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창작’을 말하다] “자기 멋에 취해 사는 여자가 보고 싶었어요!”
[‘여성-창작’을 말하다] “자기 멋에 취해 사는 여자가 보고 싶었어요!”
  • 오혜진 문화연구자
  • 승인 2018.08.21 07:31
  • 수정 2018-08-27 15: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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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력’을 남성의 전유물로 간주해온 신화 앞에서 ‘펜은 곧 페니스인가?’라는 질문을 거듭해야 했던 여성의 역사는 길다. ‘왜 위대한 여성예술가는 존재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누가, 무엇을 예술이라고 규정하는가’라는 권력에 대한 물음으로 고쳐 써야 한다는 항변도 이미 존재한다. 이 코너에서는 ‘여성-창작-새로움’의 의미망을 확장·갱신하기 위해 도전하는 동시대 젊은 여성창작자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서울시여성가족재단과 여성신문이 공동 기획한 이 인터뷰는 문화연구자 오혜진과 만화평론가 조경숙이 함께 총 10회에 걸쳐 진행한다.

서울시여성가족재단 -여성신문 공동기획

[‘여성-창작’을 말하다] ①

웹툰 <먹는 존재>, <족하>, <홍녀>의 작가 ‘들개이빨’을 만나다

첫 인터뷰이를 웹툰작가 ‘들개이빨’로 정한 건 다분히 사심 때문이다. 회식자리에서 ‘진상’ 짓을 하는 상사의 면상에 물컹한 굴을 던져버리는 웹툰 <먹는 존재>의 히로인 ‘유양’을 본 순간부터 그녀는 내 마음속 가장 사랑스러운 디바였다. 하지만 더욱 흠모했던 건 ‘들개이빨’이라는 양아치 같은 필명을 내세운 채, 하고 싶은 얘기를 호방하게 다 해버리는 작가의 ‘쿨시크한’ 존재방식이었다. 인생은 한결같이 심란한데 이런 만화를 그리면 조금 살 만하냐고, 그래서 ‘훠궈’에는 무슨 재료를 넣어야 제일 맛있는 거냐고 묻고 싶었다. 그래서 만났다. 

 

 2-2 3화 ‘뻥튀기’
<먹는 존재> 2-2 3화 ‘뻥튀기’ ⓒ레진코믹스

‘고학력 백수 비혼 여성’과 ‘허세’ 

오혜진(이하 ‘오’): <먹는 존재>는 ‘음식만화, 성인만화, 여성만화, 페미니즘만화’ 등 다양하게 분류됩니다. 어떤 범주가 가장 편하세요?

들개이빨(이하 ‘개’): 남들의 규정은 제가 신경 쓸 일이 아닌 것 같아요. 다 일정 정도의 진실을 가지고 있으니, 전 그냥 자연현상처럼 바라볼 뿐이에요.

오: 많은 독자들이 ‘특별히 예쁘거나 착하지 않은, 할 말 다 하고 먹을 거 다 먹는 고학력 비혼 여성 백수’ ‘유양’ 캐릭터에 열광했죠. ‘평범성’을 내세운 최근 여성서사의 주인공들을 떠올려보면, ‘최고학벌’이라는 ‘유양’의 스펙은 꽤 이례적입니다.

개: 한국사회가 각별히 얄미워하고 괴롭히기 좋아하는 집단이 ‘고학력 여성’인 것 같아요. ‘비혼’에 ‘백수’라면 더 완벽하죠. 이렇게 난관이 많은 캐릭터는 서사적으로 굉장히 가치 있기 때문에 주인공으로 택하지 않을 수 없어요. 특히 ‘유양’의 ‘허세’는 중요한 키워드에요. 저는 자신의 지적 능력으로 세상을 뒤집을 수 있다고 자부하다가 찌그러지는 여자들을 많이 봤거든요? 그런데 한국에는 놀라울 정도로 그런 여자캐릭터가 없어요. 저는 평범성을 추구하는 여자캐릭터가 한국의 ‘욕먹기 싫어하는 정서’를 반영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전 그게 재미없어요. 저는 자기 멋에 취해 사는 여자가 보고 싶었어요.

오: 똑똑한 여자를 위협적으로 여기는 한국사회에서 ‘허세’는 지적인 여성을 안전하게 재현하기 위한 전략일 수도 있겠네요. 이 작품에서 또 인상 깊었던 건 유양의 성장환경이었어요. ‘유양’의 엄마는 ‘유양’이 장차 문화부장관이 될 거라고 믿잖아요. 위대한 작가를 꿈꾸는 ‘고학력 비혼 백수’인 ‘유양’은 엄마의 큰 기대를 받으며 자란 맏딸이기도 하죠.

개: 제가 그렇게 컸어요. 저는 ‘아들에게만 준다는’ 닭다리 다 먹고 자랐어요. 저희 엄마는 제 외모에 대한 평가도 하신 적이 없어요. 제게 씌워진 굴레들을 최대한 벗겨내고 싶어 하셨어요. 다만, ‘능력이 없으면 사회에서 도태되는 한심한 인간이 된다’는 걸 강조하셨어요. 그래서 저는 ‘능력 없음’에 대한 공포가 컸어요.

