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필화 이화여대 명예교수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장필화 이화여대 명예교수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올해 들어 들불처럼 일어나는 여성들의 집회와 시위를 지켜보며 어느 현자의 말이 생각난다. “세상이 언제 더 나아지나 하면, 사람들이 끔찍하게 돌아가는 이 세상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스스로 변하기로 결심한 때이다.” 이 생각과 동시에 한 시대에 획을 그었던 과거 여성 저항 운동들이 떠오르면서 그 의미가 새롭게 살아난다. 그 중 100년도 훨씬 지난 시절에 영국과 미국 등 서구에서 전개된 여성참정권 운동의 역사성은 되새겨볼 만하다. 초기에는 가장 합법적인 절차와 방법으로 민주주의 정치과정에 참여할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던 여성들이 수십 년간 별 진전이 없자, 보다 충격적 방법으로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점차 합법과 범법의 경계를 넘나들 만큼 그 방법이 과격해지면서 여성참정권 운동은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됐다. 예컨대, 세금이나 벌금 납부를 거부하는 등 시민 불복종 운동뿐 아니라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지 않을 선에서 빈집에 방화하거나 유리창을 깨는 등 과격한 행동까지도 불사해 그 죄로 투옥된 여성들의 숫자가 영국에서만도 1000여 명이 됐다고 한다. 운동의 초기 단계에는 정치적 성향과 이념 차이 때문에 참여하지 않았던 기독교 여성 단체나 사회주의 여성운동 단체, 여성 노동조합 운동단체들까지도 마침내 모두 다 여성참정권 운동에 결집하게 됐다. 이는 마치 한국의 1970년대 중반 대부분의 여성운동 단체가 가족법 개정을 위해 범여성운동을 벌였던 것, 그리고 1990년대 중반에 성폭력 가해자 살해 사건에 휘말린 대학생을 위해 연령과 이념적 성향이 다른 여성단체들이 힘을 합해 연대하고 행동했던 계기들과 유사성을 보인다.

 

1908년 10월 11일 트라팔가 광장에서 연설하는 에멀린 팽크허스트 ⓒ여성신문
1908년 10월 11일 트라팔가 광장에서 연설하는 에멀린 팽크허스트 ⓒ여성신문

1세기 전부터 서구 여성들이 투쟁한 결과, 우리의 제헌 입법에는 갈등 상황 없이 여성의 투표권과 피선거권이 포함될 수 있었고 이제는 그 누구도 여성의 투표권과 피선거권이 당연한 권리임을 의심하지 않는 상황이다. 이렇게 지나간 여성 참정권 운동의 역사가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물음은 무엇인가? 이 역사가 여성의 사회적 위치, 그리고 선거를 통한 대의민주주의에 대해 어떤 시사점을 주는지를 찾으려면 수백 년에 걸쳐 민주주의 제도를 발전시켜 온 영국의 경우를 잠깐이나마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19세기 초부터 20세기에 걸쳐서 전개된 보편적 참정권 운동은 점진적으로 확대됐 성인 모두가 보편적 참정권을 갖게 되는 과정에서 여성들이 남성들과 동일한 조건으로 참정권을 인정받게 된 시점은 그 가장 마지막 단계에서였다. 계급과 계층, 연령, 인종을 기준으로 한 차별을 넘은 단계가 지난 다음에서야 비로소 여성들에게 참정권이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어쩌면 이 사실보다 더 의미심장한 정치적 현실을 새겨 볼 필요가 있다. 모든 사람에게 이 권리가 확대되는 만큼 초기에 전체 인구의 5% 도 안됐던 남성 참정권자들이 정치적 결정 과정에서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누렸던 권한과 영향력은 현저히 감소하고 희석됐다. 즉 가장 마지막 단계에서 여성들이 얻은 참정권으로 행사할 수 있는 권한과 영향력은 가장 미미하고 약해진 단계였던 것이다. 목숨 걸고 싸워서 여성참정권을 획득했지만 역설적이게도 참정권의 획득이 사회 변화를 유도할 가능성에 있어서는 그 효율성이 낮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여성운동의 매우 중요한 결실이고 성과인 여성참정권의 획득이 여성운동의 소강상태를 불러오게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후세의 비평가들은 참정권 획득이라는 목표에 전력투구한 여성단체들은 그 목표가 달성되면 다른 문제들도 쉽게 해결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졌고, 바로 그 기대 때문에 여성운동은 동력을 잃었다고 지적한다.

