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면 ‘안전한 쪽’으로 판결?
모르면 ‘안전한 쪽’으로 판결?
  • 여성신문
  • 승인 2005.05.12 16:29
  • 수정 2005-05-12 16: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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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사회를 향한 법조계의 과제(2)]
※ 다음 중 남녀고용평등법 위반이 아닌 것은?

① 남녀차별 정년제

② 감원대상에서 여성을 우선적으로 선별하는 것

③ 모집 시 여성응모자에게만 미혼인 것을 요구

④ 승진 및 승진 시험 기회가 여성에게 제한되는 것

⑤ 교환원 남성과 타자수 여성에게 각각 차별임금을 주는 것

수험생들이 가장 많이 보는 사법시험용 문제집에 나온 1992년 사법시험 기출 문제이다. 정답은 ⑤번. 문제집에는 “교환원과 타자수의 업무는 동일노동이 아니므로 임금차별이 가능하다”고 설명돼 있다.

그러나 남녀고용평등법에서 ‘동일노동’이란 같은 직종, 같은 종류의 노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직종이나 다른 종류의 일이라 하더라도 숙련, 노력, 책임감, 작업조건 등의 기준에 비추어 ‘노동의 가치’가 동일하다면 같은 임금을 주어야 한다.

법대와 사법연수원의 ‘빨간펜 지도’

“민법 제1조부터 시작하죠. 그때부터 고등학교 때 입시 준비하던 과정이 되풀이되는 거예요. 강의에서 교수님 의견에 대해 비판을 한다는 건 웬만해선 어렵죠. 학생들도 학원식 강독을 원하고요.” (모대학 법대 2년생)

“사법시험을 보려면 2천 개의 민법 판례를 외워야 합니다. 그것도 ‘요지’만 정리된 것을 외우죠. 결론만 외우면 정답이 나오게 돼 있어요.” (사법시험 준비중인 학생)

“연수원에선 주로 기술적인 면을 배워요. 수업은 역시 잘 받아 적는 것이 최고구요, 결정은 선례(판결문)에 따르죠. 문구를 얼마나 정확하게 썼나, 격식화된 언어를 썼나 하는 것이 중요하지 생각하는 훈련을 하는 건 아니에요. 아무 생각 안 하면 오히려 더 도움이 된다고 할 수 있죠.” (사법연수원 졸업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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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법조인들은 법대와 사법시험 준비과정, 사법연수를 거치면서 현실과 유리된 단순암기식 교육을 받고 있다.

<사진·민원기 기자>

법대생이나 사시 준비생, 그리고 사법연수원생들은 “법을 배우는 것이 현실과 괴리되어 있다”는 데 동의한다. 사법연수원 4학기인  씨는 “노동법은 필수도 아닐 뿐더러 점점 더 선택하는 사람들이 줄고 있다”며 “그 중에서도 여성차별에 대한 부분은 마지막 수업 1시간 동안 고용차별에 대해 배우면서 들어보았다”고 말했다.

연수원 과목 중에는 ‘여성과 법’이라는 소형강의도 포함돼 있지만 주로 사회적 여성의 지위와 법적 구제절차를 다룰 뿐 막상 ‘차별’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에 대한 감각은 키워주지 않는다.

 씨가 밝히는 것은 “법조인들이 기본적으로 노동법에 대해 무지하고 현실감각도 없기 때문에 고용관계의 특수성이나 여성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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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에서 튀면 안돼” 보수성이 우선

“법원이 판결을 내리는 데에는 법의 취지를 생각한다기보다 대법원 판례를 따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모대학 법대 대학원생)

그러나 남녀고용평등법을 비롯한 여성관련 법들은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따라갈 수 있는’ 선례가 많지 않다. 이에 대해 법대 대학원생 ㅅ씨는 “법원의 역할이 사회통념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다”며 “법원은 잘 모르는 분야면 사회통념상 수긍하는 쪽으로 판결을 내린다”고 답했다.

올해 초 형사부에 임용된 검사 ㄱ씨도 “법원과 검찰은 서로 존중하면서 미리 결정된 판결이 있으면 되도록 따라가려고 한다”며 “새로운 사건에 대해 확신이 안 서면 ‘안전한 쪽’으로 간다”고 밝혔다.  씨는 “검사나 판사나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해 공부를 할 시간적 여유도 없고 마땅한 자료도 없다”고 털어놓았는데 모르는 사건에 대해선 동료들끼리 논의하고 최종결재를 거쳐야 하는 상급검사들의 의견을 듣는다.

ㄱ씨가 말한 ‘안전’한 쪽이란 ‘사회통념’을 따른다는 의미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리 조직에선 튀면 안돼’라는 말을 종종 한다”며  씨는 “법원은 스스로 가장 ‘보수적인 조직’임을 내세운다”고 말했다.

“법원은 배워야” 판결 모니터링팀 결성

“여성들은 가부장적 사회통념의 피해자인데 법원이 자신들의 무지에 대한 구제책으로 사회통념을 들이댄다면 결국 법원의 판결은 성차별적일 수밖에 없다.”

최근 법여성학·노무사·사회학·여성학 전공자들을 중심으로 ‘성차별 판결 모니터링 모임’이 구성돼 먼저 농협과 알리안츠제일생명의 1심 판결에 대한 분석에 들어갔다. 이들은 법적 무지와 성차별적 편견에 입각한 판결이 나올 때마다 “논거를 대라!”고 요구하고 판결에 반박하는 여론을 형성해나갈 계획이다.

11월 30일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이 주최한 ‘법원은 성차별을 판단할 능력이 있는가’ 쟁점토론회에 발제자로 나선 조순경 교수는 대응책으로 “여교수의 비율을 늘리고 여성주의 법학을 교과과정에 포함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대 법대에는 단 한 명의 여교수도 없고 노동법 전공교수 중 여교수는 전국에서 한 명에 불과하다. 조 교수는 “법학 지식의 성편견을 수정하기 위해선 일정 기간 내 최소 30%의 여교수를 확보해야 한다”며 “동일한 자격을 갖춘 지원자가 있을 경우 여성을 우선 채용하고 법과대학의 대학평가 기준의 하나로 교수 성비율을 포함시키는 것이 교수직의 심각한 남성편향성을 극복하는 한 방법”이라고 제시했다.

조이 여울 기자 cognate@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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