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성 변호사의 이러시면 안됩니다 - 18]

3년 전쯤의 일이다. 어느 지방에서 성희롱·성폭력 관련 심포지엄이 개최되어 발표자로 참석한 적이 있다. 당혹스러웠던 경험 하나. 종합토론 시간이 되었는데, 어느 한 분이 객석에서 필자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다 듣고 보니, 성희롱·성폭력은 피해자의 잘못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맞나요?”

대체 무슨 소린가. 이걸 어떻게 답해야 하나. 짧은 시간 동안이었지만 심각하게 고민했다. 성희롱·성폭력 사안의 책임이 오롯이 가해자에게 있는 것이며, 그 어떠한 이유로도 피해자에게 탓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 아닌가.

하지만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진지하게 묻고 있는 분에게 ‘너무 당연한 걸 물어보시니 제가 더 당황스러워요.’ 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 부당한 공격이나 완전히 딴 세상 헛소리를 하는 것이 아닌 이상, 모든 질문자는 성의 있고 예의 바른 답변을 들을 권리가 있다. ‘어떻게 하면 저런 당연한 걸 물을 수 있지?’ 라는 의문을 내심 가지면서도 겉으로 표 나지 않게 정중하게 답하느라 진땀을 뺐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위와 같은 질문이 적어도 우리 현실에 있어서는 여전히 유의미하게 다루어져야 하고 지속적으로 주의환기 되어야 하는 논점임을 깨닫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차 피해의 신기술! 혀를 내두를 정도의, 가히 ‘신기(神技)’에 가까운 2차 피해 유발 사례를 필자가 보게 되었던 것은 심포지엄에서 위 질문을 받았던 날로부터 1년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당황스러움을 넘어, 차라리 황당함의 지경에 이르게 되면 화가 나기에 앞서 헛헛한 웃음밖에 안 나온다는 걸 이때 한 번 더 경험했다. 아직도 이 사건만 생각하면 어이없는 웃음뿐!

상당히 중한 정도의 성폭력 피해가 발생했다. 얼마나 심각한 피해였냐고? 나중에 법원도 가해사실을 모두 유죄로 인정했다. 말하자면, 더 이상 가타부타 왈가왈부할 이유 없는 진짜 피해자였다. 피해발생 직후에 피해자는 지근거리에 있었던 상급 관리자에게 도움을 청했다.

관리자는 말했단다. “○○○씨, 그런데 성경험은 있어요?” 이게 뭔, 자다가 곤봉으로 도깨비를 때려잡는 소리! 피해자도 의아해 했단다. “네? 지금 무슨 말씀인가요?” “아니, 나는 결혼한 지 20년이 넘어서, 성생활이 내 생활의 일부이다 보니까, 남자의 성욕을 자제시킬 수 있는 법을 알고 있지. 혹시 이런 걸 잘 몰라서 피해가 생긴 게 아닌가 싶어서.” 헐! 이쯤 되면 ‘내가 이러려고 관리자를 찾아 갔나 자괴감이 들’ 타이밍이 됐다. 그래서 피해자도 그랬단다. “지금 무슨 말씀하시는 거에요? 제 탓을 하시는 건가요?” 그나마도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었던지 피해자 탓을 하는 거냐고 따져 묻자, 관리자도 잠깐 흠칫 했단다. “아니, 뭐. 그냥 그렇다고.”

이건 그저 시작에 불과했다. 장대한 2차 피해 대서사시의 서막! 이 분의 황당무계 극악무도 공분유발 어록은 여기서 끝이 아닌데, 이 글은 이 분에 대한 징계요구서나 공소장은 아니니 여기서는 요 정도 선에서 갈무리하기로 하자.

아 참, 여기서 함께 언급할 만한 내용이 한 가지 더 있기는 하다. 이런 얘기도 덧붙이셨단다. 그 성폭력 피해는 피·가해자가 술을 조금 나누어 마신 직후에 있었던 일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였는지 후대에 길이길이 남을 이런 명언도 남기셨다. “그러게 왜 술은 마셔 가지고!”

 

저런 터무니없고 어처구니없는 말을 ‘한 세트로’ 들었을 때, 피해자의 마음이 어땠을지 상상해 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래도 피해자가 천성적으로 선한 분이셨기에 다행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자력구제(自力救濟), 그러니까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스스로 ‘알아서 해결해 드리는 것’은 우리 법이 엄히 금하고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필자처럼 ‘욱하는’ 성격을 마음 속 한 켠에 고이 숨겨두고 있는 사람이었다면 숭례문 앞에서 제일가는 ‘방망이 깎는 노인’에게 ‘큰바위 얼굴’ 정도는 한 방에 뽀개 버릴 만한 방망이부터 인터넷으로 주문해서 해결을 보려고 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세상이라면 필자 같은 변호사들부터 깡통을 옆에 차고 거리에 나앉게 될 터이니만큼 법보다 주먹을 앞세우자는 자해적이고도 자살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절대 아님을 잘 헤아려 주시길. 그만큼이나 마음이 답답해서 한 번 해 본 소리다. 독자 여러분, 자력구제는 안 됩니다!)

생각해 보자. 길 가다 강도를 당한 사람에게 이렇게 얘기해 본다면? “그러게 왜 평소에 지갑은 들고 다녀 가지고!” 방화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는 이렇게도 말해 보자. “그러게 왜 건물은 거기다 지어놔 가지고!” 자동차 뺑소니 피해를 입은 사람이라면 이런 소리를 들을 법도 하다. “그러게 왜 길바닥을 걸어 다녀 가지고!”

위엣 분이 남기신 어록에 비추어 보면 이런 말도 가능할 성 싶다. “나는 철들고 지갑을 들고 다닌 지 어언 20년이 넘어, 지갑을 꼭꼭 숨기고서 강도의 탐욕을 제지시키는 묘법을 잘 알고 있는데, 자네는 경험이 없어서 그런 걸 몰랐기 때문에 강도를 당한 게 혹시 아닌가 싶어서.” “나는 일찍이 태어나 걸어 다니기를 수 삼년 하여 자동차 운전자의 뺑소니할 의사를 자제시키고 자동차를 피하는 법에 익숙한데, 자네는 그러질 못해서 사태가 이 지경이 된 게 아닌가 싶어서.”

피해자에게 이런 따위의 말을 하는 사람을 우리는 뭐라고 부를까? 그리고 이런 말을 도대체 뭐라고 불러야 좋을까?

성희롱·성폭력 피해의 책임은 그 어떤 사유를 대더라도 온전히 그 전부가 가해자에게 돌아가야 마땅한 것이다. 어떠한 이유에서도 어떠한 경우에도 피해자의 탓이 아니다. 이는 수학으로 치면 가장 근본적이고 확고한 전제사실, 즉 공리와도 같은 것이어서 이 점에 대하여는 이견이 있을 수 없고 이견이 있어서도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제가 머리와 마음으로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위에서 예를 들어본 것처럼 다른 종류의 범죄나 괴롭힘, 잘못들과 비교·대조해 볼 것을 권한다.

제정신이기만 하다면, 강도의 물욕을 제지시키지 못했음을, 뺑소니 운전자의 도주의사를 막아내지 못했음을 피해자에게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왜 유달리 성희롱·성폭력만? 왜 성욕을 자제시키지 못했냐고? 미치지 않고서야 이걸 지금 말이라고 하나? 이런 말 같지도 않은 헛소리를 일컬을 수 있는 단어는 딱 하나밖에 없다. ‘2차 피해.’ 반드시 기억하자. 2차 피해 유발은 법정 징계사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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