿐이었다.

법률 상 필요 서류인 가족관계증명서에는 가해자들과 그를 감싸는 공동정범의 인적 사항들이 열거되어 있었다. 물론 가해자들이 구비한 서류에도 나의 인적 사항은 버젓이 공개되어 있을 것이었다. 담당 법무사를 통해 상속 한정승인 인용 결정문을 받기까지 여름 내내 사법부와 그 대변인은 마치 대한민국의 숨은 이등 시민이면서도 침묵하지 않는 나 너 우리를 벌하려는 듯이 으르렁댔다. 이 모든 과정은, 용기를 짜내었으나 결국 경찰서와 법원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던, 당연한 듯 갈 곳이라곤 오직 정신과 병동 밖에 없었던 숱한 여성 소수자의 처지를 생각하게 했다.

여름의 끝에 시집을 덮고 미국 내 미투에 대한 최초 판결인 래리 라사르 사건 판결문을 꺼내드는 건 필연적이다. 로즈마리 아퀼리나 판사는 남성 대명사 사법부의 대변인이길 거부했다. 같은 팀 선수들에게 위력을 행사해 상습 성범죄를 저지른 죄인 래리 라사르에게 175년을 선고하며 “생존자들의 증언을 듣는 것만큼이나 이 선고를 내리는 것은 나의 영광이자 권한이다. 래리 라사르 당신은 다신 감옥 밖으로 나다녀서는 안 된다. 나는 당신 사형 집행장에 서명한 것. 당신에게 선고를 내릴 수 있어 자랑스럽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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