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독일, 자매들의 만남

공고한 성차별 구조 앞에서

좌절 않고 여성운동 펼친

한국과 독일 여성활동가들

“내가 이 정도 밖에 안되나”

자괴감 벗고 “너희가 변하라”

외칠 수 있는 자신감 갖길

 

 

얼마 전 한국여성재단이 주관하는 프로그램 진행 차 전국의 여성운동 현장 활동가 12명과 함께 독일 여성운동 및 여성정책 현장을 다녀왔다. 1주일 정도 일정이었는데, 한국 여성운동의 성과와 더불어 국경을 넘어선 여성운동의 공통적 정체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늘 현장에서 젠더폭력 피해여성의 편에서 거의 소진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동분서주하는 우리의 활동가들이 재충전의 시간을 가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가부장적 사회구조와 인간관계에 너무나 익숙해진 일상에서 그냥 지나치기 쉬운 문제를 지적하고 해결을 요구하는 여성운동의 문제제기는 한국에서나 독일에서나 여전히 진행형이었다. 두려워서, 불안해서 때로는 귀찮아서 그냥 지나치는 현실 속 문제에서 여성이 당하는 고통의 구조는 한국이나 독일이나 그다지 차이가 없었다. 독일에서도 여전히 수많은 여성들이 배우자의 폭력에 노출된 삶을 살고 있다. 가정폭력 피해자가 여성피난처로 도망가지 않아도 되고, 오히려 가해자가 집에서 쫓겨나도록 법 개정이 오래 전에 있었다. 그러나 여성쉼터(Frauenhaus)만 있을 뿐 남성쉼터 내지 남성교화소는 없다. 성매매 합법화가 성매매여성의 경제·사회적 지위 향상에 기여하지 못했다. 동유럽과 제3세계 여성이 성매매 현장에 유입되는 현상만 강화됐을 뿐이다. 한국보다는 상황이 낫지만, 연방의회를 비롯해 결정을 할 수 있는 자리는 여전히 남성 지배적이다. 아이를 낳으면 여성은 전일제에서 시간제노동으로 혹은 경력단절로 인생의 경로를 재편해야 한다.

이렇게 공고한 성차별 구조 앞에서, 그러나 독일 여성운동 현장 활동가들은 좌절하지 않고 줄기차게 투쟁해왔다. 독일 뿐 아니라 유럽 여성운동과 연대를 통해 활동의 에너지를 축적해왔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자매들과의 만남이 그들에게 많은 힘을 주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많은 영역에서 독일보다 열악한 상황에 처한 한국의 자매들이 지금 하고 있는 활동에 대한 설명을 듣고 감탄과 존경을 보였다. 독일사회가 갖고 있는 보편적 사회보장제도와 상당한 수준에 도달한 경찰·검찰·법원 등 사법체계의 젠더 감수성이 폭력피해 여성의 상황을 더 이상 악화하지 않도록 작동하는 그 사회적 기제가 한국사회에는 아직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자매들이 지키는 현장의 모습을 더 알고 싶어했다. 짧은 만남의 시간이 아쉬었음을 그들의 표정에서 볼 수 있었다.

국경을 넘어서 보편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가부장제의 억압적 기제 앞에 양팔을 벌리고 막아서 있는 모습을 한국과 독일의 자매들이 서로 확인했다. 국경을 초월해 독일과 한국의 활동가들이 함께 서있는 공간의 존재를 확인하는 순간, 특히 한국의 자매들은 지금까지 자신의 일생을 바친 노력이 외롭거나 헛된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젠더폭력 피해여성과 동행하며 지역사회 여기저기를 누비면서 인내와 능력의 경계선에 도달하기도 했다. 여성운동의 열매로서 성평등 정책 및 제도의 구조화를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영페미들이 보내는 야유를 감내해야 하는 상황도 생겨났다. 나 자신의 역량이 이 정도밖에 되지 않나 하는 자괴감을, 그래서, 갖기도 했다.

그러나 성공과 실패의 반복 속에서 이제는 사회를 향해 “너희가 변하라!”라는 목소리를 높이는 여성운동의 방향 전환을 하고 있는 독일의 자매들을 보면서 많은 용기와 희망을 얻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뭘 잘못했지?”가 아니라 “너희 (가부장 남성들의) 사회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똑똑히 봐라!”고 외칠 수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렇게 우리의 현장 활동가들은 자신을 재충전했다. 이들이 변화시킬 한국사회의 모습을 기대해본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