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순/시인, 서울예대 교수

연말이라 시상식이 참 많다. 한 해 동안 그 분야의 업적들을 나름대로 가리고, 기려 주는 것이리라. 그러나 내가 참석해 본 대부분의 시상식은 하나같이 의례, 그 자체였다. 장황한 축사가 끝나면 시상 순서가 이어지고, 그리고 서둘러 폐회가 된다. 마지못해 눈 도장 찍으러 온 사람들처럼 참석자들은 서둘러 흩어져 버린다. 그래서 나는 점점 더 시상식에 참석하지 않는 쪽으로 마음을 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난달에는 참석자 모두를 감동시킨 한 시상식이 있었다. 여성운동가로서, 반체제 운동가로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인으로서 살다간 고정희를 기려 생전의 친구들이 만든 이 상은 여성감독인 김소영과 기지촌 여성모임인 새움터가 받았다. 고정희가 그렇게 느닷없이 세상을 떠나자 생전의 친구들은 그 동안 그의 생가에다 그를 기억하기 위한 장소를 꾸몄고, 그녀를 기리는 일들을 하기 위해 소리없이 모금했으며, 책을 만들고 축제와 학술 세미나를 열었다. 그리고 해마다 그의 기일 즈음에 그의 생가를 방문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었으며, 드디어 10년만에 그녀의 이름으로 상을 하나 만들었다. 나는 우리 나라에 그토록 상이 많다는데, 고정희 이름으로마저 상을 만들어야 한단 말인가 혀를 끌끌 찼었다. 그러나 시상식에 참석하고나서 그 생각은 싹 가셨다.

시상식엔 고정희의 친구들과 후배들 그리고 생전에 그녀를 만난 적도 없는 소녀들이 참석했다. 한 자리에 이렇게 많은 여성들이, 그것도 세대가 뒤섞여서 모일 수 있다니. 모두 친구처럼, 가족처럼 모여 앉아 고정희의 생전의 모습을 슬라이드로 보고, 상을 주고, 받았다. 상을 주는 사람, 받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다 받고, 다 주는 사람 같았다. 김소영은 수상 소감에서 존경하는 페미니즘 예술가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면서 “여성의 글들이 소리들이 이미지들이 수천 수만의 편지가 되어 수신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현재란 수많은 위협과 오해로 들끓고 있는 듯 보입니다. 우리가 애써 길어 올린 언어들, 이미지들 마저 나눔의 공간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시장은 그들을 외면하고 세계는 시장들로 뒤덮이고 있습니다. 폭력과 전쟁으로 뒤덮이고 있습니다”라고 참석자 모두와 여성들에게 편지를 보내듯 소감을 나누었다. 새움터가 상을 받을 땐 새움터의 언니들이 단상에 모두 올라가 정말 환호작약하며 상 받는 운동가를 축하해 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현의 노래, 소녀 페미니스트들의 공연은 환상적이었다.

고정희의 ‘오매, 미친년 오네’를 랩으로 부르는 그들의 합동 공연은 내가 들은 지상 최대의 강렬하고 비의적이며 주술적인, 그리고 여성 공동체의 목소리가 내지르기 창법으로 부르는 하나의 리드미컬한 함성이었다. 수많은 고정희가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소녀들로 환생하는 듯했다.

시상이 끝나고, 후배들은 모두 어떻게 하면 고정희상을 받을 수 있는지 생각해 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를 새로운 방식으로 자신들 안에서 재탄생시킬 수 있는지 생각해 보겠다고 말했다. 고정희의 몸은 내 곁에 없지만 그녀의 동글동글 굴리는 목소리, 그러나 시렸던 목소리가 그 장소를 가득히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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