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발레단, ‘말괄량이 길들이기’ 홍보 이미지 ⓒ국립발레단
국립발레단, ‘말괄량이 길들이기’ 홍보 이미지 ⓒ국립발레단

무용계에서 꾸준히 공연되는 클래식 레퍼토리는 전통 혹은 원작자의 거대한 이름에 짓눌려 있기 일쑤다. 창작자는 현대적인 어휘 개발과 현대의 사상이라는 두 가지 난제에 봉착하며, 전통은 때로 그 두 가지 방향 모두를 제약하는 억압으로 작동한다. 전통이기 때문에, 혹은 원작자가 이제는 죽고 없기 때문에 손을 낼 엄두를 내지 못하거나, 전통을 훼손했다는 비난을 받기 십상이다. 

국립발레단이 강수진 단장 부임 이후 세 번째로 무대에 올린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슈투트가르트발레단에서 1969년 초연된 후 발레단의 주요 레퍼토리로 남아 있는 작품이다. 클래식 작품은 아니지만 반 세기 가까이 공연되는 동안 작품 내의 여성혐오나 장애인혐오 요소들이 원작자인 셰익스피어와 이제 고인이 된 안무가 존 크랑코의 거대한 이름에 얽매여 별다른 개정 없이 공연되고 있다. 줄거리는 ‘여성스럽지 못한’ 성격의 카타리나를 페트루치오가 조련하듯 길들이는 내용을 주요 축으로 삼고 ‘여성스러운’ 성격으로 뭇남성들의 인기를 독차지해온 비앙카가 실은 내숭으로 본래의 성격을 숨기고 있었다는 반전을 내세운다. ‘말괄량이’였던 카타리나는 남성에 의해 여성의 미덕을 배워야 하는 존재로 그려지는 한편 ‘숙녀의 표본’이나 다름없었던 비앙카는 결말에 가서 그 위선을 폭로당함으로써 숙녀라는 존재를 부정 당한다. 안무가는 여성의 미덕을 남성에게 복종하는 데 두었던 16세기 원작의 세계관을 비판 없이 수용해 작품을 만들었다. 

또 카타리나를 길들이는 과정에서 페트루치오의 하인들이 장애인 흉내를 내며 카타리나에게 공포심을 주는 장면을 단지 웃음을 유발하기 위한 목적으로 삽입하고 있다. 국립발레단은 2016년 ‘라 바야데르’ 공연 중 아랍계 아동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얼굴을 검게 칠하는 ‘블랙페이스’ 분장으로 인종차별 논란의 중심에 선 바 있다. 인권 감수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진 현재에 그 정도 차별쯤은 그래도 되는 것이었던 과거의 작품을 올리면서 벌어진 논란들이다.

26년 만에 내한한 스코틀랜드국립발레단은 가난한 집에서 학대당하는 어린 남매의 이야기를 친구들을 구하기 위해 모험을 떠난 어린 영웅들의 이야기로 바꾼 ‘헨젤과 그레텔’에서 숲속에 사는 마녀를 등이 굽은 장애인으로 표현했다. 그림 형제의 원작에서 할머니로 등장하는 마녀는 허리가 굽어 지팡이에 의지해 걸어야 하지만 장애인은 아니다. 

극중에서 장애인이 악의 상징으로, 처단해야 하는 괴물로 그려지는 장애인혐오의 역사 또한 매우 뿌리가 깊지만 현대의 창작자들은 이를 별 고민 없이 수용하고 있다. 황정민 주역으로 화제를 모았던 연극 ‘리처드 3세’는 곱추 분장을 한 황정민의 모습을 티저 포스터로 사용해 다른 의미로도 화제를 모았다. 셰익스피어 시대에 통용되던 인간의 신체적 장애가 인간이 지닌 악의 근원이라는, 혹은 인간의 악이 신체의 장애 속에 깃들어 있다는 주술적 인식을 비판 없이 수용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배우의 장애인 분장을 셀링 포인트로 삼으며 제작사의 장애인혐오를 투명하게 드러낸 단면이다. 황정민이라는 연기력과 티켓 파워를 갖춘 배우를 기용하면서 그의 연기가 아닌 ‘진짜’ 장애인처럼 분장한 그의 모습에 초점을 맞춰야 했는지 돌아봐야 할 일이다.

