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계에 ‘젠더 프리’ 캐스팅 바람 분다
공연계에 ‘젠더 프리’ 캐스팅 바람 분다
  • 장운경 인턴기자
  • 승인 2018.09.06 17:12
  • 수정 2018-09-07 14: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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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어느 무대에서 한 배우가 ‘햄릿’의 명대사를 말하고 있다. 고뇌에 빠진 표정으로 대사를 읊는 남성의 얼굴을 떠올리기 쉽지만, 이 ‘햄릿’은 여성이다.

영국 극장 ‘셰익스피어스 글로브(Shakespeare’s Globe)’에서 공연 중인 연극 ‘햄릿’은 ‘젠더 프리(gender-free) 캐스팅’으로 시도됐다. ‘성에 의한 제약을 받지 않는 것’을 뜻하는 ‘젠더 프리’를 캐스팅에 적용한 개념이다. 아예 젠더가 정해지지 않은 배역을 쓰거나, 젠더가 고정된 배역일지라도 이를 연기할 수만 있다면 누구나 캐스팅할 수 있는 방법이다. 남성 중심 공연계의 성비불균형과 여성혐오 요소를 해소하기 위해 도입됐다.

 

햄릿(좌, 미셸 테리)과 호라티오(캐트린 에어론)
'햄릿'(좌, 미셸 테리)과 '호라티오'(캐트린 에어론) ⓒ내셔널 시어터 홈페이지

작년 11월 ‘셰익스피어스 글로브’에 취임한 미셸 테리 감독은 성별과 인종, 장애 유무를 가리지 않는 캐스팅을 하겠다고 밝혀 화제 됐다. 그는 지난 4월 셰익스피어의 대표 남성 중심 서사 ‘햄릿’을 젠더 프리 캐스팅으로 올렸다. 특히 남성 캐릭터 ‘햄릿’을 여성인 자신이 연기했다. 이어 공연한 ‘뜻대로 하세요’ 역시 젠더 프리 캐스팅으로 이뤄졌다.

올해 초 영국은 젠더 프리 캐스팅에 발맞추기 위해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네로파(NEROPA·Neureal Roles Parity) 프로그램은 대본을 분석해 성별 구분이 필요 없는 대사를 도출한다. 반드시 여성이거나 남성, 또는 다른 성이어야만 하는 배역을 제외한 나머지 배역은 모두 중립이다. 이를 바탕으로 공연 관계자들은 중립 캐릭터의 성비를 동일하게 맞춰 젠더 프리 캐스팅을 진행한다.

 

남성 중심 공연으로 인한 성차별·여성 배우 기회 부족

국내 공연계는 어떨까. 7월 공연한 어느 뮤지컬에서는 9명이 캐스팅됐지만, 여성 배우는 없었다. 공연예매사이트 인터파크 티켓 연극·뮤지컬 예매점유율 7월 월간 랭킹 상위 20개를 살펴본 결과, 캐스팅 배우의 성비 불균형을 확인할 수 있었다. 40개 공연 중 여성 배우가 남성 배우보다 많이 캐스팅된 공연은 7개, 남성 배우가 많이 캐스팅된 공연은 27개였다.

공연 원작부터 남성 중심 서사인 작품이 대다수다. 연출가 등 제작 관계자들이 원작의 성비불균형을 극에 반영하고, 그대로 남성 배우 여럿과 1~2명의 여성 배우가 무대에 선다. 남성 배우가 주인공이나 극 진행에서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캐릭터에 캐스팅될 때 여성 배우는 이름조차 없는 조연에 그친다. 여성 배우들은 차기작이 없어 연기 활동을 오래 쉬기도 한다.

공연계 성비불균형은 여성 배우의 자리를 좁게 만들 뿐만 아니라, 성차별적 요소를 재생산하기도 쉽다. 2013년부터 오픈런 중인 뮤지컬 ‘여신님이 보고 계셔’는 사회에서 지정한 ‘여성성’을 그대로 따랐다. 무대에는 6~7명의 남성 배우와 1명의 여성 배우가 올랐다. 남성 배우는 각양각색으로 개성 있는 캐릭터였지만, 여성 배우는 ‘남성의 희망인 여신’ ‘헌신하는 어머니’ ‘남성의 구원이 필요한 과부’ 등을 상징하는 1인 다역을 연기했다.

