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옥희 ‘박영숙살림터’ 이사장

여성운동 대모, 고 박영숙 선생

‘살림’ 정신 기리고 알려

지속가능한 여성운동 위해

‘살림이상’ 제정해 지원

 

박옥희 ‘박영숙살림터’ 이사장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박옥희 ‘박영숙살림터’ 이사장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박영숙. 이 이름 석자는 한국 여성운동과 시민운동의 굶고 긴 획을 그었다. 인생의 8할을 시민운동에 쏟아부은 여성운동계의 맏언니가 세상을 떠난지도 벌써 5년이 지났다. 여든이 넘어서도 후배 여성활동가들과 새 프로젝트를 위해 마라톤 회의를 하고 지속가능한 여성운동을 위해 늘 고심했던 ‘영원한 현역 운동가’는 떠났다. 하지만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며 ‘박영숙 정신’을 기리는 이들이 있다. 박옥희 ‘박영숙살림터’ 이사장은 고 박영숙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한국 사회의 변화를 위해 여성운동에 기꺼이 투신한 ‘거룩한 바보들’(박영숙 선생은 여성활동가들을 이렇게 불렀다)들을 지원하고 있다.

서울 은평구 역촌동에 위치한 ‘살림이재단’ 건물. 이곳 5층에 위치한 박영숙살림터 사무실은 박영숙 선생의 손때가 묻은 책과 가구, 벽난로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창문 밑으로는 그가 생전에 애지중지 가꾸던 화초들이 사무실에 싱그러움을 더했다. 살림이재단 공간의 90%는 발돋음을 시작한 여성·시민단체의 인큐베이터 역할을 한다. 평화아이뚜비뚜바, 마이스토리돌, 여성문화생산자협동조합 ‘무지개공방’ 등이 이곳을 사무실로 쓰고 있다. 여성주의 의료생협도 이곳을 거쳐 지금은 ‘살림의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박 이사장은 지난 30년간 페미니즘 잡지 ‘이프’ 발행인, 문화세상 이프토피아 대표를 지내고 ‘안티 미스코리아 운동’ 등 페미니즘 문화운동을 이끈 여성운동가다.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단 한 명을 뽑던 서울신문 사진기자 채용 공고에 이력서를 넣어 합격했다. 당시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던 여성 사진기자로서 경찰서와 정치판을 뛰어다녔다. 사진 실력을 인정받던 그에게도 일상 속 성차별은 비수가 됐다. 모든 기자들이 ‘기자’로 불렸지만, 그는 ‘박 기자’가 아닌 ‘미스 박’으로 불려야 했다. 남자 선배들이 “책상 좀 닦아달라” “은행 심부름 해달라”고 요구할 때마다 왜 남자 후배에게는 시키지 않는 일을 여자인 자신에게만 시키는지 속이 부글거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했다.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그는 이를 악물고 현장을 뛰었다. 남성 기자들에 비해 체구는 작았지만 그는 “사진기자들 사이의 ‘어깨 싸움’에서 밀리지 않았다”고 했다. 좋은 한 컷을 위해서라면 아무리 거친 현장도 마다하지 않았다. 6년 넘게 현장을 뛰던 그는 임신을 하면서 카메라를 내려 놓아야 했다. 임신을 하고도 오히려 살이 빠질 만큼 입덧이 심한 상태에서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뛰어다니는 일은 “보통이 아니었다”. 동료들의 만류에도 임신 8개월에 스스로 사직서를 냈다. 이후 그는 세 자녀를 낳고 같은 신문사 펜 기자 였던 남편이 미국 워싱턴으로 발령나면서 잠시 미국에서 살았다. 귀국한 직후인 90년대 중반, 그는 그토록 하고 싶었던 여성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박 이사장은 박영숙 선생과 “새로운 일을 도모하면서” 급속도로 가까워졌다고 했다. 그전에도 안면은 있었지만 “함께 작당모의를 하면서” 자주 만나고 얘기를 나누다보니 여성운동을 하는 동료이자 후배, 친구로서 더욱 가까이 지냈다. 이현숙 여성평화외교포럼 명예대표까지 세 사람은 주변에선 ‘왕 언니들’로 불리는 삼총사였다. 스스로는 ‘접경지역 세 여성’이라고 불렀다고 했다. 각자 파주와 일산에 살다보니 붙인 이름이었다. 후배들에겐 “따뜻하지만 엄중한 선배” 였던 박영순 선생은 박 이사장, 이현숙 대표와 있을 때면 여성운동에 대한 이야기부터 우스갯소리와 속 깊은 얘기까지 나누며 마음을 터놓고 지냈다.

