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강아지 뭉치 ⓒ김경애 편집위원
우리 강아지 뭉치 ⓒ김경애 편집위원

우리 강아지 ‘뭉치’는 포메라니안 종으로 1998년 우리 집으로 왔다. 아들 상완이가 평소 이용하던 책 대여 가게에서 주인이 먼저 원하는 사람에게 강아지를 주겠다고 하자 누나와 의논해서 나에게는 아무런 사전 통보도 없이 우리 집으로 데려왔다. 퇴근 후에 집에 오니 두 눈과 코 등 세 개의 새까만 동그라미가 얼굴을 다 차지하고 있고, 털은 하나 없이 꼬리는 쥐꼬리처럼 생긴 초라하기 짝이 없는 팔뚝만 한 강아지였다. 아이들에게 이 강아지를 키울 수 없다고 말하는 순간 그 놈의 슬픔이 가득한 눈과 마주쳤다. 그렇게 우리 집에 정착한 뭉치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털도 나지 않았던 뭉치가 오줌을 못 가린다고 이집 저집에서 쫓겨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우리 집에는 오자마다 베란다에 나가서 용변을 보았다. 어릴 때 여러 집을 다니며 거부당한 트라우마로 밥을 잘 먹지 않아 내내 나의 애를 태웠다. 산책길에 다른 개들이 반갑다고 꼬리를 쳐도 피하기 바쁘고 처음 보는 사람들은 더더욱 낯을 가렸다. 강아지를 처음 키워본 나는, 뭉치 나이가 16살이 되어 백내장으로 눈이 안 보여 마당에서 엉뚱한 곳으로 가고 몸무게가 점점 더 줄어들어도 앞으로 10년은 나와 함께 더 살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는데, 뭉치는 어느 날 새벽에 잠자리에서 갑자기 일어나서 내가 다독여주었더니 그길로 숨이 멎고 우리 곁을 떠나버렸다. 뭉치는 내가 결혼할 때 어머니가 만들어주셨으나 한 번도 입을 일이 없었던 삼베 속바지를 잘라 만든 보자기에 싸여 남편이 만든 나무관에 누어서 묻혔다. 뭉치의 무덤 위에 자갈로 만든 하트가 놓여 있다.

 

뭉치 떠나보낸 뒤 만난 뭉치

재작년 초에 어린 강아지 한 마리가 이웃집에 왔다. 강아지의 이름을 그 집의 딸과 손녀들이 ‘뭉치’로 정했다. 이는 한편 우리 뭉치 이름을 뺏긴 것 같기도 했고 다른 한편은 우리 뭉치를 추억하는 좋은 방법인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니 털이 빠지면서 날리기 시작하자 주인은 소 마구간 구석에 뭉치를 묶어두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사람 얼굴도 못 보고 소와 지내게 된 것이다. 소 등 위에 올라가 작은 창으로 밖을 내다보곤 한다는 것이다. 개 주인은 그 부인에게 갖다버리라고 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안타까워하는 나를 보고 데리고 가서 키우라고 했다. 그런데 우리 뭉치를 보내고 난 슬픔을 겪었고, 무엇보다 강아지가 어린 자식 같아, 저녁이 되면 목 빼고 기다리고 있을 강아지 때문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초조해지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낮에만 돌보기로 하고, 나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뭉치를 풀어주면, 초스피드로 일단 옆집 개 용용이에게 가서 서로 쳐다보며 꼬리를 마구 흔들고는 숲을 돌아다녔다. 때로는 어느 집 부뚜막으로 들어갔는지 얼굴에 시커먼 재를 뒤집어쓰고 오기도 했다. 두어 시간 뛰어다니다가 우리 집으로 와서 아침을 먹고 그리고는 하루 종일 우리 집에 묶여 있었다. 좀 더 많이 풀어주고 마음대로 다니게 하고 싶지만 동네 사람 중에서 개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어 그럴 수가 없어 안타까웠다. 특히 옆집 치매가 있는 할머니를 돌봐주러 아침저녁으로 방문하는 요양보호사가 개를 무서워해서 묶어둘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작년 7월 어느 날 아침에 풀어놓았던 뭉치가 얼굴이 퉁퉁 붓고 피를 흘리며 나에게로 찾아왔다. 콧잔등 위에서 피가 나서 약을 발라주고 안정을 시켰는데 붓기는 가라앉지 않는 것이었다. 천천히 살펴보니 오른쪽 입가에서는 더 많은 피가 나고 목덜미에서 난 피로 목 아래 털이 젖었다. 어찌할 바를 몰라 뭉치 주인에게 병원에 데려가자고 하니 조금 더 두고 보자고 한다. 안아서 주인집에 데려다주고 그다음 날 미음을 만들어 가져다주었다. 미음을 먹었지만 피는 그치지 않는 것 같았다. 병원에 데리고 가자고 다그치는 나에게 동네 이웃들은 동물은 먹으면 낫는다면서 먹는 것을 보니 낫겠다고 낙관한다. 우여곡절 끝에 읍네 동물병원 의사와 상담하고 주사약을 사 왔는데, 무슨 약인지 모르나 뭉치는 그 주사를 얌전하게 잘 맞았다. 그리고는 사흘 만에 붓기도 다 빠지고 나았다. 꼬박 일주일이 지나서야 괜찮아졌다. 다쳐도 주인에게 가지 않고 나에게로 먼저 온 것 때문에 뭉치는 동네 이웃들로부터 타박(?)을 받았는데, 아직도 뭉치가 무엇에 물렸는지 미스터리다. 그런데 뭉치는 평소에 온 동네 길고양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는데, 길고양이와 싸워서 물린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중론이었다.

