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비~, 저 끝에 가 있어, 가까이 오지 말고”
“에비~, 저 끝에 가 있어, 가까이 오지 말고”
  • 조은정 소비자학 박사
  • 승인 2018.07.04 16:23
  • 수정 2018-08-10 15: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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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에서 22년 동안 일하고 임원이 된 필자가 직장생활을 잘하기 위해 고민하는 여성 직장인들에게 선배로서 직접 현장에서 보고 듣고 경험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편집자주>

[나도 승진하고 싶어요] ⑪

 

저는 입사하기 전에 박사학위를 마쳤고, 여러 대학에서 조교 및 시간 강의 경력도 많은 상태였습니다. 남녀간에 승진, 급여, 하는 일 등에서 합법적인 차별이 있던 시절에 제가 기업에 채용된 것은, 지금 돌이켜 보니 기적입니다. 저 같은 사람들 채용해서 어디다 활용하려고 했을까? 그 당시 저를 채용하기로 결정했던 분들이 참 대단한 결정을 했다고 생각됩니다.

2000년대 초반, 당시 회사 내에는 바라 보며 따라할 만한 여성 상사도 없었고, 어려움이 있을 때 의논을 하고 수다를 떨 만한 여성동료들도 별로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저 나름대로 생각한 전략은 “여자라는 느낌이 안 드는 조은정, 동료나 상사가 편하게 대하도록 하자”였습니다.

이를 위해 제가 혼자 생각해서 노력했던 것 중 하나는, ‘회식 때 뒤로 빼지 않고 끝까지 버틴다’ 였습니다. 사실 술이라는 것이, 제게 그리 잘 맞는 건 아니었습니다. 대학에 입학해서 처음 술을 마셔 보았고, 조금 마시면 정신이 멀쩡해도 얼굴이 빨개지는 스타일이었습니다. 대학 다닐 때에도, 뒤로 빼지 말고 끝까지 버틴다는 것을 실천했지요. 그래서 남학생들과 술마시기 내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추억이기도 하나 어리석은 객기였습니다.

제가 회사 다닐 당시의 사회 분위기는, 개성을 존중하기보다는 획일적인 군대 문화 분위기였습니다. 그래서 회식도 일사분란하게 진행되었지요. 다 같이 소주 마시고, 다 같이 멋지게 건배사를 삼창하는 등.

회식자리에서 저는, 적당히 분위기도 맞추고 폭탄주도 잘 마시고, 제가 동료나 상사에게 술을 드리기도 하고, 원샷도 했습니다. 힘들어도 참았지요. 회식 후에는 상사가 집에 잘 가시도록 택시도 잡아서 태워 드리고, 택시 문을 닫아 드리면서 “안녕히 가세요”라고 인사도 깍듯이 하였습니다. 그런 덕분이었을까요? 저는, 동료들 사이에서 술자리를 마다하지 않고, 힘든 일도 같이 하는 “동료”로 인정받기 시작했습니다.

2002년 어느 날 새로 인사팀장이 부임하셨습니다. 다소 독특한 분이라고 소문이 자자했던 분입니다. 새로 오신 분에게 부서별로 업무 보고도 하고, 분주했던 어느 날, 인사팀 전체 회식이 있었습니다. 인원이 참 많아서, 식당의 큰 룸을 하나 빌려서, 다들 왁자지껄하게 마시고 떠들었지요. 저는, 몇 안 되는 여자 간부였기 때문에 보통 때 같으면 인사팀장 테이블 근처에 자리를 했을 겁니다. 그런데, 김 부사장은 독특한 회식 규칙을 공언하고 지켰습니다.

첫째, 인사팀장의 테이블에는 소주 한 병을 둔다. 누군가 인사팀장에게 술을 따라 드리고 싶을 때에는, 그 지정 소주병을 이용해야 하고, 다른 소주를 가져 와서는 안 된다. 둘째, 직원 중 여성은 인사팀장이 앉는 자리에서 일정 거리를 띄워서 앉아야 한다. 절대 가까이 앉으면 안 되고 될 수 있으면, 멀리 앉아야 한다.

김 부사장은 그 당시에 회식 펜스룰을 만들어서 실천했던 것입니다. 첫 번째 펜스는 술에 대해서, 두 번째 펜스는 여성에 대해서였지요. 회식 때 술이 취하면 실수를 할 수 있고, 게다가 여직원이 근처에 있으면 성희롱이 생길 수 있으니, 아예 그 원인을 멀리하자는 원칙이었습니다.

그래서 인사팀 첫 회식에서 구석 자리에 앉게 된 저는 많이 서운했습니다. 마치 여성을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저는 회식자리에서 남자 동료들과 어울려서 술도 잘 마시고 분위기를 깨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 드리고 싶기도 했고, 다른 남자 동료처럼 높은 분 가까이에서 이런 저런 말씀도 듣고 제가 하고 싶은 얘기도 하고 싶었는데, 그런 기회를 박탈당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김 부사장은 업무 때에는 저를 배제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셨습니다. 어렵지만 성과를 내면 인정받을 수 있는 어려운 일을 제게 부여하셨고 제가 좋은 아이디어를 제출했을 때는 그 일을 잘 실행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셨고, 제가 일을 잘 못 했을 때는 호되게 야단을 쳤습니다. 그 분은 남녀를 불문하고 ‘술’을 많이 마시다가 실수를 해서는 안 된다는 철칙을 지켰고, ‘술’을 이기지 못 할 때는 절대 많이 마시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2010년이 지나고서 회사에서는 절주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실시했습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회식에서 몸 망가지며 술 마시는 것이 아니라, 회사에 필요한 일을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상사에게도 업무 성과를 어필했고 인정받았습니다. 업무에서의 펜스는 절대 용납해서는 안 되지만, 내가 통제하지 못 할 정도의 술은 남녀 모두 펜스를 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됩니다. 

조은정

서울대학교 가정관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소비자학 박사 학위를 받은 조은정 박사는 1995년 삼성그룹 소비자문화원에 입사해 22년간 삼성전자 글로벌마케팅 연구소장, 프린팅사업부 마케팅그룹장 등 삼성전자의 마케팅 및 역량향상 업무를 진행했다. 여성신문에서 재능기부 하고 있다.



< 이 글은 여성신문의 공식의견과는 무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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