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별은 아무 상관 없어요” 젠더 프리 연극 ‘100세 노인’ 만나다
“성별은 아무 상관 없어요” 젠더 프리 연극 ‘100세 노인’ 만나다
  • 장운경 인턴기자
  • 승인 2018.09.07 14:04
  • 수정 2018-09-12 18: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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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손지윤(좌), 이형훈 배우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두 배우는 알란 3이라는 캐릭터에 더블캐스팅 돼 활약 중이다.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손지윤(좌), 이형훈 배우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두 배우는 '알란 3'이라는 캐릭터에 더블캐스팅 돼 활약 중이다. ⓒ여성신문

지난 2일 막 내린 연극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이하 ‘100세 노인’)은 모든 배역에 젠더 프리를 시도했다. 여성 배우가 남성 배우보다 많이 무대에 오르기도 한다. ‘100세 노인’은 배우마다 10개 이상의 배역을 맡아 순식간에 캐릭터가 전환되는 ‘캐릭터 저글링’으로 관객들의 흥미를 사로잡으면서 젠더 프리(gender-free) 캐스팅을 잘 구현해 냈다는 평을 받고 있다.

한 남성 배우가 주인공 '알란'의 엄마로 무대에 오르고 본래 모습대로 연기한다. 관객들은 ‘알란 엄마’라는 명찰을 붙인 남성 배우의 굵직한 목소리를 듣고 폭소한다. 이처럼 극의 첫 젠더 프리 캐릭터는 ‘여성 같지 않은 여성’이라는 코미디 요소로 관객에게 다가온다.

공연 내내 젠더 프리가 이어지자 더 이상 관객은 코미디 요소로 소비하지 않는다. 여성 배우가 ‘마오쩌둥’을 연기하든 남성 배우가 ‘아만다’를 연기하든 어느새 젠더의 구분은 사라진다. 연극 시작 직전, 주의 사항을 안내하던 배우들이 “성별은 아무 상관 없어요”라고 말했던 것처럼 캐릭터 그 자체로 받아들인다.

왜 이들은 젠더 프리 캐스팅에 도전했을까. 이러한 시도가 공연계에서 지니는 의미를 듣기 위해 ‘100세 노인’을 연출한 김태형 연출가를 3일 오전 유선으로, ‘알란 3’에 더블 캐스팅된 손지윤·이형훈 배우를 2일 오후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났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김태형 연출가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김태형 연출가 ⓒ연극열전

⓵ “이번에 성공해야 다음에도 젠더 프리 시도할 수 있으니 부담 컸죠”

-노년 남성인 원작 주인공에 남성과 여성 모두 캐스팅하게 된 계기는

일단 여성 배우들이 목소리 낼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없어요. 이런 기울어진 운동장의 균형을 맞춰보자는 의지가 있었죠. 하지만 이보다 먼저 생각한 건 ‘인간이 말하는 대사라면 성별을 구분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근본적인 의문이었어요.

두 번째는 20세기를 지난 21세기의 가치관과 연결돼 있어요. 폭발, 전쟁, 이데올로기 등으로 투쟁하던 20세기는 굉장히 경쟁적이고 폭력적이었죠. 반면 21세기는 소수자나 약자에 대한 차별을 없애도록 하는 움직임이 있어요. 이를 주인공 ‘알란’으로 보여주고 싶었고, 그렇기 때문에 젠더 프리 캐스팅이 필요했어요.

-젠더 프리 캐스팅은 국내에서 아직 흔치 않은 시도다. 언제부터 페미니즘에 관심 가졌나

래디컬 페미니즘이 막 국내에서 활발해졌을 때부터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지게 됐어요. 좀 더 본격적으로 여성혐오가 피부에 와 닿은 건 최근 몇 년 사이고요. 강남역 살인사건부터 시작해서 그 전후 여러 여성 이슈들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했어요.

