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미국이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한지 73년이 되는 해다. 그동안 한국인 원폭피해자 7만명 중 2만여명이 살아남았지만 이들은 해방 후 고국에서조차 차별과 경원의 대상이 됐다. 대한적십자사에 등록된 원폭피해자 가운데 여성피해자는 59%에 달한다. 앞으로의 글을 통해 원폭 투하일인 8월 6일을 앞두고 원자폭탄 피해에 대한 일본의 책임을 묻는 투쟁에 앞장선 손귀달, 엄분연, 임복순 등 3명의 원폭피해여성을 호명해 한국여성운동사의 반열에 올려놓고자 한다.

[일본의 책임을 묻는데 앞장 선 원폭피해여성들] ②

한국인 원폭 피해자로는 처음

일본인과 같은 처우 요구

원폭협회 설립 앞장선 엄분연

원폭 후유증으로 가족 잃고

6.25전쟁으로 남편마저 잃어

근현대사 비극 겪었지만

피해자 돕는 등 지원에 헌신

 

엄분연씨 ⓒ아들 장병현씨 제공
엄분연씨 ⓒ아들 장병현씨 제공

손귀달에 이어 1968년 12월에 원폭 피해자인 두 여성, 엄분연(한국원폭피해자협회 부산지부장)과 임복순(서울지역 대표)은 손귀달과는 달리, 교토의 제2차 세계대전 한국인 전몰자위령제에 초청받아 합법적으로 일본에 입국하여 한국원폭피해자협회를 대표해 위령제 참석한 후에 원폭 피해로 인한 아픈 몸의 치료를 요구하며 일본피폭자들에게 발부하는 ‘피폭자건강수첩’ 교부를 신청했다. 이 두 여성은 “우리들은 ‘(일본)국가를 위하여’ 정신대와 근로동원으로 일하다가 피폭 당했으므로 일본 사람과 동일하게 원폭 수첩을 얻고자 한다”고 주장해 일본 사회에 다시 파문을 일으켰다. 일제 강점기에 내선일체를 구호로 내걸며 조선인을 황국신민화하면서 조선인을 전쟁에 동원했으나 한국원폭피해자를 외면하는 일본에게, 이 두 여성은 한국인 원폭피해자로서 처음으로 일본인 피해자와 동일한 처우를 공개적으로 요구했던 것이다.

엄분연은 합천 출신으로 할아버지가 3.1운동에 가담했고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해지자, “호랑이 굴로 들어가 싸우자”고 해서 일본으로 건너갔고, 외아들이었던 아버지도 자신과 어머니를 두고 일본으로 갔다. 엄분연은 합천군 묘산면에서 1928년에 태어났으나 항일가족의 딸이라고 출생신고를 바로 할 수 없어 1년이 늦은 1929년생으로 호적에 기재되었는데, 돌을 지나면서 아버지를 찾아 일본으로 어머니와 함께 갔다. 일본과 싸우기 위해 일본으로 갔으나 할아버지는 일본에 간지 얼마 되지 않아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생계 유지를 위해 건설 일에 뛰어들어야했다. 그러나 당시 대부분의 한국인들과는 달리 아버지는 외동딸인 엄분연에게 학교 교육을 시켰고, 틈틈이 한글교육을 시켜 글자를 쓰고 읽을 수 있고 말할 수 있게 교육시켰다. 또한 아버지는 어렵게 사는 조선인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면서 엄분연에게도 동포의 실상을 보여주었다. 아버지는 비록 일본에서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지는 못했으나 동포들을 도우며, 딸이 한국인으로 자부심과 동포의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 사람으로 성장하도록 격려했다.

주물공장서 일하다 피폭

엄분연은 히로시마의 야스다고녀(여고) 4학년 때 일본 전쟁수행을 위해 학도보국대로 동원되었는데, 원자폭탄이 투하되던 당일 날에는 미시노혼마찌 4가에 있던 비행기 엔진 제조 주물공장에서 일하고 있다가 피폭되어 전신에 화상을 입었다. 오른쪽 팔꿈치와 양쪽 정강이에 깊은 흉터를 남기고 복숭아뼈가 없어 제대로 못 걸어 지팡이를 짚어야할 만큼 크게 다쳤다. 후에는 어지럼증이 자주 일어나고 온몸에 홍진과 같은 반점이 생기는 증상으로 괴로움을 당해야했다. 아버지는 귀가 떨어져버린 채, 엄분연을 찾으러 시내를 돌아다니다 “독가스(방사선)를 많이 마셨고”, 어머니도 복숭아뼈에 유리가 박히는 상처를 입는 등 원자폭탄 투하로 하루아침에 전 가족이 병들었다. 온몸이 다쳐 고통 받고 있는 엄분연이 “살아 있는 동안에 조국 땅 밟아서 조상님들도 뵙고 또 독립을 찾았으니까 조국으로 가야한다”는 부모와 함께 귀국했다. 아버지의 재산이 있었던 밀양으로 귀향했는데 얼마 후의 토지개혁으로 많았던 농토는 소작인의 몫이 되었다. 엄분연은 격변의 시대에 태어나면서부터 탄압의 대상이 되었고, 고향땅에서 살 수 없어 떠나야했고, 가족과 더 나아가 조선을 강압하던 일제의 전쟁 수행에 희생양이 되어 아픈 몸을 이끌고 고향에 돌아왔으나, 있던 재산마저 새로운 시대의 개혁으로 없어지고 말았다. 엄분연은 원폭 후유증으로 다리를 절어 절름발이라고 놀림의 대상으로 전락했는데, “우리 동네에서 제가 설움이 많았어요. 불구자라고 놀리고 절름발이라고 놀리니까요”라고 회고했다. 근현대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픔을 온 몸으로 겪어야했다.

