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력을 위력이라 부르지 못한 

홍길동 재판 

 

 

수행 비서를 성폭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 사건은 지난 3월 비서 김지은씨가 한 방송에 출연해 작년 7월부터 올 2월까지 안 전 지사부터 수차례 성폭행과 성추행을 당했다고 밝히면서 시작됐다. 재판부는 “김씨의 말을 그대로 믿기 어렵다”며 “안 전 지사가 자신의 정치적 지위에 기초한 위력을 남용해 김씨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억압했다고 볼 증거가 부족하다”며 무죄 판결 이유를 밝혔다. 한마디로 “업무상 위력이 아니라 합의에 의한 관계였다”는 안 전 지사의 손을 들어 준 것이다. 사건 당시 김씨가 보인 여러 언행은 성폭행 피해자의 행동이라고 보기 어렵고, 현행 법이 정의한 성폭행과는 무관하다는 것이 재판부의 판단이었다. 가령, 오피스텔에서 성적 행위가 이뤄질 때, 이에 대한 거부 의사를 밝히거나 오피스텔 문을 열고 나가는 등 최소한의 회피와 저항을 하지 않는 점이 의심스럽다고 했다. 또한, 현행 법은 폭행·협박 있어야 강간죄가 성립되는데 이런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 형법 297조는 강간죄 성립 기준으로 ‘폭행 또는 협박’을 규정하고 있다. ‘노’라고 거부 의사를 밝혔더라도 폭행이나 협박이 없었다면 강간죄로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피해자 입장 배제 

이 사건은 올해 초부터 불거진 #미투(Metoo, 나도 고발한다)와 관련해 기소된 첫 사건이라 국민의 관심이 높았다. 하지만 법원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판결을 내렸다. 무엇보다 ‘위력은 있는데 위력 행사는 없었다’는 재판부의 판결은 황당하고 상호 모순적이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유력 정치인이고 차기 유력 대권주자로 거론되며, 도지사로서 별정직 공무원인 피해자의 임면권을 가진 것을 보면 위력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피해자 심리 상태가 어땠는지를 떠나 피고인이 적어도 어떤 위력을 행사했다거나 하는 정황은 없다”며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안 전 지사가 위력을 행사했는지 관한 사실상의 유일한 증거는 피해자로 지목된 김씨의 진술이다. 김씨는 “수행 비서로써 아무것도 거절할 수 없었고, 내가 원해서 했던 (성)관계가 아니었다”고 일관되게 진술했다. 그런데 재판부는 피해자의 이런 진술을 너무 쉽게 배척한 채 ”안 전지사 아내의 말이 더 믿을 만하다”고 직시한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성폭력 피해자로써 받았을 충격, 수치심 등으로 설혹 김씨의 진술에 허점이 있더라도 이것이 무죄 판단의 결정적 근거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크다.

재판부는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 보라”는 형사사법의 기본 원칙에 따라 무죄를 판결한 것 같다. 그러나 “저항이 어려운 폭행이나 협박이 없는 경우에도 권력이나 지위를 이용한 성폭력 피해를 인정한 대법원 판례의 흐름을 역행한 것”이다. 최근 대법원에서는 피해자의 ‘성인지 감수성’을 고려하라는, 즉 피해자 쪽에 서서 판단하라고 지시했다. 이번 판결에 대해 일부 법조계 인사는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만큼 범죄가 입증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위력을 위력이라고 부르지 못하다는 점에서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 재판’과도 같다. 정치권에서는 이번 판결을 두고 ”술을 먹고 운전을 했는데 음주 운전은 아니다“는 주장과 뭐가 다르냐는 비판이 쇄도하고 있다. 여하튼 이번 판결로 사실상 ‘미투 운동’에 사형 선고가 내려졌고, 현재 대한민국 여성 성범죄엔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는 없다는 것이 확인됐다. ‘성범죄 피해를 고발해도 여성들만 다치는 현실을 알려준 것’이다.

여성을 위한 법은 없다

한마디로 대한민국엔 여성을 위한 법은 없다. 안 전 지사는 무죄 판결 이후 “다시 태어나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 때문에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받은 피해 여성에게는 사과 한마디 남기지 않았다. 안 전 지사는 비록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그에게 내려진 정치적 사망 선고는 변하지 않는다. 법적으로 무죄가 됐다고 정치·도덕적 책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안 전 지사에 대한 1심 무죄 판결이 결코 미투 운동의 위축으로 이어져선 안 된다.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