동료의 영향도 컸죠. 함께 작업하는 지이선 작가 등 주변 동료들도 페미니즘에 관심이 많아 여러 얘기를 나눌 수 있었어요. 제가 남성이라 실수하거나 잘못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을 동료들이 지적해주기도 했죠.

-국내 연극·뮤지컬계 팬들 사이에서도 젠더 프리 캐스팅을 원하는 목소리가 있었는데

알고 있었죠. 지이선 작가와 함께 했던 연극 ‘더 헬멧’에서도 젠더 프리 캐스팅을 하려다가 공연 내부 사정 때문에 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연극 방향을 틀었죠. 운동권 학생들의 이야기였는데 아예 여성 캐릭터가 주도적으로 성장하고 극복하는 서사를 만들어 갔어요. 젠더 프리와 반대로 오히려 성별을 명확하게 구분해 여성 중심 서사를 풀어냈죠.

-젠더 프리 캐스팅 시도가 불안하진 않았나

부담이 많았어요. 젠더 프리 캐스팅을 시도했는데 흥행하지 못한다면 다음에도 젠더 프리 캐스팅을 시도하기 힘드니까요. 젠더 프리로 캐스팅해도 재미있고, 남성 중심 공연에 비해 매출이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수치로 보여줘야 해요. 이를 위해 작가, 배우들과 애를 많이 썼고 다행히 좋은 시도로 남은 것 같아요.

-젠더 프리 캐스팅인 만큼 배우들에게 특별히 지도했던 부분이 있나

초반에는 남성 배우가 여성 캐릭터를 연기할 때 가는 목소리, 애교를 부리는 듯한 태도로 연기하기도 했어요. 고정관념에 따라 연기하지 말고 배우 그 자체로 연기하라고 지도했죠. 그러자 자기 자신의 목소리로 캐릭터의 핵심을 얘기했고 관객들에게도 전혀 문제없이 전달됐어요.

남성 배우가 코미디로써 여성 캐릭터를 맡는 경우도 많아요. 이럴 경우에는 여성이 희화화되기 쉽죠. 소수자나 약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코미디로 이용하는 건 오랜 전통이에요. 하지만 이를 보고 웃을 수 없는 사람도 분명 있어요. 캐릭터의 진정성을 보여줘야 한다는 신념으로 어떠한 성별이든 희화화하지 않을 수 있었죠.

-남성 배우가 중요 배역을 맡고, 여성 배우보다 많이 캐스팅 되는 이유가 있다면

강자이며 다수인 집단에서 보편적인 캐릭터를 가져오기 때문에 중심 인물로 남성이 선택돼요. 연극·뮤지컬에서 소수자나 약자의 이야기도 다루고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보편적인 인간의 목소리는 남성이 내죠. 제작하는 사람들, 즉 상업 요소를 고려해야하는 관계자들의 원인도 있어요. 그들은 남성 배우를 캐스팅해 공연 주 소비층인 여성 관객을 끌어들여야한다는 생각을 아직 유지하고 있어요.

-실제로 국내 공연계에 여성 배우들이 설 자리가 부족한가

같이 공연했던 여성 배우 중에는 3년 만에 무대에 선 친구도 있어요. 육아·출산 문제 외에도 주어진 역할이 없어서 몇 개월 동안 공연을 쉬기도 하고요. 물론 남성 배우도 일이 없어서 쉬는 경우가 많아요. 모든 배우가 그렇지만, 제가 체감한 바로는 실력 있는 여성 배우들이 충분히 자신을 보여줄 수 있음에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때가 많다는 거예요.

