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독립운동가 연미당(1908.7~1981.1) 선생 ⓒ국가보훈처 제공
여성 독립운동가 연미당(1908.7~1981.1) 선생 ⓒ국가보훈처 제공

국가보훈처는 여성 독립운동가인 연미당(1908~1981) 선생을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29일 밝혔다.

독립운동가 가문에서 태어난 연미당은 3·1운동 이후 상하이로 망명해 광복군과 임시정부 등을 도와 활동하며 일생을 민족 독립활동에 투신했다.

그는 1908년 7월 북간도 용정해관에서 태어났다. 부친인 연병환 선생은 북간도 청년들이 1919년 3월 3일 전개한 만세운동을 배후에서 지원하다 체포돼 2개월간의 옥고를 치른 후 가족들과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했다.

연미당은 1927년 11월 상하이에서 결성된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에 참여했고, 여성들의 독립운동 참여 독려와 역량 결집을 위해 결성된 ‘상해여자청년동맹’에서 임시위원을 맡았다. 1930년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 재건 한국독립당 당원으로 활동했다. 1940년 9월 임시정부가 충칭으로 이전한 후에는 한국혁명여성창립동맹을 발족하고 한국애국부인회의 조직부장을 맡았다. 충칭 방송국에서 일본군 소속 한인 사병들을 광복군으로 전향시키고자 반일선전도 전개했다. 한국 여성 총궐기를 촉구하는 한편 1944년 한국독립당에 입당해 활동했다.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 홍커우(虹口) 공원에서 의거 당시 사용된 ‘도시락 폭탄’을 싼 보자기를 만든 사람이 연미당이다. 중국에서 폐결핵으로 고생하던 이동휘와 3당 통일회의 때 이운한에게 저격당한 백범 김구 선생을 간호하기도 했다. 연미당의 남편은 임시정부 핵심 인물인 엄항섭이고, 맏딸 엄기선도 임시정부에서의 활동을 인정받아 건국훈장을 받은 독립운동가다.

연미당은 1945년 광복 이후에도 중국에 있는 한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힘쓰다 1946년 6월 3일 귀국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남편이 납북돼 생이별했고, 이후 중풍을 앓으며 힘겨운 세월을 보내다가 1981년 1월 1일 순국했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이명화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학술연구팀장은 2014년 3월24일 서울 용산구 백범김구기념관 대회의실에서 열린 ‘20회 한국여성독립운동사 학술연구발표회’에서 연미당의 독립운동에 관해 발표하며 “연미당은 자신과 가족을 위한 ‘사적 영역’을 뛰어넘어 자기 희생을 바탕으로 조화와 협동과 공정함을 유지하며 민족 우선의 가치를 실천한 진정한 독립운동가 (...)선생의 생애는 바로 한국여성 독립운동의 삶 그 자체로 수난의 시대를 이겨내고 자유와 민주 쟁취의 역사를 써내려간 시대의 주인공”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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