 

웹툰
웹툰 <먹는 존재>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먹는 ‘여성’ 존재의 이야기

오: <먹는 존재>의 인물들은 요리배틀을 하지도 않고, 맛집 정보나 레시피를 전달하는 데에도 집중하지 않죠. ‘유양’에게 ‘음식’ 혹은 ‘먹는 행위’는 어떤 의미일까요.

개: 요리배틀을 하거나 비법을 전수하려면 음식그림을 정말 잘 그려야 해요. 그런 음식만화는 이미 많죠. 저는 다른 걸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를테면, 음식이 주는 행복은 이런 거죠. 속 시끄러운 일이 있어도 그냥 방문 닫고 들어가 음식을 먹으면 평화가 시작되잖아요. 먹을 동안은 ‘떠들 입’이 없으니 말을 안 해도 되고요. 내가 먹은 것은 곧 나의 일부가 되니, 음식을 먹는 일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쾌락 중 꽤 싼 편이죠.

오: <고독한 미식가>, <스트리트 푸드파이터> 등을 보면, 혼자 배낭 하나 메고 세계를 유랑하며 미식을 즐기는 건 중년 남성의 로망 같아요. ‘돈키호테’의 미식 버전이랄까? 처자식 떼놓고 맨몸을 자원 삼아, 자신의 교양과 취향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시공간을 만들어내는 것, 그리고 이를 자신의 원초적 남성성・야생성이 회복되는 순간으로 상상하는 것. 이를 위해서는 당연히 돈과 시간이 필요하고, 무엇보다 ‘안전’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하죠. 남편과 자식을 떼놓고 혼자, 순전히 자신의 쾌락을 위해 맛기행을 떠나 안전 걱정 없이 낯설고 후줄근한 술집에서 술 마시는 여자가 얼마나 있을까요.

개: 성적인 뉘앙스가 있는 육체는 언제나 위협 당할 가능성에 놓이는 것 같아요. 물론 ‘혼자 음식을 즐기는 여자’에 대한 만화가 일본에 없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젊은 여성이 음식을 먹는 순간의 쾌락을 과장해서 묘사하는, 일종의 포르노그래피 문법을 차용한 경우가 많죠. 중년 여성이 이곳저곳을 떠돌며 음식에 대한 시답잖은 지식이나 개똥철학을 읊는 만화는 별로 본 적이 없네요.

“브즈즈즈…”, 들개이빨의 남자들

오: 작가님은 늘 남성을 ‘비인격’의 형상으로 그리시죠. 특히 <먹는 존재>에서 여성에 대한 피해의식에 찌든 남성 ‘박정’의 사회학적 내력에 대해 작가님은 정말 박정할 정도로 무관심해요. 젊은 남성들의 ‘루저 감수성’은 사회과학계의 집중적인 분석대상이기도 했는데 말이죠.

개: 젊은 남자들이 왜 그런 성향을 갖게 됐는지, 그 얘기를 굳이 들어줄 필요가 있을까요? 그들의 내면이 어쨌든 간에,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공격을 통해 자신의 안위를 도모하는 게 그들의 생존방식이라면, 그걸 설명하기 위해 지면을 할애할 필요가 있을까 싶어요.

오: 또 다른 작품 <족하>를 보면, 모든 남성인물들이 ‘벌레’로 나와요. 이들의 대사는 “브즈즈즈” 같은 의성어로 처리되고요. 매우 노골적인 설정입니다만.

개: 육아 문제에 대해, 남자들이 마치 자신은 육아 당사자가 아닌 것처럼 한마디씩 던지는 말들을 들으면 굉장히 분통 터지지 않나요? 남자들의 그런 말들을 그대로 형상화하기 싫었어요. 그래서 다 벌레소리로 치환했죠. 벌레로 표현되는 것도 나름 귀엽지 않나요?

 

들개이빨 작가가 그린 자신의 캐릭터 ⓒ들개이빨
들개이빨 작가가 그린 자신의 캐릭터 ⓒ들개이빨

‘PC’? 들개이빨의 ‘올바름’

오: <족하>의 주인공 ‘은남’은 <먹는 존재>의 ‘유양’처럼 자녀 없는 비혼 여성이지만, 서사의 초점은 다른 데 있어요. 올케가 경험하는 출산과 양육의 세계가 핵심이죠.

개: 육아를 할 때, 소위 ‘pc함’(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으로 무장한 여자들이 부딪히는 난관이 있죠. 사회적 고정관념에 구애받지 않고 자율적 양육을 실천하겠다고 결심하지만, 막상 현실이 닥치면 그렇게 되지 않아 절망하잖아요. 여자들의 그런 무력함을 그리고 싶었어요. ‘은남’은 조카 걱정은 많이 하지만, 실제로 조카 양육에 도움 되는 일은 하지 않고 입바른 소리만 하죠. ‘유양’처럼 자기 좋을 대로 사는 인물도 이런 한계를 갖지 않을까 싶었어요. 제가 조카랑 지내면서 그런 회의감을 많이 느꼈거든요.

