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5일 이화여대에서 여성신문과 인터뷰 중인 신시아 그랜트 바우먼 미국 코넬대 로스쿨 교수.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지난 25일 이화여대에서 여성신문과 인터뷰 중인 신시아 그랜트 바우먼 미국 코넬대 로스쿨 교수.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신시아 그랜트 바우먼 교수 방한

미국 미투운동서 드러난 법제도 허점 지적

성폭력 가해자 행위보다

피해자가 ‘거부했나’ 더 중시하고 

근로계약서의 ‘비밀유지의무’ 빌미로

피해자 입 막기도

‘미투(#MeToo)’ 운동의 진원지, 미국의 현재 상황은 어떨까. 수십 명에게 성폭력을 저지른 혐의를 받는 할리우드 영화제작자 하비 와인스틴은 강간혐의로 기소됐다. 유사한 혐의를 받는 유명 코미디언 빌 코스비는 유죄평결을 받아 양형을 기다리는 중이다. 상원의원부터 폭스 뉴스 설립자까지, 성폭력 혐의로 고발당한 이들이 줄사퇴했다. 여성들의 연대 행동은 계속됐다. 할리우드의 여성들이 결성한 반성폭력 운동단체 ‘타임즈업(Times Up)’은 저소득·유색인종 여성 피해자들에게 법률 지원을 하고자 2000만 달러와 변호사 200명 이상을 모았다.

“놀라운 일들의 연속이었습니다. 기존에는 미국 사회도 법정도 성폭력 피해 고발자의 ‘무고’부터 의심하는 분위기였죠. 미투 운동 이후 ‘피해자는 진실을 말한다’라는 전제가 자연스레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빌 코스비 재판 담당 판사는 공소시효가 만료돼 공소를 제기하지 못한 피해자에게 법정 증언을 허용하기까지 했어요.”

법여성학의 세계적 권위자인 신시아 그랜트 바우먼(Cynthia Grant Bowman) 미국 코넬대 로스쿨 교수가 25일 한국을 찾았다. 그는 성폭력 생존자에 대한 법적 구제방안을 주로 연구해온 페미니스트 법학 전문가다. 25일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주최 학술대회에서 만난 그는 미국의 미투 운동 전개 과정에서 어떤 법제도의 빈틈이 드러났고, 어떤 대응책을 논의 중인지 설명했다.

미국 미투운동서 드러난 법제도 빈틈

성폭력 가해자 행위보다

피해자가 ‘거부했나’ 더 중시

근로계약서 ‘비밀유지의무’ 빌미로

피해자 입 막기도

법과 제도가 있는데도 왜 성폭력이 끊이지 않을까? “가해자의 행위보다, 피해자가 ‘원치 않는다’는 의사를 표현했는지를 더 중시하는 법에 책임이 있다”고 그는 설명했다.

미국 대부분 주는 피해자의 ‘동의’ 여부를 성폭행 판단 기준으로 삼고 있다. ‘피해자의 반항이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할 정도에 이르는’ 폭행 또는 협박이 있어야만 성폭행으로 인정되는 한국에 비하면 피해자에게 유리한 내용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가해자가 피해자의 적극적인 동의를 얻었느냐’에 주목해야, 성폭력을 근절하고 피해자들이 수월하게 법적 구제를 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또 관련법은 ‘합리적인 사람’이라는 모호한 기준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많은 피해 여성들이 보여주는 ‘합리적이지 않은’ 언행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무고 아니냐’며 의심하기 쉽죠.”

직장 내 성폭력 대처 과정에서 사측이 법제도를 악용한 사례도 적지 않다. 사용자가 사건 중재(private arbitration)를 요구하며 ‘합의하는 대신 성희롱 사실을 발설하거나 회사에 소송을 제기하지 않는다’라는 근로계약서 조항을 빌미로 피해자의 입을 막으려 든 경우다. 이는 독소조항이라고 바우먼 교수는 비판했다. 최근 워싱턴주 등 일부 주 의회에서는 같은 이유로 사측의 강제 중재합의를 금하는 법안을 발의하거나 통과시켰다.