박영숙 선생과 함께 여성의 참여가 정치를 바로 세운다는 신념으로 ‘살림정치여성행동’을 조직했다. 박 이사장도 적극 동참했다. ‘여성’을 대표한다는 이름으로 소수의 여성이 정계에 입문해서는 ‘정치판’을 바꿀 수 없다는 박영숙 선생의 생각은 바로 운동으로 이어졌다. 박영숙 선생은 “첫사랑 하듯 일에 빠져들게 되었다”고 말하던 그대로 생각을 곧바로 실천에 옮기는 사람이었다. 박영숙 선생은 생전 여성신문과의 인터뷰에서도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은 80%의 참여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즉, ‘보통 여성’들의 정치 참여로 ‘롱테일 시대’(롱테일·80%의 다수가 20%의 핵심 소수보다 더 큰 가치를 창출한다)를 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말처럼 촛불 소녀와 유모차 부대에서 시작해 ‘촛불 혁명’속 페미존과 불법촬영 규탄시위까지 최근 보통 여성들의 목소리는 정치권도 뒤흔들고 있다. 살림정치여성행동 대표를 지낸 박 이사장은 최근 6·13 지방선거 과정과 결과에 대해 “안타깝다”고 말했다. 더불어민주당의 우세가 예상된 상황에서 여당이 선도적으로 여성 정치대표성 확대를 위해 나서야 했지만, 공천에서 여성은 외면당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번 선거에서 여성 광역단체장은 또다시 나오지 않았고, 기초단체장은 4년 전보다 오히려 1명 줄었다. 박 이사장은 “지금 정부도 여성장관 비율은 늘었지만 정부가 지명하는 차관과 기관장 중 여성은 보이지 않는다”며 “민주 세력에서도 여성에 대한 애정은 적어 보인다”고 말했다.

“매일의 삶이 공익적인 분이셨어요. 후배들과 손수 차린 밥상에 둘러 앉아서도 세상을 바꾸는 결의를 이끌어내는 분이셨죠.”

박 이사장이 기억하는 박영숙 선생은 개인의 이익보다 공익을 우선하는 사람이었다. ‘앎’을 ‘‘더불어 사는 삶’으로 실천한 그는 스스로에게는 엄격했지만 주변사람에게는 한없이 따뜻했다. ‘맏언니’ ‘왕언니’로 불린 그가 더 나은 사회를 위해 헌신하는 여성운동 후배들을 생각하는 마음은 애특했다. 아직도 연말이면 그가 며칠동안 손수 준비해 차려낸 밥상을 기억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박영숙 선생의 일생을 관통하는 생명을 존중하고 돌보고 신뢰하며 보듬는 ‘살림’ 정신은 곧 ‘박영숙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박영숙살림터는 그때 박영숙 선생이 내민 ‘밥상’처럼 여성 활동가들을 돌보고 격려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다.

“박영숙 선생님께서 생전에 지속가능한 여성운동을 위해 구체적인 지원 방법을 고심하셨어요. 특히 여성 활동가들이 여성운동에 매진할 수 있으려면 충분히 쉬고 재충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셨죠. 그래서 박영숙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1년 뒤 ‘살림이상’을 제정해 매년 현장에서 묵묵히 일해온 여성 활동가들을 선정해 상금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박영숙살림터는 여성·생명의 가치를 현장에서 실천하는 여성활동가들을 격려하기 위한 목적으로 매년 성평등, 평화, 생명 등 3개 분야별 활동가를 선정해 상패와 상금 300만원을 수여한다. 여성단체도 선정해 각 500만원의 박영숙 여성운동기금도 수여하고 있다.

박영숙 살림터도 여느 여성단체와 마찬가지로 지속가능성에 대한 고민을 이어가고 있다. 상근활동가 한 명 없이 이사회가 조직 운영을 해나가다보니 여성환경연대, 한국여성단체연합 등 다른 여성단체의 도움 없이는 운영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박 이사장은 “살림터도 지속가능성을 담보하기 위해 상근활동가 채용 등 여러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며 “쉽지 않지만 여성 활동가들에게 보탬이 될 수 있도록 살림이상 상금도 더 늘리고 기금도 늘릴 수 있도록 고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앞으로도 “박영숙 선생이 강조해온 돌봄·나눔·살림의 가치를 실천하는 여성 활동가들을 뒤에서 지원하는 일에 매진하겠다”고 말했다.

 

 

고 박영숙 선생 ⓒ여성신문
고 박영숙 선생 ⓒ여성신문

고 박영숙 선생

2013년 5월 17일 타계한 고 박영숙 선생은 여성운동과 민주화운동, 환경운동에 평생을 헌신하며 ‘더불어 사는 삶’을 실천했다. 1932년 평양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 1963년 한국YWCA연합회 사무총장을 시작으로 한국여성단체협의회, 한국여성단체연합 등에서 활동했고, 평민당 부총재와 제13대 국회의원을 지내며 여성인권운동에 앞장섰다. 90년대에는 한국환경사회정책연구소와 여성환경연대를 창립하고, 여성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한국여성재단과 살림이재단을 설립했다. 이후 안철수재단 이사장, 여성평화외교포럼 이사장, 살림정치여성행동공동대표, 아시아위민브릿지 두런두런 이사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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