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코르셋'은 주체 선언

새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힘  

 

 

하늘하늘, 청순가련 이런 말들이 남성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여리여리하고도 오묘한 매력을 가진 남성을 본적도 많은데 우리는 그런 것은 여성적인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매력적인 여성이 되기 위해서는 가늘고 길고 하얀 외형을 지닌, 그런 가운데 새침한 품성을 조금씩 드러내는 좋다고 결정할지도 모르겠다. 최근의 몸 만들기 열풍을 보면 남자는 근육, 여자는 '여리여리'라는 성별화된 구조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이런 흔한 고정관념은 우리 일상에 깊숙히 스며 들어와 있다.  과도한 다이어트가 건강을 해치기도 한다. 높은 구두는 요통을 부르고 지나친 외모집착이 우울증을 부른다. 그렇게 사회에서 요구하는 몸을 만들고 나면 '김치녀'는 어쩔 수 없다는 혐오의 벽에 또 부딪힌다. 그러니 ‘탈코르셋’을 주장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나의 가슴이 너의 성적 욕망의 대상이 아니듯, 나의 몸이나 나의 말과 생각이 모두 당신의 그 어떤 대상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선언이 바로 탈코르셋 선언이 아닌가.

탈코르셋이라는 이 멋진 말은 그러므로 여성에게 수많은 자유, 수많은 연대를 가져올 수 있는 말이다. 그것은 단지 립스틱을 쓰레기통에 넣은 것, 콤팩트를 부수고 하이힐을 내버리는 행위에 멈추지 않는다. 여성을 외모로 규정하는, 그럼으로써 그들을 대상으로 가두어 두려는 그 모든 사슬을 버리는 것이다. '젠더화' 된 사회의 편견을 버림으로써 새롭게 태어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탈코르셋을 하는 목적의 궁극은 스스로 주체가 되는 것이다. 대상화 되는 존재로 구성된 여성의 코르셋을 벗고 새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아, 누가 이런 멋진 생각을 해냈단 말인가.

내가 아는 한 발랄한 젊은이는 지나치게 '코르셋화'되었다 싶을 정도로 풀 메이크업, 짧은 원피스로 눈에 띄었다. 그런데 그 걸음걸이만큼은 저벅저벅이라 무의식적으로 한마디 했다. 그 걸음걸이가 뭐니? 그 젊은이는 툭 터진 웃음을 웃으며 “선생님이 좋아하시는 탈코르셋이예요. 저는 걸음걸이만 탈코르셋했어요”라고 말했다. 다시 생각해 보니 그는 이미 주도적인 삶을 살아가는 여성이었고 옷차림으로 어떤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알게 됐다.

여리여리의 미를 추구한 적은 없지만 여자는 근육 뭐 이런 생각을 해 본적도 없기에 오십년 넘어 관리를 안 한 몸이 여기저기 고장 신호를 냈다. 여성에게 흔한 근골격계 질환이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불러왔다. 운동만이 살길이라는 처방전을 받고 여러 생각을 했다.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를 찍는데 여성배우가 전투씬을 찍으며 “나이든 여배우가 맞는 역은 병원에서 환자로 누워있는 것 뿐인데, 절대 대역을 쓸 수 없다”는 말을 했다는 게 떠올랐다. 한 예능프로에서 복서이자 배우인 이시영이 윗몸 일으키기, 장거리 달리기에서 야구선수 박찬호를 포함, 남녀 불문 압도적 1위를 했던 것도 떠올랐다. 그렇게 관절통이 심한데 괜찮겠냐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복싱학원에 등록을 했다. 잽과 펀치를 하며 날리는 스트레스의 묘미가 압권이다. 미워하는 사람 생각하며 잽을 날려보세요. 힘이 불끈 쥐어지며 오십견의 어깨에 불이 나도록 샌드백을 쳤다. 여자는 근육, 여자는 힘이다. 탈코르셋은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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