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밤, 시원한 책방에서 페미니즘 SF 함께 읽어요
여름밤, 시원한 책방에서 페미니즘 SF 함께 읽어요
  • 이세아 기자
  • 승인 2018.07.16 11:26
  • 수정 2018-07-23 19: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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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숲(SF) 갈다’ 세 번째 정기모임이 지난 13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과학책방 갈다에서 열렸다. ⓒ이세아 기자
‘페미숲(SF) 갈다’ 세 번째 정기모임이 지난 13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과학책방 갈다에서 열렸다. ⓒ이세아 기자

‘일상의 성평등’ 만들어가는 사람들

페미니즘 SF 읽기 모임 ‘페미숲(SF) 갈다’

지난 13일 저녁, 한적한 삼청동의 책방. 작가, 출판사 대표, 영화학도, 약학도, 공학도 등 다양한 배경과 연령대의 사람들 10여 명이 모여 앉았다. 페미니즘 SF(과학소설)읽기 모임, ‘페미숲(SF) 갈다’ 3차 정기모임이다.

 

페미숲갈다는 6월부터 시작됐고, 격주 금요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과학책방 갈다에서 열린다. 한국SF협회와 이공계 여성·성소수자를 지원하는 소셜벤처 ‘걸스로봇’이 공동 기획·진행하는 모임이다. 

참가자들은 매회 주제별로 작품 3~4편을 읽고 토론한다. 주로 여성 작가가 쓴, 젠더 문제를 다룬 SF를 읽는다. 급진적 언어와 서사로 기존 젠더 질서를 흔드는 작품, 여성에 대한 폭력과 통제를 극단적으로 밀어붙인 디스토피아를 그린 작품도 있다. 표류하는 우주선에 탄 AI가 목격한 인간의 폭력성과 여성혐오(김보영, 『얼마나 닮았는가』) 국가가 가임 여성들을 격리해 통제하고 특정 계급에 ‘배급’해 출산하도록 하는 세계(마거릿 애트우드, 『시녀 이야기』), ‘열등한’ 여성을 없애야 신에게 구원받을 수 있다며 여성들을 살해하는 극단주의가 판치는 세계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체체파리의 비법』) 등이다. 작품 감상을 주고받다 보면 자연스럽게 현실의 젠더 문제를 돌아보고 토론하게 된다. 

이날 3차 모임의 주제는 ‘페미사이드, 여성에 대한 폭력’이었다. 참가자 10여 명은 여성이 ‘1급 보호대상 소수인종’으로 분류돼 남성의 신부가 될 때까지 국가의 통제 하에 격리된 채 길러지는 세계에서, 탈출을 꿈꾸는 소녀들의 이야기를 그린 소설 『로드킬』 등을 읽고 토론했다. 『로드킬』의 ‘아밀’ 작가도 참석했다. 

한국의 여성폭력, 직장 내 성차별 등 여러 젠더 이슈가 이날 화제에 올랐다. “저는 문명사회 자체가 남성 중심적이라고 생각해요. 예부터 여성은 ‘모자란 존재’로 여겨졌죠. 아리스토텔레스, 프로이트처럼 영향력 있는 학자들도 그러한 논리를 펼쳤고요. 이와 다른 논의가 최근 세계적으로 진행되는데도 한국에서는 여전히 (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백래시’가 극심하죠. 아직도 (페미니즘의 논의를) 부정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아요.” 

“『체체파리의 비법』이 보여주듯이, 남성 중심적 사회의 약한 고리를 조금만 건드리면 그렇게 돼 버리는 것 같아요.” “성비 불균형으로 연애나 결혼 상대가 될 여성을 찾기 어려워지자, 남성들의 불만이 점점 더 물리적 폭력으로 표출된다는 게 소설 내용이잖아요. 한국 상황과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여요. 실제로 지난 수년간 여성의 강력범죄 피해율이 증가했고요.” 

