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28일 서울 마포구 상수동 제비다방 회의실에서 ‘누구나 비건 파티’가 열렸다. ⓒ이세아 기자
지난 7월 28일 서울 마포구 상수동 제비다방 회의실에서 ‘누구나 비건 파티’가 열렸다. ⓒ이세아 기자

채식주의가 ‘별종’ 취급받던 시대는 저물고 있다. 한국에서도 건강이나 윤리적 가치를 위해 채식주의를 선언하는 이들이 늘었다. 어떻게 먹느냐를 넘어 소비와 생활 전반의 변화를 꾀하는 ‘비거니즘’도 확산하고 있다. 동물권과 환경, 윤리적 소비에 대한 관심이 늘면서 생긴 변화다.

 

매콤하고 달짝지근한 국물에 감자, 양파 등을 넣고 자박하게 끓인 닭요리를 마다할 한국인이 있을까. 여기서 고기를 뺀다면? 닭볶음탕 매니아인 기자가 처음으로 ‘닭 없는 닭볶음탕’을 먹어 봤다. 보글보글 끓는 솥엔 닭고기 대신 콩단백질을 뭉쳐서 고기처럼 만든 콩고기가 들었다. ‘콩볶음탕’ 맛은 놀랍게도 닭볶음탕과 비슷했다. 고기와 식감이 비슷한 콩고기, 감자, 양파, 당근을 넣고 끓여 담백하고도 매콤달콤한 국물 맛에 금세 한 그릇을 비웠다.

 

지난 7월 28일 서울 마포구 상수동 제비다방 회의실에서 ‘누구나 비건 파티’가 열렸다. ⓒ이세아 기자
지난 7월 28일 서울 마포구 상수동 제비다방 회의실에서 ‘누구나 비건 파티’가 열렸다. ⓒ이세아 기자

디저트는 뭘로 할까. 햇매실로 만든 잼을 올려 구운 쿠키, 바나나 브레드, 땅콩버터 쿠키.... 고민하다 딸기 파운드케익을 주문했다. 부드럽고 촉촉한 초콜렛 케익 사이에 두유와 딸기로 만든 크림을 바른 디저트다. 한 입 베어무니 초콜렛과 딸기의 달콤하고 상큼한 맛이 입 안에 번졌다. 평범한 파운드케익처럼 생겼지만 계란, 우유, 버터, 밀가루 없이 만들었다.

 

지난 7월 28일 서울 마포구 상수동 제비다방 회의실에서 ‘누구나 비건 파티’가 열렸다. ⓒ이세아 기자
지난 7월 28일 서울 마포구 상수동 제비다방 회의실에서 ‘누구나 비건 파티’가 열렸다. ⓒ이세아 기자

평소 쉽게 맛보기 어려운 비건 음식을 만나고, 비거니즘에 관심 있는 이들이 어울리는 장 ‘누구나 비건 파티’가 지난달 28일 서울 마포구 상수동 제비다방 회의실에서 열렸다. 비건이란 동물성 제품을 섭취하거나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참가자 대부분은 젊은 여성이었다. 아이와 함께 온 중년 여성, 외국인 남성들도 보였다.

참가자들은 다양한 비건 요리를 맛보고, 동물과 환경에 관한 책을 읽고, 미국의 동물보호운동가 게리 유로프스키가 2011년 미 조지아 공대에서 한 강연을 보고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나누는 시간도 가졌다. 파티장 한 쪽엔 동물성 재료를 사용하지 않은 패션 제품, 비거니즘에 관해 쉽게 설명한 ‘비건 101’ 리플렛이 진열됐다.

적어도 비건이나 채식주의 식생활은 한국 사회에서 더는 낯선 삶의 방식이 아니다. 여러 유명인들의 영향이 컸다. 영화감독 임순례(채식), 배우 임수정(비건), 배우 유지태·김효진 부부(육식은 피하되 달걀과 유제품은 먹는 락토-오보 채식), 가수 이효리·이상순 부부와 배우 김효진, 윤진서, 이하늬(생선 이외의 육식을 피하는 페스코 채식) 등이 채식주의 식생활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배우 내털리 포트먼, 가수 아리아나 그란데, 엘리 굴딩, 방송인 엘렌 디제네러스 등 글로벌 스타들도 비건 식생활을 지키기로 유명하다.

그러나 비건은 식생활의 문제만이 아니다. “패션, 생활용품 등 우리의 일상 속에서 동물보호와 윤리적 소비의 가치를 지향하려는 움직임이죠.” ‘누구나 비건 파티’ 주최측인 신하나 ‘낫아워스’ 공동대표가 말했다.

