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져 내팽개쳐진 고무산업 종사 노동자들의 힘든 삶을 온몸으로 절규하며 사라졌던 한 젊은이의 죽음이 있은 지 올해로 꼭 10년째.

세월은 가더라도 고스란히 남겨진 무게의 깊이가 그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게 하듯이 부산경남울산 열사정신계승사업회에서는 권미경 열사의 삶에 대한 재조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지난 6일은 권미경 열사가 죽음으로 현실을 고발한 지 10주기. 부산지역 노동사회단체는 5년째 권 열사 추모행사를 계속해 왔는데 이번에 10주기를 맞아 좀더 많은 이들이 고난받는 사람들을 함께 생각하는 작은 음악회를 개최한 것이다.

8일 토요일 오후 부산대 효원회관에서 열린 음악회는 저물어 가는 한해의 끝자락에서 ‘한 젊은이의 죽음을 기리며 소외 받는 이들을 다 함께 추스려 보는 아름다운 추모의 광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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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연대 문예분과에서 총연출을 맡은 이번 음악회의 1부 ‘고난받는 사람들을 위하여’에서는 민중가요를 발표하고 유가협 422일간의 농성투쟁 기록영화 ‘민들레’등을 상영하여 분위기를 한껏 북돋웠다.

2부 공연‘마지막 일기’에서는 권 열사를 추모하는 일련의 작업들이 단순한 행사로 그치지 않고 ‘추모문화제’로 자리를 굳히도록 하자는 참가자들의 의지가 모아졌다.

69년 전북 장수에서 출생한 권 열사는 82년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보세공장에 취업해 노동자로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낮에는 미싱공으로 근무하면서 밤엔 부산 동주여중 야간학교를 다니며 학업을 계속했고, 어려운 집안 형편 또한 그에게 큰 짐을 지웠다. 그러나 그를 아끼며 기억하는 이들에겐 지역노동자 모임인 ‘도서원 광장’에 나가 노동자 의식에 눈을 뜨면서 따뜻한 형제애를 나눌 줄 알던 자랑스런 노동자의 모습이 강렬하게 남아 있다.

91년 몰아닥친 부산지역 신발업계의 무더기 도산 사태는 당시 그가 다니던 회사로 하여금 소위 구사운동을 실시하게끔 하였다. 초 단위로 목표달성을 요구하고 연일 이어지는 정신교육 등으로 작업의 강도는 점점 강화됐다. 권 열사 역시 목표량을 맞추기 위한 잔업과 야간 학업을 병행해 나가는 삶을 견뎌야 했다.

그러나 그가 더욱 견디기 어려운 건 ‘불량품을 낸 야간학교 학생노동자가 야단맞는 것을 보는 일 그리고 열심히 피땀 흘린 대가가 원가절감, 결근방지, 30분 더 일하기라는 노동강화’로 되돌아오는 모순된 현실이었다.

“죽음으로 항거한 그의 절규가 항도 부산에서는 10년째 잊혀지지 않건만 아직도 사회의 한 단면엔 권 열사가 고발했던 구조적 아픔이 남아 있다”며 이날 음악회장을 찾은 학생 신민아씨는 안타까움을 털어 놨다.

“사랑하는 나의 형제들이여! 나를 이 차가운 땅에 묻지 말고 그대들 가슴 속에 묻어주오. 그래야만 우리는 완전한 하나가 될 수 있으리. 인간답게 살고 싶었다. 더 이상 우리를 억압하지 말라. 내 이름은 공순이가 아니라 미경이다.”

10년 전 그의 팔뚝에 씌어져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남겨진 글들이 다시금 우리의 마음을 아리게 한다.

<부산 유승숙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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