유니버설발레단은 대한민국발레축제 참가작으로 ‘춘향’을 무대에 올리며 지난 2014년 공연에 이어 작품을 또 한 번 일신했다. 극중에서 변 사또의 수청 요구를 물리치고 옥에 갇히는 춘향의 고난은 결말에 가서 몽룡과의 재회가 예정되어 있기에 보는 사람들에게 더욱 안타까움을 느끼게 하는 장면이다. 춘향이 겪는 고난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몽룡과 나누는 재회의 기쁨도 배가된다. 그래야만 관객들이 느끼는 카타르시스도 커지기에 후대의 창작자들이 매우 공들여 묘사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발레 ‘춘향’은 이 장면을 춘향이 변 사또의 수하들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고통을 겪는 것으로 묘사했다. 이 장면은 안무를 풀어내는 움직임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춘향’의 원작인 국립무용단의 무용극 ‘춤, 춘향’에서도 동일한 전개방식을 보여준다. 춘향의 수난이 여성무용수 한 명이 여러 명의 남성무용수에게 신체적 고통을 당하는 것으로 묘사되어야 했는가 하는 질문을 안기는 장면이다. 고증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했을 때 고전소설 『춘향전』의 배경으로 설정된 조선시대였다면 춘향은 볼기를 맞는 장형(杖刑)에 처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안무가 입장에서는 고증을 따르기보다 현재와 같이 여성무용수가 남성무용수 여러 명에게 휘둘려지며 고통을 당하는 편이 움직임 면에서나 공간 사용 면에서 미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발레단의 또 다른 대표 레퍼토리인 ‘심청’에서도 심청이 인당수에 제물로 바쳐지기 직전 뱃사람들에 의해 수난을 당하는 장면이 춘향의 고난 장면과 비슷한 전개를 보이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안무가가 장면을 구성하며 했을 고민에 대해 물음표를 던지게 되는 지점이다.

케네스 맥밀런이 안무한 발레 ‘마농’ 3막에는 수인(囚人)의 몸으로 유배지에 간 마농이 간수에게 성적 학대를 당하는 장면이 삽입됐다. 해당 장면은 에로스와 타나토스를 결합시키는 데 탁월한 감각이 있다고 상찬 받아온 안무가답게 성적 긴장과 어두운 절망으로 가득하다. 작품이 초연된 것은 1974년, 초연 당시 이 장면이 무대로 올라간 것은 대단한 파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해 국립발레단이 크리스티안 슈푹 안무의 ‘안나 카레니나’를 공연했을 때 주인공들이 육체적으로 사랑을 나누는 장면에 대한 무대 위의 표현이 그렇게 직접적이어야 했는가 하는 비판이 제기되었으며, 지난 4월 국립오페라단이 올린 뱅상 부사르 연출의 ‘마농’에서 3막의 유배지 장면은 마농의 수난이 생략된 채 곧장 그녀의 죽음으로 달려간다. 

예술작품은 해당 예술작품이 생산된 사회와 별도로 존재할 수 없다. 사회의 공기는 쉬지 않고 흐르고 변하며 그에 따라 예술작품도 변화한다. 전통이라서, 과거에 만들어져서, 원작자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같은 것은 예술작품이 과거의 모습대로 보존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없다. 이는 변화하는 사회의 공기를 인지하지 못하는 후대의 창작자가 내놓는 안일한 변명일 뿐이다. 과거에 괜찮았거나 그래도 되었던 것은 그것이 옳았기 때문이 아니라 틀린 줄 몰랐기 때문이다. 그땐 맞고 지금은 틀린 것이 아니다 그땐 몰랐고 지금은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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