-연출가로서 연극·뮤지컬계 성차별 등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할 점이 있다면

‘여성 배우 중심 공연도 재밌다’라는 반응을 이끌어 내는 게 우리가 할 일이죠. 단순히 여성 배우를 많이 캐스팅하는 것뿐만 아니라 우수한 내용의 연극을 연출해야 해요. 업계 관계자들은 여성 소비자를 노려 남성 배우를 기용하지만, 사실 여성 소비자들은 좋은 공연이라면 관람하거든요. 여성 중심의 우수한 공연을 올리고 계속해서 이에 대한 관객의 니즈(needs)를 창출하는 것이 연출가로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김태형 연출가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김태형 연출가 ⓒ연극열전

⓶ “젠더 희화화 주의하며 보편적 인간 연기할 수 있었어요”

-극에서 맡았던 배역 중 인상 깊거나 신선했던 배역이 있다면 무엇인가

손지윤(이하 손) : 중국 마오쩌둥, 미국 존슨 대통령 등 역사적으로 유명한 남성 캐릭터가 인상 깊어요. 여성 배우로서 어떻게 연기할지 고민했는데, 김태형 연출가가 고민하지 말고 ‘네 자신대로 하라’고 말했어요. 여성인 제 자신과 남성인 캐릭터 사이 벽을 허무는 싸움이었죠.

-성역할 고정관념에서 탈피해 연기할 때 어려웠던 부분이 있었다면

이형훈(이하 이) : 여성 배우, 남성 배우 연기에 기대하는 사회통념이 있어요. 이를 많이 배제하려고 했죠. 초반에는 연습하다가 많이 실패했고 연출가와 함께 합의점을 찾고자 했어요. 특정 젠더를 희화화하지 않는 선에서 모든 관객이 캐릭터를 이해할 수 있도록 특징을 살려야 했으니까요. 보편적 인간을 표현하기 위한 그 균형을 맞추는 게 어려웠어요.

-이번 젠더 프리 캐스팅으로 스스로 변화한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손 : 사상의 변화가 있었죠. 나중에도 젠더 프리 캐스팅 된다면 이번 경험을 토대로 삼을 것 같아요. 인물 자체에 대한 본질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연기하게 되겠죠. 모든 고정관념을 탈피하고 그 캐릭터가 어떤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하려는지 제대로 파악하면 성별이 중요한 게 아님을 깨달았어요.

이 : ‘캐릭터에 성별 구분이 반드시 필요할까’라는 의문을 갖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있는 변화가 있었다고 생각해요.

-‘100세 노인’의 젠더 프리 캐스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이 : 연출가가 인간 본질에 집중하기 위해 의도한 시도예요. 물론 여성 캐릭터가 굵은 목소리를 내는 것이 코미디, 내지는 환기 요소로 쓰이기는 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이는 젠더에 관한 희화화가 아니라 한 배우가 연기하는 여러 캐릭터의 전환을 나타낼 뿐이죠.

초기 캐스팅에서는 ‘100세 알란’도 남녀 더블 캐스팅을 계획했다고 들었어요. 스토리 설정 상 남성 2명으로 캐스팅하게 됐지만, 공연 사정의 한도 내에서 충분히 젠더 프리를 발현해냈다고 봐요.

-남성 중심적인 연극·뮤지컬계에 젠더 프리 캐스팅이란 어떤 의미가 있나

손 : 여성 배우들끼리 한 무대에 서기도 어려웠는데 개인적으로 이번 연극으로부터 가능성을 봤어요. 남성 중심 공연이 대부분이지만, 요즘은 여성 중심 서사도 조금씩 시도되고 있어요. 어떤 역할을 맡게 될지, 또 남성 배우와 더블 캐스팅 되진 않을지 더 기대 되죠. 이런 시도를 잘 해내다 보면 몇 년 후에는 더욱 자연스럽게 이뤄지고 여성 중심 공연도 더 많이 올라오지 않을까 싶어요.

이 : 성비불균형은 국내 사회 전반의 큰 문제예요. 어떻게 그 균형을 맞춰 나가야 할지, 해법까진 아니더라도 그 수면에 돌을 던져준다면 균형을 맞추는 시작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반드시 해결돼야 하는 문제면서도 조심스럽게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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