 

지난 25일 이화여대에서 여성신문과 인터뷰 중인 신시아 그랜트 바우먼 미국 코넬대 로스쿨 교수.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지난 25일 이화여대에서 여성신문과 인터뷰 중인 신시아 그랜트 바우먼 미국 코넬대 로스쿨 교수.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미투운동서 소외된

불법 이민자·성매매 여성·동성애자 등 

법 사각지대의 인권도 보호해야

성폭력 가해자와 공존할 방안도 과제

한국 남성들 ‘펜스룰’에 일침

“만연한 성폭력에 여성들 분노, 남성혐오로 봐선 안돼”

미투 운동이 쏘아 올린 공은 성평등 사회를 만들기 위한 다양한 고민과 노력으로 이어졌다. “지금 미국에선 ‘동의했으니 강간은 아니지만 원치 않는, 불쾌한 섹스’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두고 논의가 활발합니다. 또 시민들이 다양한 소비자 캠페인을 통해 반성폭력·성차별 운동에 나섰어요. 우디 알렌·케빈 스페이시 등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이 만들거나 출연한 영화를 불매운동하기도 하고, 지난 봄엔 엘리트 로스쿨 학생들이 ‘직장 내 성희롱 논의를 금하는 법무법인 공개 운동’을 벌이기도 했죠.”

남은 과제도 많다. 법의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의 안전과 존엄은 어떻게 보호할 수 있을까? 불법 이민 여성은? 성매매 여성은? 남성 동성애자들은? 그들에게 ‘미투’를 외칠 기회가 있는가? 그들의 ‘미투’는 주류 여성들의 고발처럼 큰 파장을 일으킬 수 있을까? 한국의 페미니스트들도 줄곧 고민해온 문제다.

“미국과 달리, 한국에서는 많은 피해자들이 진실을 알리고도 명예훼손죄나 무고죄로 고소당할까봐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법제도 개혁이 시급해 보이는데요. 중요한 건 문화를 바꾸는 겁니다. 피해자의 배경, 인종, 젠더 등이 피해 고발과 권리 구제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게 중요하죠. 근로계약서에 ‘비밀유지의무’ 조항 삽입 금지, 다양한 삶의 맥락을 반영한 정기 전수조사 형태의 성폭력 실태조사 실시 등이 중대한 변화로 이어질 수 있겠죠. 엄정한 법 집행도 중요합니다. 가해자나 피해자가 누구든, 죄를 저지르면 감옥에 갈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합니다.”

성폭력 가해자들과 어떻게 공존하느냐도 문제다. 바우먼 교수는 미국 원주민 법제를 본뜬 ‘회복적 정의’ 절차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피해자, 가해자, 공동체가 함께 모여 적절한 피해 보상을 논의하고, 과거의 피해 회복과 앞으로의 피해 예방책을 모색하는 방식이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물론 아직은 먼 이야기다. 가해자들이 죄를 인정하고 진심으로 공개 사과하기만 해도 좋겠다”라고 덧붙였다.

남성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여성이 피해자인) 성폭력 사건이 일어났을 때, 여성들의 분노와 공포를 목격할 때, 그것이 ‘모든 남성에 대한 공격’이라고 여기거나 그렇게 묘사하지 마세요. 당신이 범죄를 저지른 적 없거나, 저지르지 않을 거라면 더더욱 그럴 필요가 없죠! 대신 성폭력은 ‘옳지 않다, 그런 일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하세요. 가능한 모든 방식으로 피해자를 지지하세요. 이런 이슈에 관심을 갖고, 여성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그들을 믿으세요.”

바우먼 교수는 “남성들에 대한 교육과 사회화 방식이 바뀌어야 한다”고 했다. “성교육 시간에는 ‘성을 정복이나 권력과 동일시해서는 안 되며, 마지못해 한 동의는 동의가 아니고, 완전한 동의에 기반한 상호 존중 관계가 얼마나 만족스러운지, 좋은 섹스를 위해서는 서로 동의하고 원해야 한다는 사실, 개방적이고 상호존중하며 예의를 지키는 직장 관계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가르쳐야 한다”고 제언했다.

성차별적 ‘펜스룰’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했다. “여성에게 부적절한 성적 접근을 하지 않고 함께 일할 방법을 몰라요? 그럼 배워야죠! 미투 운동은 그 자체로 훌륭한 교육입니다. (성평등 사회로 나아가는) 이 과도기에, 여성들이 자신의 안전과 존엄성을 계속 걱정해야 하는 상황보다는, 권력관계에서 우위를 점한 이들이 지나치게 신중한 태도를 보여주는 편이 훨씬 낫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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