여성참정권 운동가들은 남성중심적 법제도 체제 안에서 변화를 이끌어 내려는 목표에 집중하고 몰입했으나, 그 다음 단계에서 어떤 내용을 어떻게 변화시키며 지속해나갈지에 대한 구체적 목표와 아젠다까지 포함하지는 못했다는 점을 주목해야한다. 왜냐하면 여성이 경험하는 억압과 차별의 뿌리는 가부장제 역사만큼 깊기 때문에 그 역사가 만들어낸 근대적 사고방식과 문법으로 구성된 법 제도의 개정과 보완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하고 공유하지 않고서는 다음 단계로 나가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었다.

여성을 남성의 소유물로 규정하거나 인간의 기준을 남성으로 보는 근대적 법의 틀이 여전히 여성을 동등하지 못한 존재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은 성 (섹슈얼리티)와 관련해서 분석하면 분명해진다. 여성을 차별하는 법제도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현재 경주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섹슈얼리티 문제를 현행법의 언어로 다루는 데는 큰 한계가 있다. 성, 섹슈얼리티는 매매되거나 상납되는 사물도 아니며 서비스도 아니다. 성기에 국한된 것도 더욱 아니다. 성은 규범과 의식, 무의식, 꿈과 환상이 얽혀있는, 손에 잡히지 않지만 강한 영향력을 가진 것이다. 가장 사적인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가장 공적이며 가장 여리고 예민하면서도 가장 폭력적일 수 있다. 따라서 개인이 각기 다른 상황에서 겪는 경험과 주관적으로 느끼는 것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난해하다. 게다가 지구상의 어떤 법도 그 틀 안의 한정된 도구로 성에 대해 판단할 수 있도록 제대로 만들어져 있지 않다.

 

지난 5월 18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서 열린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에 참여한 여성들이 불법촬영을 비판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지난 5월 18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서 열린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에 참여한 여성들이 불법촬영을 비판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가부장적 사회가 규정하는 범위를 넘어서는, 낯선 무엇인가를 여성들이 요구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대중 매체와 여론의 특별한 관심과 질타를 받는 경우가 많다. 특히 여성들의 요구가 무시당하고 조롱당하는 불공정성에 대항하는 집단 시위가 수만의 여성을 참여시킨 사례는 흔하지 않아서 그 자체가 충격적이기도 할 것이다. 또한 충격적인 느낌을 가질 때는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너무 과격하다고 생각하고 거부감과 저항감을 느낀다. 그러나 참정권 운동의 역사가 보여주듯이 어떤 요구가 무시당할 때, 어떤 기대가 무너질 때 우리가 경험하는 절망은 과격성을 불러올 수 있다. 현재의 정책 결정자들이 문제 제기 초기에 귀를 더 기울인다면, 조금 더 깊이 문제의 핵심을 들여다본다면, 그 문제의 역사성과 심각성에 대해 더 분석하고 성찰한다면 과오와 시행착오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성으로 태어나서 길러진 경험이 없는 남성들이 한번쯤 여성의 몸으로 이 사회에서 자라면서 평가받고 상호작용하는 일상이 어떤 것인지 체험해 보거나 그것을 상상해 볼 수 있다면 여성의 입장에서 느끼는 문제, 고통, 욕구가 무엇인지 짐작하기가 쉬워질 것이다. 여성들이 겪고 있는 부당한 대우, 차별적 체험과 불리함, 성을 둘러싼 문제를 해결책을 다 담아낼 수 있는 새로운 법과 정책을 포함하는 사회가 만들어지기까지는 또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현행법이라도 최대한 잘 해석하여 활용하기를 바랄 뿐이다. 하지만 그것조차 현재 일어나는 일련의 상황들을 보면 참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꿈꾸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우리 할머니들이 만들어놓은 토대를 딛고 그 다음으로 나가기 위해.

여성신문 1500호 발행에 여성신문이 기록해 온 발자취의 소중함을 마음에 새긴다.

장필화 이화여대 명예교수

1984년 아시아에서 첫번째로 생긴 이화여대 여성학과의 첫 전임교수로 부임한 뒤 30년 넘게 여성학을가르쳤다. 정년퇴임 이후에도 '생명·정의·사회 및 평화를 위한 여성학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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