젠더 프리 캐스팅 원하는 목소리에 국내서도 시도

국내에서도 젠더 프리 캐스팅을 원하는 공연계 팬들의 목소리가 있다. 일주일에 적어도 2번 이상 공연을 관람한다는 송서영 씨는 “매출을 위해 남성 배우를 더 쓰려고 하는 업계 사정 등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생각했지만, 젠더 프리 캐스팅은 당연히 바라왔다”고 말했다.

극 중 여혐요소를 인지하고 과거보다 공연을 덜 관람하게 된 경우도 있다. 한 달에 1~2번 공연 관람으로 빈도가 줄었다는 조민형 씨는 “젠더 프리 캐스팅을 바라는 이유는 여성 배우 일자리 증가도 있지만, 관객으로서 극에 대한 만족도 열망도 크다”며 “남성 배우들만 극에 나오면 내 이야기가 아닌 기분이 들어 몰입이 힘들다”고 설명했다. 조 씨는 “기본적으로 극마다 여성혐오가 내재돼 있다고 생각한다”며 “페미니즘을 접하고 난 뒤 공연 관람 빈도가 줄었다”고 덧붙였다.

모든 배역을 젠더 프리 캐스팅하는 것은 현실적 어려움이 따르지만, 국내에서도 몇 차례 시도된 바 있다. 연극 ‘메멘토모리’, 판소리 뮤지컬 ‘적벽’ 등이다. 적벽대전을 배경으로 한 ‘적벽’은 ‘공명’과 ‘주유’ 등 주요 남성 캐릭터를 여성 배우가 맡았다. 총 5명의 배우가 등장하는 ‘메멘토모리’는 성별이 지정되지 않은 주인공 1명을 4개의 감정으로 나눠 여성·남성 배우 모두 같은 사람을 연기했다.

여성 배우 중요 배역에 캐스팅하고 특정 젠더 희화화 주의해야

일부 팬들은 젠더 프리 캐스팅에 아쉬움 섞인 반응을 보인다. 현재 공연 중인 뮤지컬 ‘록키호러쇼’, 2013년 공연한 연극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등에서는 여성 캐릭터에 남성 배우를 캐스팅 해 여성 배우의 자리는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성 배우가 비중 있는 남성 캐릭터를 맡아 자신의 역량과 새로운 재미를 보여줘야 한다고도 말한다. 조민형 씨는 “비중이 적은 조연보단 주인공을 젠더 프리 캐스팅해야 한다”며 “남성 주인공의 젠더 프리를 적극 활용하면 페미니즘적 의의를 넘어 극 자체도 훨씬 재미있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송서영 씨는 “여성 배우가 맡는 여성 캐릭터는 성적으로 묘사되거나 비중이 거의 없는 편이 많다”며 “공연계 팬들은 남성이 해온 기존 캐릭터에 여성 배우를 캐스팅해도 캐릭터의 성격이나 극의 플롯에 잘 녹아들어갈 수 있다고 종종 얘기한다”고 전했다.

한편, 젠더 프리 캐스팅이 진정한 의의를 지니기 위해선 주의할 점이 있다. 과장된 억양, 말투, 행동 등 고정관념을 바탕으로 연기할 경우 특정 젠더가 부정적으로 소비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2016년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에서 남성 배우가 ‘헬레나’를 맡아 화제 됐지만, 짙은 화장과 화려한 드레스로 꾸민 채 교태를 부리며 ‘헬레나’를 소화했다.

윤단우 무용 칼럼니스트는 “남성 배우가 여성 캐릭터를 연기할 때는 주로 어둠, 악, 꽃뱀 등 여성의 부정적인 면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가 많았다”며 “관능미와 여성성을 부각하기 위해 화장을 짙게 하고 교태를 부리며 연기해온 남성 배우의 모습은 젠더 프리 캐스팅의 의의와 맞닿아 있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무대는 과거부터 항상 남성의 전유물이었다”며 “젠더 프리 캐스팅을 시도해가며 여성 배우를 통해 고정관념을 깨고 작품의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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