“(직장 내 여성에 대한 편견에 관해 이야기하며) 몇몇 남성들이 찌질하게 반응하는 것 같아요. 실제로 여성 상사와 일해 본 적도 없으면서 인터넷에서 본 글을 믿고 여성에 대한 편견을 드러내죠.” “‘여성 상사’ 자체가 드물잖아요? ‘모든 생수통은 남성이 갈아 끼운다’며 역차별이라고 하는데, 저희 회사에서는 여성인 제가 생수통을 갈았어요. 억울해요(웃음)”

“한국 사회는 경쟁만 중요시하지, 인간적으로 사는 법, 타인을 배려하는 법을 가르친 적이 없죠.” “공감해요. 우리 사회는 상상력이 극도로 빈곤한 사회라고 봐요. 이 사회에서 존재가 고귀해지는 법은 돈과 권력뿐이라고 배우잖아요.”

토론 주제는 다양한 소수자들의 인권 문제로 확장됐다. “가족이 장애인이라서 장애 인권에 관심이 많은데, ‘너무 예민하다’는 말을 듣기도 해요. 어떤 이들은 ‘한국은 이미 평등한 사회’라면서 인종·장애 문제를 직시하고 싶어하지 않아 하죠.” “‘장애 체험’이라는 말도 참 이상하지 않나요? 우리가 경험과 입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존중하는 법을 알아가야 하는 것이지, 꼭 타인의 고통을 느껴봐야만 존중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페미숲(SF) 갈다’ 세 번째 정기모임이 지난 13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과학책방 갈다에서 열렸다. ⓒ이세아 기자
‘페미숲(SF) 갈다’ 세 번째 정기모임이 지난 13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과학책방 갈다에서 열렸다. ⓒ이세아 기자

페미숲갈다 공동기획자, 박상준 한국SF협회 회장은 “젠더 이슈가 사회적 쟁점이 된 오늘날 한국에서 SF와 페미니즘의 만남은 중요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많은 이들이 SF를 ‘미래 과학기술 발달상 예측’ 정도로 여기는데, 그보다는 ‘과학기술의 발달이 어떤 사회·정치·철학적 영향을 미칠지를 스토리텔링 형태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SF는 늘 진보적이고 전복적인 패러다임을 펼쳐왔고, 페미니즘 논의도 수십 년 전부터 이어왔죠. 페미니즘 SF 읽기를 통해 진지하고 치열한 담론이 전개되고 여러 부당함이 시정되길 바랍니다.” 

또다른 공동기획자인 이진주 걸스로봇 대표는 “‘페미숲갈다’는 SF를 통한 운동이자 커뮤니티 실천”이라고 말했다. 페미니즘 SF는 “새롭고 대안적인 세계를 상상하고 도전하게 하는 불온한 사고 실험”으로, 남성 중심적 세계관을 부수고 새로 창조하는 기폭제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예상보다 큰 호응에 힘입어 추가 워크숍이나 커리큘럼 확장도 계획 중이라고 했다. 

SF와 페미니즘에 관심이 있는 누구나 페미숲갈다에 참가할 수 있다. 온라인 회원가입 후 선정 작품을 읽고 간략한 독후감을 남기면 된다. 오는 27일 4차 모임 ‘여성 모험과 대안 공동체, 페미니즘 유토피아’, 8월 10일 5차 모임 ‘젠더 분리와 젠더 전쟁’ (박상준 한국SF협회 회장이 참석해 ‘완전사회’ 해제), 8월 24일 6차 모임 ‘섹스로봇’ (윤여경 한국SF협회 부회장 신작 발표)이 열릴 예정이다.

앞서 지난 15일 첫 모임 참가자들은 김보영 작가의 『얼마나 닮았는가』 등을 읽고 ‘젠더 스펙트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29일 2차 모임 참석자들은 옥타비아 버틀러의 『블러드 차일드』 등을 읽고 ‘여성이라는 생물학’에 관해 토론했다. 1차 모임엔 김 작가가, 2차 모임엔 『블러드 차일드』 한국판을 번역한 이수현 작가가 참석해 작품을 해설했다. 더 자세한 내용은 http://koreasf.freehost.kr/wp/archives/1370 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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