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젠더폭력...나는 이렇게 살아남았다
두 번의 젠더폭력...나는 이렇게 살아남았다
  • 이세아 기자
  • 승인 2018.07.18 03:15
  • 수정 2018-07-23 09:4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난 12일 여성신문사에서 만난 이회림 형사가 주먹을 뻗어 보이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지난 12일 여성신문사에서 만난 이회림 형사가 주먹을 뻗어 보이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인터뷰] 페미니스트 형사가 된 젠더폭력 생존자 이회림 씨

책 『미친놈들에게 당하지 않고 살아남는 법』 펴내

“여성은 원래 강인한 전사…

몸·마음 일상적으로 단련하면

나를 지킬 힘과 자신감 생겨”

여섯 살, 여름이었다. 언니를 기다리다가 낯선 남성에게 성추행을 당했다. 발버둥쳐 탈출해 집으로 달려왔지만 그 일을 잊을 수도 말할 수도 없었다. 스무살, 대학에서 만난 남자친구에게 폭행당해 경찰에 두 차례나 신고했다. 두 번의 젠더폭력에서 살아남은 이회림(신변 보호를 위해 사용하는 필명) 씨는 영화 유학 계획을 접고 경찰이 됐다. 뜻하지 않은 선택이었지만, “축축하고 시커먼” 기억들에 결연히 맞서면서 찾아낸 자신의 길이다.

2018년 현재, 이 씨는 14년차 형사이자 페미니스트다. 지구대, 형사과 성범죄 수사팀, 경제팀, 광역수사대 등을 거치며 산전수전 다 겪은 그가 최근 책 『미친놈들에게 당하지 않고 살아남는 법』(청림라이프)을 펴냈다. “어떻게 피해자가 아닌 생존자로서 마음의 균형을 찾았는지, 여성이 어떻게 다양한 범죄 현장에서 적극적이고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는지 알려주고 싶어서” 쓴 책이다. 실제 사건을 예로 들며 길거리, 택시, 공중화장실, 택배 수령 등 일상의 공간에서 어떤 범죄가 일어날 수 있는지, 그럴 때 어떻게 나를 방어할 수 있는지, 사전/사후 범죄 예방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을 친절하게 소개한다. 지난 12일 저녁 그를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책 『미친놈들에게 당하지 않고 살아남는 법』을 펴낸 이회림 형사가 지난 12일 여성신문사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책 『미친놈들에게 당하지 않고 살아남는 법』을 펴낸 이회림 형사가 지난 12일 여성신문사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 여성은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거나 누군가를 보호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형사님은 책에서 “여성은 원래 강하다” “용기에는 성별이 없다”고 강조하셨죠.

“원래 공포란 자연스러운 방어기제입니다. 위기 상황에서 남녀 모두 얼어붙어 버리지만, 우리에겐 위험을 감지해 피하는 본능과 내게 위협을 가하는 상대에게 당당히 맞서는 투지도 있어요. 문제는 그걸 불러내는 거죠. 평소 몸의 감각을 잘 단련시켜 두면 큰 도움이 됩니다.”

- 그런 결론을 내리기까지 많은 일들을 겪었다고 털어놓으셨습니다. 

“6살 때 성추행을, 20대 때 2년간 데이트폭력을 당했어요. 데이트폭력 가해자는 저보다 체구가 마른 남성이었어요. 제가 더 힘이 세다고 믿었지만 매번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어서 화가 났어요. 경찰이 된 후 저와 비슷한 피해자들을 만났습니다. 욕도 잘하고 센 여자들이, ‘그땐 왜 바보같이 당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너무 분하고 자존심 상한다’고 울면서 얘기해요. 피해자라는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바로 신고하지도 못하고, 증거를 잘 보관하지도 충격을 극복하지도 못해서 자기한테 불리한 진술을 하고... 그렇게 자기를 싫어하게 되죠. 저도 그랬어요. 경찰 시험을 준비하면서 비로소 제 피해 경험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됐습니다. 나를 지키는 법을 알아야겠다, 위험한 신호를 잘 읽는 감각이 필요하다고 느끼게 됐죠.”

- 책에서 “길을 혼자 걸을 때 주변을 잘 살피면서 다니고, 수상한 사람이 있으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내가 만만찮은 사람’임을 각인시키라”고 하셨어요. 훈련받지 않은 여성들에겐 이것부터가 시작일 듯해요.

“맞아요. 너무 두렵다면 몸을 움직이는 것부터 시작해 보세요. 합기도, 유도, 태권도, 주짓수, 춤, 마라톤, 등반 등등 뭐든 일주일에 사흘 이상 꾸준히 배워 보세요. 한번쯤은 ‘발차기 1300개’처럼 극단적인 신체 활동으로 내 한계를 깨닫고 뛰어넘어 보는 경험을 해봐도 좋아요. 내 몸을 제어하는 법을 배우고, 순발력을 기르다 보면 근육도 자신감도 생기죠.”

- 그런데 왜 여성이, 약자가 범죄 예방법이나 자기방어 기술을 배워야 할까요? 애초에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이 문제인데 공평한 것 같지 않아요.

“꼭 여자라서가 아니라 누구나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을 알았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교통사고를 당할 확률보다 강력범죄 피해자가 될 확률이 더 높거든요. 범죄자들은 자신이 ‘요리’할 수 있는 대상, 주로 여성이나 노약자를 노립니다. 여성이 여성을 해칠 수도 있고요. 남자아이들이 타겟이 되기도 하죠.”

- 반격했다가 가해자를 자극해 상황을 악화시키진 않을까요?