게다가 <족하>는 저에게 굉장히 미묘한 작품이에요. 가부장 권력에 편승해서 그린 만화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이 작품을 그릴 때, 올케에게 양해를 구했어요. 조카와 관련된 실제 이야기들이 작품에 많이 들어갈 거라고요. 올케는 좋다고 했죠. 하지만 그 상황에서 솔직하게 싫다고 말할 올케가 얼마나 있을까요? 이때 시누이-올케 관계에 스민 가부장적 권력관계가 전혀 작동하지 않았을까요? 이런 점을 명심하면서 만화를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죠. 

 

 1화 ‘빨강’
<홍녀> 1화 ‘빨강’ ⓒ저스툰

“그 남자 죽여서 ‘잣’으로 만들면 안돼?”

오: 올 초 연재하신 <홍녀>는 엄마에게 ‘사회적으로 해로운 남자를 죽여서 생활에 유용한 물건으로 재탄생시킬 수 있는 비범한 능력’이 생겼다는 설정부터 파격적인데요.

개: 그동안 여느 창작물들에서 여자들이 숱하게 죽어나간 것에 비하면 ‘이 정도야’ 싶어요. 심지어 <홍녀>의 남자들은 죽을 때 전혀 고통 받지 않고 순식간에 생필품으로 바뀌니까 거의 ‘안락사’에 가깝죠.

오: 최근 ‘여성들이 남성을 혐오한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여성서사를 기획하는 작가들의 고민이 많은 것 같아요.

개: 고민되긴 해요. 그런데 남성창작자들은 그런 고민 별로 안 하는 것 같거든요. 남성창작자들에게 가장 부러운 점은 그거예요. 별 고민 없이 그냥 ‘오락성’을 1순위로 생각해도 되는 거. 반면, 여성창작자들에게는 도덕적 강박이 더 강하게 작용하는 것 같아요. 리스크가 크니까요. 하지만 저도 도덕적 강박을 벗어나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최대한 실험해보고 싶어요. 그런 점에서, 사실 <홍녀>가 더 세게 나갔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남자들이 좀 더 고통스럽게 죽었어야 했지 않나 싶은……. 하하하.

오: 흥미로운 것은, 그 비범한 능력의 소유자가 주인공의 ‘엄마’라는 점이었어요. ‘서사의 중심에 있는, 비범한 능력을 가진 중년여성의 이야기’는 별로 본 적이 없어서 신선했죠.

개: ‘홍녀’는 저희 어머니를 모델로 생각했어요. 어머니는 초인을 방불케 할 정도로 매사에 헌신적인 분이에요. 하지만 그 시대 여성들이 흔히 그렇듯, 능력에 비해 과소평가됐죠. 이렇게 성실하고 선량하고 유능한데도 자신의 능력을 평가절하하는 습관이 몸에 밴 사람한테 막강한 힘이 생긴다면 어떻게 될지 궁금했어요. 그래서 어머니께 여쭤봤죠. “엄마가 잣이 먹고 싶은데 잣이 너무 비싸잖아. 그럼 사회적으로 해로운 남자를 죽여서 잣으로 만들어버리면 안 돼?”라고. 어머니는 “잣이고 뭐고 그런 건 생각하고 싶지 않다”라고 하셨어요. 반면, 옆에 계시던 아빠는 자신에게 그런 능력이 생긴다면 어떻게 해로운 존재들을 죽일 것인지 신나게 말씀하시더라고요.

 

 1-1 2화 ‘훠궈’
<먹는 존재> 1-1 2화 ‘훠궈’ ⓒ레진코믹스

할 말은 많지만 여기까지. 차기작은 성소수자 문제를 다룬 작품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먹는 존재>에는 게이로 추정되는 인물 ‘삼각두’가 등장하고, ‘유양’은 ‘삼각두’가 유일하게 커밍아웃할 수 있는 가장 편한 친구, 앨라이였다. “인간을 혐오하기란 얼마나 쉬운 일인가. 하지만 쉬운 건 결코 위대할 리 없지”라는 명대사를 쓰는 작가이기에, 그녀의 차기작을 기꺼이 기다리기로 한다.

덧. ‘들개이빨’ 작가가 가장 좋아한다는 음식 ‘훠궈’에 꼭 넣는 재료는 포두부, 양고기, 팽이버섯, 중국당면.

* 들개이빨 만화가. <들개의 지하철방랑기>, <먹는 존재>, <족하>, <홍녀>를 연재했고, 현재 <한겨레신문>에 <불암친구>를 연재 중이다. 

 

 



오혜진 문화연구자.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공저), 『그런 남자는 없다』(공저), 『퇴행의 시대와 ‘K문학/비평’의 종말』 등의 책과 평론을 썼다. <한겨레신문>에 칼럼을 연재했고, <문화/과학>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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