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Metoo)라는 문화가 이제는 자리를 잡아가는 것 같다. 그런데 아직도 행방이 묘연한 것은, “그래서 피해자는 그 이후로 어떻게 살고 있나” 라는 문제다. 폭로 이후에 여느 내부고발자가 그러하듯, 고립되고 비난을 당하며 생계를 위협당하는 일들은 벌어지지 않는지 이 부분을 면밀하게 관찰할 시점이 바로 지금이다.

언론사가 피해자를 보호하는 역할을 해줄 의무는 없기 때문에 피해자는 자신을 홀로 방어하는 상황이 되고, 그러면서 피해사실을 드러내는 인물에게 2차 가해가 일어난다. 그러기에 더 큰 피해를 보게 되면 일상조차 잃어버릴까, 주저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꼭 주목해봐야 하는 것이 있다. ‘가해자를 옹호하는 살집은 어디에 붙어있는가’다. 뼈는 가해자인데 살은 어디에 있을까. 가해자만 덩그라니 있는 상황이면 미투 운동으로 사회가 변화하고도 남는다. 워낙 피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뼈를 감추는 살들이 어디선가 옹송그리고 있다가 나타나 문제를 희석시킨다.

미투를 하면 피해자는 고립되고, 피해자의 진의가 돈을 비롯한 이익을 목표로 둔 것으로 시나리오가 설정되며, 피해자는 중간에 지쳐 관두거나, 합의 하거나 상처받은 나머지 입을 다물기 시작한다. 그러면 ‘거봐라 저 사람은 가짜다’, ‘얼굴을 드러내라’ 등의 비난이 따라온다.

가해자라는 뼈에 단단한 살집으로 작용하는 개체들은 어떤 이름을 달고 있는가. 역할도 각양각색 이었다. 과거에 성희롱이나 성추행을 덮고 지나가는 걸 필자가 직접 본 분들이 지금은 소위 ‘페미니스트’라고 소개되거나, 미투 운동 바람을 타고 여러 양상으로 명성과 수익을 다시 한 번 쌓고 있는 모습도 봤다. 필자의 눈앞에서 후배를 성추행한 사람이, 매체에 나와 성폭력과 아동학대에 대해 의견을 말하는 것도 봤다. 자칫 ‘남성 페미니스트’로 오해할 법한 훌륭한 외견을, 이 바람을 타고 잘 갖추고 계시더라. 이미 몇 년 전에, 여성 의뢰인을 성희롱하고 겁박한 남성 변호사가, 모 진영 지지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 것도 이미 본 상태라, 이러한 운동의 수혜자는 피해자가 아니라 엉뚱한 인물들이라는 데에 어렵지 않게 생각이 가 닿았다.

미투의 당사자가 다시 한 번 고립되고, 결과물을 손에 못 쥐는 이 상황에서, 누가 실질적인 이익을 얻어 가는지, 지금 다시 주목하고 기록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이 시절에, 국가는 이 추악한 폭력의 뼈와 살을 얼마나 걸러내는 지, 걸러낼 주체가 국가의 이름을 갖고 존재하는 지도 같이 들여다 보자. 여성에게 국가가 있고, 여성에게 정치적 진영이 있는가. 투표할 때만 드러나는 여성인권이라는 유행가, 이거 마치 사기극의 배경음악 같다. 미투운동 으로 인해, 이 나라, 변모하는 중인 것이 확실한가.

성폭력은, 폭력이다. 관계가 아니라, 폭력이다. 사랑이 기반된 관계가 아니면, 그것이 폭력이다. 단순히 성관계를 가졌다고, 그것이 동의절차를 거쳤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 여성에게만 작용하는 폭력도 아니다. 여성문제 아니고 인권문제다. 진영과 성별이라는 이유로, 피해자냐 아니냐를 구분한다고 해서, 자신의 안위가 실제로 보호되는 것도 아니다. 인권은 내가 인간인 이상 나도 영향을 받는 항목이기 때문에, 여성인권이 남성인권이 되고, 노인인권이 되고, 장애인 인권이 되고, 근로자 인권이 된다.

어쩌면 미투 피해자들은, 이렇게까지 다각도로 고립이 될까. 이제는 인권을 탄압당한 피해자들이 폭로 이후에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기록을 하며, 망각하지 않도록 장치를 마련해야 할 시점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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