“납치·감금처럼 가해자가 내 생사여탈권을 쥔 경우라면 신중하게 행동해야겠죠. 하지만 택시나 길거리에서 위기 상황이 벌어졌을 때처럼, 도망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 일단 사력을 다해서 뭐든 하는 게 죽음으로부터 멀어지는 길입니다. ‘자기방어’ 하면 상대를 때려눕히는 걸 생각하시는데, 기본적으로는 ‘상대의 빈틈을 파고들어 위기를 모면한다’에 초점을 맞춥니다. 도망치는 거예요. 실제 형사 사건을 봐도 가만히 있지 않고 적극적으로 탈출을 시도한 여성들이 살아남아요. 깨물기, 고환 차기, 발버둥치기도 효과가 커요. 가끔 만취한 여성들이 지구대 파출소에 끌려와 마구 발버둥치는데, 세 명이 달려들어도 제압하기 힘듭니다. ‘난 미쳤다’, ‘이거라도 안 하면 죽는다’ ‘내가 이렇게 당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해보세요. 분노를 에너지로 삼으면 더욱 효과적입니다.”

- 공교육에서는 이런 내용을 충분히 가르치지 않죠. 

“그러니까요! 유치원, 초등학교 체육 시간에 자기방어술을 꼭 가르쳤으면 좋겠어요. 공부만 잘하면 뭐해요? 내가 나를 못 지키는데.... 제가 6세 때 성추행 가해자로부터 탈출할 수 있었던 것도 5세 때부터 한국무용을 배우면서 마음먹은 대로 몸을 움직일 수 있었기 때문이거든요. 제 조카가 이제 6살인데, 만날 때마다 범죄 대처 시뮬레이션을 해요. ‘아저씨가 아이스크림 사준대. 따라갈 거야?’ ‘예쁜 이모가 엄마랑 전화 통화하면서 너보고 잠깐 여기 있으래. 따라갈 거야?’ 이렇게 물어보면서 마음을 무장하도록 하죠. 만약 잡혔다면 ‘너는 어른보다 힘이 없으니까 무조건 깨물어라’라고 가르쳐요.

더 많은 여성들이 ‘내 몸 사용법’을 알고 활용했으면 좋겠어요. 남성들은 어릴 때부터 축구 등 놀이를 통해서 몸을 어떻게 움직이고 단련해야 하는지, 위험할 때 빠르게 대처하는 법을 자연스레 알게 되는데, 여성들은 따로 교육받지 않는 한 그런 기회를 얻기조차 어렵죠. ‘강하고, 운동 잘하고, 자기주장을 펼치고, 모험심 강한’ 여성은 괴짜 취급을 받고요. 미디어에서 여성들에게 ‘여자다움’만을 강요하지 말고, 몸을 쓸 줄 아는 여성이 멋지다고, 아름답다고 꾸준히 이야기하면 이런 고정관념도 깨질 것 같아요.”

 

책 『미친놈들에게 당하지 않고 살아남는 법』은 일상에서 훈련해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자기방어술을 소개한다 ⓒ청림라이프
책 『미친놈들에게 당하지 않고 살아남는 법』은 일상에서 훈련해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자기방어술을 소개한다 ⓒ청림라이프

성범죄 피해자들을 마주할 때마다 자신의 경험이 떠올라 “매번 눈물을 보일 수 없어 앞으로 성범죄 사건을 전담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이 형사는 10년 넘도록 피해자들과 연대하고 곁에서 지지해온 페미니스트 경찰이기도 하다. 그는 “누구나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범죄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며 자책하거나 움츠러들지 말라고 했다. 책 말미에서는 서지현 검사 등이 동참한 성폭력 고발 ‘미투(#MeToo)’ 운동을 언급하며 “피해자가 아닌 생존자로 살아가려면 내가 입은 피해를 용기 내어 말하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저는 성범죄 피해자지만 경찰이 돼 성범죄 전담 수사를 했고, 성범죄 위기 대처법에 관한 책도 썼습니다. 그 과정에서 제게 일어난 일을 수십 번 곱씹었어요. 고문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치유의 과정이었습니다. (...) 이겨낼 수 있어요. 우리 모두는 사실 그렇게 약하지 않거든요. 책, 영화도 보고 사람도 만나고 운동도 해보세요. 밖으로 나가세요. 몸과 마음을 강하게 갈고 닦으세요. 당신의 내면에 숨은 강인한 전사를 꼭 찾아내세요.”

기사가 마음에 드셨나요?

여성신문은 1988년 창간 이후 여성 인권 신장과 성평등 실현을 위해 노력해 온 국내 최초, 세계 유일의 여성 이슈 주간 정론지 입니다.
여성신문은 여성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여성인 '안전, 사회적 지위, 현명한 소비, 건강한 가족'의 영역에서 희망 콘텐츠를 발굴, 전파하고 있습니다.
저희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좋은 기사 후원하기를 해주세요.
여러분의 후원은 여성신문이 앞으로도 이 땅의 여성을 위해 활동 할 수 있도록 합니다.

여성신문 좋은 기사 후원하기


※ 소중한 후원금은 더 좋은 기사를 만드는데 쓰겠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50 (3가 222번지) 골든브릿지빌딩 1층, 9층
  • 대표전화 : 02-318-9300
  • 청소년보호책임자 : 신준철
  • 제호 : (주)여성신문사
  • 사업자등록번호 : 214-81-03304
  • 대표이사 : 김효선
  • 발행·편집인 : 김효선
  • 여성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0 여성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admin@womennews.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