낫아워스(NOT OURS)는 패션 디자인 업계에서 일하던 두 여성이 지난해 가을 런칭한 비건 패션 브랜드다. 페이크 퍼 하프 코트, 스웻셔츠, 새들백, 프린트 티셔츠 등 동물의 가죽이나 털 등을 사용하지 않은 다양한 패션 제품을 선보였다. 신 대표는 “동물 착취 없는 지속가능한 삶, 세련되고 예쁘고 질 좋은 비건 패션은 가능한가 고민하다가 우리가 직접 만들기로 했다”라며 신제품인 페이크 레더 지갑을 보여줬다.

제품의 생산부터 폐기까지, 모든 과정에서 ‘지속가능성’을 추구한다. 비닐백부터 페이크 레더 제품까지 널리 쓰이지만, 재활용이 불가능해 환경에 유해한 플라스틱 PVC 소재는 비동물성 소재여도 쓰지 않는다. 많이 파는 것도 중요하지만, “물건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불필요한 재고를 최소화하기 위해” 크라우드펀딩 등 방식을 최대한 활용해 주문받은 수량만 생산하는 식이다.

동물권·환경 보호·건강 가치 부상하며

전 세계적 주목받는 ‘비건 라이프’

한국에서도 젊은 여성들 중심으로 화제

“소수자·약자 차별에 반대하는 삶의 방식”

지금 비거니즘은 전 세계적인 트렌드다. 전문가들은 ‘동물권, 환경 보호, 건강’이 중요한 가치로 떠오르면서 이를 지키기 위한 ‘비건 라이프’가 주목받고 있다고 설명한다. 2014년부터 시작된 ‘Veganuary 캠페인’은 한 달간 비건 식생활을 시도하면서 자신의 식생활과 후기, 팁 등을 남들과 공유하는 글로벌 캠페인이다. 올해 영미권 국가를 중심으로 약 17만 명이 참여했다. 프랑스, 독일 서유럽 국가들 가운데에는 미용실에서 비동물성 재료로 만든 염색약 수요가 늘었다고 한다. 세계적인 온라인 패션 유통업체 아소스(ASOS)는 내년부터 실크, 캐시미어, 모헤어, 깃털, 다운, 뼈, 치아, 조개껍질(자개 포함)이 들어간 모든 옷 판매를 금지하겠다고 지난 6월 밝히면서 ‘비건 패션’ 트렌드를 이끌고 있다.

한국에서도 젊은 여성들을 중심으로 비거니즘에 주목하는 이들이 느는 추세다.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에 #나의비거니즘일기 #비거니즘 해시태그를 붙여 한국에서 비건으로 살아가는 법을 공유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생소하고 조금은 불편해도, 비거니즘은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차별에 반대하는 삶의 방식”이라고 이들은 말한다. 이런 면에서 비거니즘의 부상은 최근 페미니즘의 대중화와도 맥락을 같이한다는 견해도 있다.  자신을 “2년차 비건이자 페미니스트”라고 소개한 이주희(22) 씨와 친구 김형미(22·가명) 씨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건강 때문에 비거니즘을 시작했어요. 20대가 되면서 심한 알러지로 고통 받았거든요. 병원 치료로는 효과를 못 봤는데 친구의 권유로 채식을 시도한 지 1년 만에 거의 완치됐어요. 이젠 공장식 축산이 동물들을 어떻게 파괴하고, 내가 입고 바르는 것들이 어떻게 생산되는지 공부하면서 지속가능한 삶을 만들려 해요. 다들 알아도 이야기하기 꺼리는 주제들이죠. 주변인들과 비건 간식을 나누며 자연스레 동물권이나 지속가능한 소비에 관해 이야기하려고요.”(김 씨)

“10~20대는 꾸미는 데 무척 관심이 많은 시기잖아요? 저도 그랬는데요. 동물실험을 안 하는 화장품 브랜드가 거의 없다는 사실, 동물이나 제3세계 여성을 착취하지 않고 만든 패션 제품이 매우 드물다는 걸 알고 충격을 받았어요. 자연스레 착취 없는 삶과 소비가 어떻게 가능할지를 고민하게 됐죠. 요샌 한국에서도 다양한 채식이나 비건 행사들이 거의 매달 각지에서 열려요. 페미니즘의 영향도 있고요. 여성이 겪는 억압과 인간이 자연에 가하는 억압은 닮은 점이 많잖아요. 그러다 보니 저희처럼 문제의식을 갖고 채식이나 비건이 되길 시도하는 사람들, 특히 젊은 여성들이 늘고 있는 듯해요.” (이 씨)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