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젠더 정체성을 ‘정신 및 행동 장애’로 분류했던 WHO가 30년 만에 이를 모두 삭제했다. 사진은 트랜스젠더의 권리를 상징하는 깃발(Transgender Pride flag). ⓒFlickr
트랜스젠더 정체성을 ‘정신 및 행동 장애’로 분류했던 WHO가 30년 만에 이를 모두 삭제했다. 사진은 트랜스젠더의 권리를 상징하는 깃발(Transgender Pride flag). ⓒFlickr

WHO, ‘국제질병분류’ 최신판서

‘트랜스젠더는 정신질환’ 문구 삭제

“사회적 낙인 유발…더 나은 의료서비스 필요”

성소수자 단체 “역사적 결정 환영...한국도 발맞출 때”

트랜스젠더의 성 정체성을 ‘정신질환’으로 분류했던 세계보건기구(WHO)가 ‘국제질병분류’에서 관련 항목을 모두 삭제했다. 트랜스젠더 정체성은 치료받아야 할 질병이 아니며, 이들이 겪는 스트레스에 대한 의료 지원이 필요하다고도 강조했다. 1990년 개정 이후 약 30년 만의 변화다.

앞서 WHO가 1990년 발간한 국제질병분류 제10판(ICD-10)은 트랜스젠더가 겪는 정신적인 고통을 이유로 트랜스젠더 정체성에 ‘성주체성장애(Gender Identity Disorder)’, ‘성전환증(Transsexualism)’이라는 진단명을 붙이고 이를 ‘정신 및 행동 장애’의 하나로 분류했다. ‘과학적으로 옳지 않다’, ‘트랜스젠더에 대한 사회적 낙인과 편견을 강화한다’는 비판이 잇따랐다.

19일 WHO는 올해 발간될 제11차 개정판(ICD-11)에서 이들 항목을 모두 삭제했다고 밝혔다. 또 ‘성별불일치(Gender Incongruence)’ 항목을 정신장애가 아닌 ‘성적 건강 관련 상태(Conditions related to Sexual Health)’라는 범주로 옮겼다. 성별불일치란 “개인이 경험하는 성별과 지정된 성별간의 지속적인 불일치”를 뜻한다.

WHO는 “(트랜스젠더 정체성은) 더는 정신장애가 아니라는 점은 명백하며, 그렇게 정의하는 일은 트랜스젠더에 대한 엄청난 사회적 낙인을 유발할 수 있다”며 트랜스젠더에 대한 사회적 인식 개선과 더불어 더 나은 의료서비스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한국의 성소수자 단체들도 이번 개정을 환영했다.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은 19일 논평을 발표하고 “이번 ICD의 개정은 트랜스젠더 정체성을 바라보는 근본적인 관점의 변화”라며 “트랜스젠더 정체성에 대한 더 이상의 낙인과 편견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트랜스젠더가 성적 건강을 향유하기 위해 필요한 보건의료 환경을 제공받을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WHO의 ‘트랜스젠더는 정신장애’ 분류는 그동안 미국 등 일부 국가에서 트랜스젠더에 대한 의료보험 거부, 고용 차별 등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악용됐다. 최근 여러 국가들이 이를 깨고 법제도를 바꾸기 시작했다. 덴마크 정부는 지난해부터 자국 보건부 가이드라인 중 ‘정신질환’ 목록에서 트랜스젠더를 삭제했다. 플레밍 묄러 모르텐센 덴마크 사민당 보건 부문 대변인은 당시 “트랜스젠더를 정신질환자로 낙인찍는 일은 단순한 행정적 분류를 넘어 실제 사람들의 삶에 피해를 끼친다”며 WHO의 변화를 촉구하기도 했다. 몰타 정부는 2016년 유럽 국가 중 최초로 성적지향·성별정체성을 강제로 교정하려는 소위 ‘전환치료’를 금지하고 위반 시 처벌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지난 4월 트랜스젠더의 건강권을 보호하기 위한 전문 의료 서비스를 도입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번 공개된 WHO의 국제질병분류 개정안은 WHO 각 회원국들이 번역과 국내 이행을 준비할 수 있도록 공개된 사전 버전으로, 약 1년의 현장 검사를 거쳐 2019년 5월 WHO 총회에서 최종 소개될 예정이다.

WHO의 가이드라인에 맞춰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를 제·개정하는 통계청은 “ICD-11의 반영은 2025년에야 이루어질 것”이라고 밝혔다.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은 한국 정부의 조속한 대처를 촉구하며 ▲성별정정 요건의 완화를 포함해 법제도 전반의 개정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전환치료 금지 등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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