귀국 후 결혼했는데, 남편은 북해도 제국대학을 졸업했고, 대학 재학 중 “독립사상을 가지고 학생운동을 많이 했던 사람”으로, 엄분연이 “양반 집안에 교육 많이 받고 교양 있다고 해서 불구라도 괜찮다”고 하여 목발을 짚고 결혼식을 했다. 그런데 결혼하고 3년 만에 6.25전쟁이 발발하자 남편은 자원해서 참전했다가 전사하여, 아들이 돌이 되기 전에 전사 통지서가 날아왔다. 그녀의 비극은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곧 이어 아버지는 위암과 후두암으로, 어머니는 위암으로 사망했다. 부모는 원폭 피해자로 불구가 되었으나 가족이 돌볼 수 없는 남자아이 둘을 입양해서 돌보았는데, 그 남동생 중 한 명은 10대에 심장판막증으로, 한 명은 결혼했으나 젊은 나이에 대장암으로 사망했다. 엄분연은 원자폭탄 투하의 후유증으로 신음하던 가족의 죽음을 차례로 겪었고, 또 6.25전쟁으로 남편마저 잃어 젊은 나이에 아들과 둘이 남겨졌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의 비극 그 어느 것도 엄분연을 비껴가지 않았다.

 

히로시마시가 발행한 신체장애자수첩 ⓒ아들 장병현씨 제공
히로시마시가 발행한 신체장애자수첩 ⓒ아들 장병현씨 제공

1967년 부산서 협회 창설 나서

그러나 엄분연은 겪어야했던 비극에 함몰되지 않았다. 일본의 원폭피해자가 일본 정부로부터 치료와 보상을 받게 된 ‘원폭특별조치법’에서 한국인피폭자의 존재는 전혀 인정받지 못하였고, 한일회담에서도 원폭피해자에 대한 보상이 논의 조차되지 않자, 한국의 원폭피해자들이 스스로 앞으로 나서기 시작했는데, 엄분연은 1966년부터 “안되겠다 싶어서 우리가 원폭협회를 만들자”고 그 선두에 섰다. 부산 지역을 중심으로 일본에서 한국인 거주 지역에 모여 살았던 친인척들을 설득하고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그 때는 원폭피해자들 중에 심한 사람을 “나병환자다 폐병환자다 그런 소리를 하니까 숨어서 있을 때라 산 너머서도 찾아”다녔고, “자갈치 시장 같은데 벽보를 붙여서 원폭피해자는 신청해라 하는 광고”를 했다. 마침내 1967년 ‘한국원폭피해자구호협회’(한국원폭피해자협회 전신)를 부산에서 발기했다. 엄분연은 부산지부 결성을 주도했고, 부산지부장을 맡아서 조직을 만들고 모임을 이끌었다. 엄분연은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지만 집을 팔아서 까지 협회 일에 헌신했다.

당시 유일한 여성 지부장이었던 엄분연은 “그때 남자들이 저를 미쳤다고 하고 그랬어요. 그리고 보상 받아낸다니까 아주 그걸 받아내면 손에 장을 지진다고 하고 그랬어요”라고 증언을 남겼는데, 남자들의 외면 속에 주로 여성들이 모여서 부산지부를 이끌어갔다. 엄분연은 전화교환수로 아픈 몸을 이끌며 일을 하다가, 은퇴 후 원폭피해자 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1960년대 초 염광모자원 원장으로 재직한 적이 있는데 “미8군이나 미국 선교회나 교회 같은데서 구호품이 많이 나왔어요. 그러니까 그런 것을 피폭자에게도 나눠주니까 그런 혜택을 받기 위해 들어오는 사람도 있었고, 또 비자가 나오는 데에도 아무래도 조금 도움이 되니까 그런 혜택을 받기 위해서 (원폭피해자협회에) 오는 사람도 있었”다.

