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 진보정치의 큰 별을 잃었다. 평생 노동 운동과 진보 운동을 펼쳤고 누구보다 깨끗하고 정의로운 정치를 해왔던 노회찬 정의당 의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기 때문이다. 고인은 굽힐 줄 모르는 소신, 자신의 말과 행동에 무한 책임을 지는 자세, 해학과 비유가 곁들인 촌철살인(寸鐵殺人)의 언어로 진보 정치를 대중 속으로 깊이 스며들게 했다. 삼성으로부터 ‘떡값’을 받은 검사 7명 이름이 들어있는 ‘삼성 X 파일’을 공개했다가 국회의원직을 상실한 건 노회찬식 소신 정치의 본질을 보여 주기에 충분했다.

 

그가 대중에게 강렬하게 각인된 것은 2004년 17대 총선을 앞두고 한 방송 토론회에서 “50년 동안 같은 판에다 삼겹살 구워먹으면 고기가 시꺼매집니다. 판을 갈 때가 왔습니다”라고 말한 것이었다. 그의 대중 친화적 말과 행보가 당시 민주노동당이 비례대표 득표율 13%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우는데 크게 기여했다. 최근 각종 여론조사에서 정의당(6석) 지지율이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112석)과 거의 비슷한 수준까지 확산되는 등 이제 막 진보정치가 빛을 발하려는 시점에 그가 우리 곁을 떠난 것은 참으로 비통한 일이다. 그는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모든 허물은 제 탓이니 저를 벌하여 주시고, 정의당은 계속 아껴주시길 당부드립니다”라는 유서를 남겼다. 죽음을 앞두고도 그가 평생을 통해 이룩하고자 했던 진보 정치와 진보 정당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지 알 수 있다.

노 전 의원은 1987년 인천 지역 민주노동자 연맹을 창립하면서 본격적인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놀랍게도 노 전 의원이 노동운동을 시작한 시점과 여성운동을 펼치기 위해 여성신문이 창간된 시점이 거의 일치한다. 이는 노동이 당당하고 여성이 차별받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에 우리 사회가 얼마나 척박했었는지를 잘 웅변해준다. 대한민국 최초로 여성주의, 여성의 관점, 성인지적 관점을 반영한 여성신문은 1988년에 창간돼 올해 30주년을 맞이한다. 창간 당시부터 여성신문은 사회 현상을 ‘여성의 눈’으로 재해석하면서 지면을 통해 격조 높은 여성운동을 펼쳤다. 최근에는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페미니즘과 젠더 민주주의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이런 여성신문이 지령 1500호를 맞이했다.

그동안 여성신문은 시대정신이 반영된 기사와 심층 보도, 오피니언 글을 통해 성평등 사회로 가는 디딤돌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가령, 배우 최진실의 사망으로 촉발된 친권자동부활 문제, 아동 성폭력의 극악함을 보여준 조두순 사건 등의 보도는 큰 반응을 일으켰다. 그밖에 미지상(미래의 지도자상) 제정, 젠더 마이크상 수여 등은 우리 사회가 평등 민주주의 국가로 거듭나기 위해 필요한 여성 인재들을 발굴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최근 여성운동은 세 가지 위기에 직면해 있다. 첫째, 전환의 위기다. 그동안 여성계는 여성 인권과 여성의 대표성을 제고를 위한 활발한 운동을 펼쳐 성공을 거뒀다. 가령, 호주제 폐지, 성매매 금지법, 비례대표 여성 50% 할당제 도입 등을 관철시켰다. 그런데 최근 여성계는 변화하는 시대에 맞게 여성운동을 어떻게 전환시킬지에 대한 합의를 도출하지 못하고 있다. 둘째, 연대의 위기다. 특정 젠더 이슈를 둘러싸고 진보 따로 보수 따로 행동하고 있다. 셋째, 성과의 위기다. 미투 운동을 포함해 수많은 젠더 담론들이 제기되고 있지만 용두사미로 흐르면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향후 여성계와 여성신문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 명확해 졌다. ‘내 딸의 더 나은 삶’과 ‘젠더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진보와 보수가 연대해 국민들이 공감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새로운 여성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분노와 절규만으론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 30여년 축적된 진보운동과 여성운동의 소중한 경험을 결합해서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꾸준히 노력해 나간다면 결국엔 뜻을 이룰 수 있다”는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정신으로 ‘성평등 국가’라는 위대한 전환을 이뤄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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