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희 주간의 출사표와 윤석남 화백의 표지화가 비장한 아우라를 뿜어 내던 여성신문 첫 호를 손에 쥔 순간 온몸을 휩싸던 그 전율감이 아직도 몸 어딘가에 남아 있는데 벌써! 1500호란다. ‘기껏해야 6개월’이라던 우려와 조롱이 뒤섞인 주변의 예상을 뒤엎고 세계유일의 여성정론지 여성신문은 지난 30년 동안 단 한 차례의 결호도 없이 매주 꼬박꼬박 세상에 나왔다. 참 장하다.

창간 당시부터 편집위원이란 어정쩡한(?) 직함을 달고 지금까지 여성신문 주변을 맴돌아왔던 나로선 진부하기 짝이 없는 표현이지만 지난 30년이 마치 한 바탕 꿈 같기만 하다. 민주화의 열기로 들끓던 1988년만 해도 주류언론은 여성문제를 일부 여성들의 개인적인 문제로 인식하고 가십란의 흥밋거리 아니면 기껏해야 1단기사로 다루기 일쑤였다. 공정성과 객관성을 추구한다는 그들은 여성의 눈으로 보면 철저하게 남성중심적 언론이었다. 그들은 자신을 대상화하지 말고 주체로 인정해 달라는 여성들의 절실한 요구가 무슨 뜻인지 아예 몰랐거나 알고도 모른 척 해왔다.

여성들은 결국 여성의 목소리는 기존언론이 아니라 여성 스스로의 언론을 통해서만 왜곡없이 전달될 수 있다는 데 뜻을 모았다. 여성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여성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듬어 정의롭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어 나가고자 하는 여성들의 열망을 그 진심 그대로 세상에 전달하는 언론이 절실했다. 그리고 이 뜻에 동참한 많은 여성과 남성이 기꺼이 보탠 국민주로 여성신문사를 세웠다.

여성신문의 30년은 참으로 험난했다. 여성의 경제적 지위를 상징하듯 늘 재정난에 시달렸다. 그러나 편집방향에는 한치의 흔들림이 없었다. 여성신문의 목표는 오직 ‘여성의 더 나은 삶’이었다. 법과 제도에서 여성을 억압하던 모든 차별들은 물론 일상생활과 우리의 의식과 관행 속에 뿌리박힌 크고 작은 차별요소들을 철폐해서 남성과 여성, 아니 지상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자유롭고 조화롭게 살 수 있는 세상, 성평등 사회였다.

창간호의 최대 이슈는 두 남성에 의해 성폭력을 당한 한 여성이 오히려 폭행죄로 유죄판결을 받은 사건이었다. 여성신문은 피해여성의 입장에서 판결의 부당성과 우리 사회의 왜곡된 성문화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짐으로써 그 때까지 사회문제로 떠오르지 않았던 성폭력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최근의 전방위적 미투운동과 그에 따르는 갖가지 후폭풍을 접하면서 나는 지난 30년 동안 여성의 삶이 과연 조금이나마 나아지긴 한 걸까, 그 당시 여성들이 느꼈던 분노가 과연 조금이나마 풀린 것일까, 그 동안 우리가 열심히 싸웠다고 생각했던 것이 한낱 헛발질이 아니었을까 하는 회의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의 목소리를 숨기지 않는 젊은 여성들의 당당한 모습 자체만으로도 여성신문은 앞으로 30년을 나아갈 힘을 얻었다.

솔직히 여성신문의 편집방향에 대해선 독자들뿐만 아니라 편집진 내에서도 의견이 엇갈린 적이 있다. 가장 큰 쟁점은 ‘아무리 여성신문이라는 제호를 달았다 하더라도 모든 기사가 너무 여성 여성 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라는 것이었다. 기존언론이 남성중심적이라고 해서 여성신문이 여성중심적으로만 가면 그것 역시 편파적이 아니냐는 반론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창간당시에 기대했던 것만큼 여성신문이 보다 폭넓은 독자를 확보하지 못하는데 대한 안타까움에서 비롯된 의견이다.

그러나 여성신문은 한 순간도 여성주의를 포기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섣불리 넘겨짚듯 무조건 남성을 배제한 적도 없었다. 여성의 삶이 나아지는 세상은 결국 남성도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닌가. 만약 여성신문이 줄기차게 ‘여성, 여성’하지 않았다면 급변하는 미디어환경 속에서 여성신문은 존재가치를 잃고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30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나 개인으로는 맨땅에 헤딩을 두려워 않던 패기만만한 40대에서 사소한 도전에도 멈칫하는 노년기로 들어섰다. 그러나 여성신문은 나이를 먹되 늙지 않았다. 더 나은 삶을 바라는 여성들의 한숨과 분노와 희망과 열기로 채워진 지면들은 언제나 풋풋하고 싱그러운 에너지를 발산한다. 그 덕에 여성신문을 펼칠 때마다 나의 낡은 심장도 새롭게 뛰기 시작한다. 여성신문의 발간 호수가 한 회 한 회 늘어날수록 요원하게만 보이는 성평등 사회도 필경은 오고야 말 것이라는 희망이 샘솟는다.

나는 안다. 무엇보다도 지독히도 어려운 환경 속에서 한 호 한 호를 기적처럼 만들어낸 그 수많은 동료들, 여성신문을 사랑하고 지켜온 수많은 여성들과 남성들, 그들의 선의와 헌신이 있었기에 여성신문이 오늘까지 버텨 올 수 있었다는 사실을. 그들과 함께 동시대를 걸을 수 있어서 참으로 고맙고 행복하다. 여성신문과 함께 한 30년이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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