한국정부는 원폭피해자의 고통을 외면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의 활동을 뒷받침하기는커녕 중앙정보부를 동원해 일본의 조총련과의 연계를 의심하면서 감시했다. 그리고 이러한 압박은 원폭피해자들의 자기검열을 강요했고 따라서 원폭피해자들은 침묵했고, 치료와 보상을 요구하는 행동에도 제약이 되었다. 그러나 엄분연은 남편이 6.25전사자로 이러한 정부의 감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엄분연은

68년에 처음 일본 가서 한국 피폭자 보상하라고 연설을 하니까, 일본정부에서는 65년에 한일회담으로 유상무상으로 벌써 보상이 끝났다 그러고 없애버리려고 하더라고, 기자들도 5억(엔)으로 끝났는데, 왜 이제야 그러냐고 묻고, 그래서 내가 그랬지 그럼 그 보상 내역 중에 징병은 얼마, 징용은 얼마, 원폭은 얼마 그렇게 내역이 나와 있느냐 하니까 아니라 이거야. 그래서 그러면 우리 거를 내 놓아라 그렇게 이야기했지, 그리고 우리가 전쟁 시에 일본 국민으로 징용, 징병되지 않았냐 그러니 보상을 하라 했어. 그러니까 그건 미국에서 원폭을 떨어뜨렸으니까 거기다 요구를 하라고 그래. 그래서 우리는 그 전쟁에 가담시킨 것은 일본이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책임을 져라 그랬어. 그리고 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때 미국한테 보상책임 묻지 않기로 너희가 왜 했냐 그랬잖아요.

라고 말했다. 엄분연은 또한 “일본이 우리가 일본 사람이 아니라고 우리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때, 그럼 왜 우리를 너희가 전쟁에 가담시켰냐. 우리도 전범이다 하면서 대들”기도 했다고 진술했다. 엄분연은 임복순과 함께 히로시마 원자폭탄 피해전문병원에서 2개월 반 동안 입원치료를 받았으나, 일본 후생성과 법무성은 일본의 ‘원폭의료법’과 ‘원폭특별조치법’의 효력이 일본국법이 미치는 범위 내에서만 적용한다는 통달 402호에 의해 원폭치료를 지속적으로 받을 수 있는 건강수첩 발부를 거부하여 더 이상 치료를 받지 못하고 강제 퇴원 당했다. 일본 외무성은 “한국정부의 요청이 없으므로 원폭수첩을 내줄 수 없다. 인도적인 견지에서 수첩을 발급해 주면 내정간섭이 된다”고 거부 이유를 밝혔다. 그 많은 조선인을 일본에 강제로 끌고 와서 전쟁과 징용으로 가혹하게 내몰았던 일본이 “인도적인 견지”를 지키고자, 그리고 조선에 와서 온갖 수탈을 감행하던 일본이 “내정간섭”을 하지 않겠다면서 일본의 전쟁 수행에 동원되었다가 원폭피해를 입은 두 여성의 치료를 거부했다.

원폭 피해자 돕는 가교 역할도

그러나 엄분연은 한국으로 귀국한 후에도 일본에 대한 항의와 요구를 지칠 줄 모르고 계속했다. 그 후로도 일본에 다니면서 치료도 받았고, 한국원폭피해자를 돕는 일본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한국원폭피해자를 돕는 가교 역할을 했다. 또한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는 사또 수상에게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 시위하려 서울에 올라갔으나 제대로 시위도 못하고 종로 경찰서에 연행되기도 했는데, 이 시위 사실은 아사히신문에서 크게 보도되었다. 그때 엄분연을 보고 “남자냐 여자냐 그런 소리도 나왔다”고 할 정도였는데, 앞장서서 시위를 주도하는 그의 당당한 모습에 사람들이 놀랐음을 알 수 있다.

엄분연은 부산지부장으로 7년간 일하면서 원폭피해자들이 일본에서 건강수첩을 받는데 증인으로 서주었고, 기독교관련 세미나 참석차 한국에 왔던 일본인 다케나가로를 장기려 박사를 통해 만났고, 피폭자들이 이분의 도움으로 치료를 받도록 적극 주선하는 등 원폭피해자들을 위해 노력해, 초창기 70명도 안되었던 회원을 700여명이 될 정도로 부산 지부를 발전시켰다. 또한 손진두가 일본에서 소송을 할 때에도 중앙정보부의 조사를 받으면서도 병원진단서 등 필요한 서류를 보내주고 탄원서를 써서 보내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격변의 시기에 부모와 동생들을 원폭피해로 잃어야했고 6.25에 남편이 전사하는 등 근현대 한국사회의 온갖 비극을 겪어야했고, 자신도 원폭후유증으로 질병에 시달려야해야 했으나 엄분연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독립운동가였던 할아버지와, 민족의식을 지키고 어려운 사람을 적극 도와주고자 했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엄분연은 원폭피해자들을 도우면서 이들을 위해 앞장서서 일본에게 요구했다. 엄분연이 일본으로 건너가 당당하게 일본 정부가 한국원폭피해자들의 치료와 지원을 제공할 의무가 있다고 누구보다 앞서서 주장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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