 

이웃집 강아지 뭉치와 친구 ⓒ김경애 편집위원
이웃집 강아지 뭉치와 친구 ⓒ김경애 편집위원

10년 만에 얻은 이름 ‘용용이’

뭉치가 오기 전부터 우리 동네에 개가 한 마리 있었다. 이 개는 강아지라고 하기에는 큰 누렁이다. 이 개는 은자아지매(가명)의 개다. 근데 아지매가 돌아가시자 홀로 남아서 집을 지키게 됐다. 아지매의 아들은 어머니가 기르던 개를 없앨 수가 없어 가끔 와서 돌보고 있었다. 그러나 개가 커서 접근하기 어려워 나는 멀리서 쳐다보기만 했는데, 개를 좋아하는 여동생과 그 딸이 우리 집에 와있는 동안 불쌍하다고 매일 가서 먹이를 주었다. 그랬더니 개가 혀로 여동생의 손을 핥으면서 친근감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겨울인데 개집에 구멍이 나 있어서 동생과 함께 뽁뽁이를 사서 집을 싸주고 담요와 짚을 깔아주는 것으로 돌봐주기가 시작됐다. 읍내에 사는 은자아지매의 아들이 먹이를 챙겨주러 왔을 때 만나서 개 이름이 뭐냐고 물어보니 이름은 없고 그냥 “쯧쯧쯧”라고 하면서 부른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홀로 잘살고 있다는 뜻으로 용감하고 용감한 개라고 “용용이”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 나이 10살이 지났는데 비로소 온전한 이름을 가지게 됐다. 매일 갈 때 마다 “용용아”라고 부르면 좋아서 펄쩍펄쩍 뛴다. 용용이는 가끔 줄을 끊어 동네를 돌아다니기도 한다. 하루는 동네를 돌아다니다 우리 집으로 와서 내가 있는 마루 옆에서 한동안 앉아 있기도 했다. 끊어진 줄을 다시 연결해서 묶이자 줄이 너무 짧아 기다란 새 줄을 사서 묶어주었다. 근데 이 새 줄은 너무 튼튼해서 용용이는 다시는 이 줄을 끊지 못해 계속 묶여있다.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낡은 목줄이 나았을까? 용용이는 몸집이 커서 내가 산책 데리고 다니기에는 무리다. 용용이가 가끔 줄을 끊고 돌아다녔으면 좋겠다.

용용이에게 내가 베풀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물을 갈아주고 사료를 주고 난 후, 지푸라기가 어질러진 개집 안을 치워주고 있는데 나에게 살짝 와서 내 팔을 핥았다. 나에게 고맙다는 표현을 할 줄 아는 놈이다. 그 이후로는 목 아래를 만져주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면 좋다고 꼬리를 마구 흔들어 나를 기쁘게 해준다. 그뿐만이 아니다. 빈집에도 어김없이 봄이 되면 마당에 달래가 무성하다. 용용이가 자신의 집 뒤로 내가 들어가는 것을 허락해줘서 달래를 뜯어 반찬으로 해 먹고 우리 마당에도 옮겨심기도 했다. 초여름이 되니 용용이집 근처에 자두가 뒹굴길래 보니 문 근처 큰 나무에 자두가 주렁주렁 열렸다. 떨어진 달콤한 자두를 한주먹 줍기도 했다. 또 대문 앞에는 방아가 무리지어 자라고 있다. 몇 잎씩 따다 부침개 만들 때 넣기도 하고 된장 끓일 때 넣으면 향기롭다.

 

복날 오면 사라지는 존재들

지난해 여름 서울에 며칠 갔다가 돌아왔는데, 돌아오고도 피곤해서 그 이튿날에야 용용이에게 가보니 한여름에 물이 없어 신음까지 내며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 이 일이 있고 난 후 집을 비우는 날이면 걱정이다. 동네 사람들은 내가 용용이를 돌보는 것을 처음에는 쓸데없는 일에 관심 갖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시골에서는 개라는 것은 그저 묶어두고 키우다 복날이 가까워져 오면 팔아버리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해마다 세 번의 복날 중 한 번은 내가 동네 사람들에게 삼계탕을 대접하는데, 재작년에 동네 사람들은 내가 낸 돈으로 개고기를 사서 끓였다. 다음날 외출하려고 집을 나서는데 단내가 진동해 살펴보니 마을회관의 대형 프로판 가스에 먹다 남은 개고기탕이 끓다가 졸아서 불이 나기 직전이었다. 부랴부랴 갈골댁(가명)에게 연락해서 불을 끄고 가까스로 화재를 막았다. 그 이후 나는 농담 반 진담 반 마을 회관에서 개고기 먹으면 그 날 나는 함께 하지 않고 떠나겠다고 협박(?)했고, 동네아지매들은 심심하면 복날에 개고기 먹을 거라면서 나를 놀렸다. 지난해부터 복날에 더 이상 마을회관에서 개고기를 먹지 않게 됐다.

시골에서 제일 좋지 않은 점은 집마다 개를 묶어서 기르는 것을 보는 것이다. 또 도로에서 죽어 있는 동물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또 소나 돼지 등 동물들이 차에 실려 팔려가는 것을 보면 애써 외면한다. 개장수가 개나 염소 팔라고 방송을 하면서 우리 동네에 들어올라치면 소름 끼치게 싫다. 우리 ‘뭉치’를 기르고 난 후부터 동물이 얼마나 섬세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되어 한동안 채식주의를 선택했다. 지금은 채식주의는 포기했지만 고기 먹을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아 하면서도 여전히 고기를 잘도 먹고 있는 모순된 나 스스로가 한심하게 여겨지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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