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변호사의 이러시면 안됩니다 - 21]

 

영화 패터노 포스터 ⓒ다음 영화
영화 패터노 포스터 ⓒ다음 영화

잠시 해외에 머무르고 있다. 출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패터노(Paterno, 2018)>라는 영화를 보았다. 수년 전 미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펜스테이트(Penn State) 대학교 미식축구부 제리 샌더스키 코치의 아동 성폭력 사건에 관한, 정확히는 그 사건의 언저리에 있던 주변인이자 미식축구계에서는 전설적 존재로 칭송받았다는 조 패터노 감독에 관한 이야기였다.

잠깐 머리를 식히러 가는 길에서조차, 하필이면 영화를 골라도 왜 이런 영화를 구태여 찾아서 들여다보고 있는 걸까, 혹시 무더위에 실성을 한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이게 도대체 무슨 종류의 직업병일까 싶어서 헛헛한 웃음이 나기도 했지만, 성폭력 사건에 있어서 주변인들 특히 상급 관리자들의 대응에서 나타나는 수많은 문제점들이 비단 우리만의 것은 아니었구나 하는 무거운 마음에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잘 만든 영화다. 성희롱·성폭력 문제를 고민하는 이들이라면 시간을 내어 한 번쯤 감상해 볼 것을 권한다.

영화 속의 패터노 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명예로운 이름을 남기고 싶었는데 일이 이렇게까지 틀어져버리게 되었노라고. 나는 이제 다 끝나 버리고 말았다고. 그리고 영화의 막바지 무렵, 보는 이들을 한 번 더 충격으로 몰아넣는 또 하나의 장면이 나온다. 가히 압권이라 할 만했지만 마지막 장면이 무슨 내용이었는지를 여기서 다 말해버린다면 필자가 스포일러가 되어 버릴 터, 약간의 궁금증을 남겨두기 위해서 여기서는 이 정도까지만 해 두자.

‘우리 기관은 성희롱·성폭력 문제와는 전연 무관합니다. 그런 일은 지금까지 단 한 건도 접수되었던 바가 없었어요.’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다. 틀린 말은 아닐 수 있다. ‘접수’된 적이 없었을 수는 있지 않겠나. 하지만 성희롱·성폭력 사안이 정말로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없을, 그런 무결한 기관이나 집단이 세상에 있을 수 있을까? 진짜로?

예방교육 강의에서 빠뜨리지 않고 강조하는 내용이 있다. 진실로 중요한 것은 성희롱·성폭력 사건 진정이나 신고, 고충상담 등이 접수된 바 없다는 무결점의 외면적 성과에 있지 않다고.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은 성희롱·성폭력 사건이 발생하였다는 그 사실이 아니라고. 오히려 사건이 발생하였음에도 피해자가 홀로 남모르게 쓰디쓴 눈물을 삼켜야 했거나, 또는 문제가 드러났음에도 그 처리와 해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피해자의 마음에 앙금과 분노가 그대로 남게 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수치스럽게 생각해야 마땅한 것이라고.

사람은 완전하지 않다.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고, 또는 실수를 넘어서는 심각한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사는 세상에서는 내가 아무리 최선의 주의를 기울이며 언행에 유의하더라도 내가 아닌 또 다른 누군가가 때때로 잘못을 범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잘못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잘못이 있었음에도 시의적절한 교정과 개입이 없었다는 것을 탓해야 한다. 가해자가 아니라 그 주변에 있었던 관리자에 대해서라면 특히 더 그러하다. 아무리 관리자라 한들 그 옆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과 행동을 어찌 100% 통제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성희롱·성폭력 없는 완전무결한 인간 집단이란 실현불가능한 망상에 가깝다.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을 가능할 것이라 만연히 믿어버리는 것이야말로 무책임의 극치에 이르는 지름길일 수 있다.

티끌만한 흠조차 없는 심미적 완전무결성에 대한 강박은 그래서 위험하다. 역사를 돌이켜 살피건대, 가장 완벽한 심미성을 추구했던 것은 건강한 민주주의가 아니라 음험한 전체주의 또는 군국주의였다. 무결점의 아리안 국가를 꿈꾸었던 세상은 끔찍한 인종말살의 굴뚝 연기와 기괴한 우생학적 강제불임 수술장의 차가운 조명으로 귀결되었을 따름이다. 역설적으로, 겉보기에 있어서만큼은 가장 웅장하고 그럴 듯 해보이며 심지어 초월적이리만치 아름다웠던 것은 1930년대 나치시대 베를린의 도시 풍광 아니었을까?

사건과 사고는 언제든 어디서든 터져 나올 수 있다. 아름다워 보이지는 않지만, 어쩌면 그게 우리네 불완전한 인간들의 불가피한 숙명일 것이다. 단 하나의 성폭력 사건도 ‘접수’되지 않았다는 외적 성과는 하나의 사건조차 수면 위로 제대로 드러날 수 없게 하는 분위기의 산물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있었던 것을 마치 없었다는 듯 고이 숨겨 버리려는 시도, 무결점의 외관에 대한 강박을 표현하는 다른 말은 바로 ‘사건의 은폐’다. 누군가는 그게 명예를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할는지 모르나, 그건 정말로 그릇된 단견일 뿐이다.

명예로운 이름이란 피해자들의 절절한 호소를 외면하는 것으로부터 나올 수 없다. 누군가의 눈물을 못 본 체함으로써, 누군가의 목소리를 무시해버림으로써 번지르르하게 포장한 외관은 명예로울 수 없다. 참된 명예란 사건이 발생했을 때에 그에 용기 있게 대면하여 필요하고 적절한 도움의 손길을 즉시 내미는 고귀한 노력으로부터만 나올 수 있다.

그렇기에 무결성에 대한 강박은 이미 무결할 수 없다. 영화 <패터노>의 감독도 이 점을 꾸짖는 듯하다. 왜 처음에, 더 이상의 피해를 조기에 막을 수 있었던 그 첫 단계에 피해자의 목소리를 흘려버렸던 거냐고. 일이 이렇게 틀어져버린 것은 다른 누군가의 책임이었던 것이 아니라, 사실은 당신 스스로의 선택이었노라고. 분명히 밝히건대, 그건 결코 명예로울 수 있었던 길이 아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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