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시아 ⓒ김경애 편집위원
후쿠시아 ⓒ김경애 편집위원

더위를 싫어하는 꽃

더위 견디고 피어나는 꽃

꽃들은 저마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분명하다. 기온이 높은 열대지방에는 화려하고 예쁜 꽃들이 많아, 우리나라에도 여름이 되면 꽃이 더 많이 잘 필 것 같다는 선입견이 있지만 더운 날씨를 싫어하는 꽃들도 있다. 날이 더우면 죽어버리는 대표적인 꽃이 후쿠시아다. 영국 유학시절 캠퍼스 공터에 야생화처럼 여기저기 피어있는 후쿠시아를 처음 봤다. 이렇게 예쁜 꽃이 세상에 다 있나 싶어 매일 들여다보다가, 꽃이 시들어 떨어질 때마다 주워서 모아 말렸다가 한국으로 돌아올 때 가져왔다.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드릴 선물이었다. 아버지 산소에 뿌려드렸다. 꽃을 좋아하셨던 아버지가 예쁜 후쿠시아는 한 번도 못 보셨지만 좋아하셨을 것 같다. 우리나라에도 후쿠시아가 어느새 들어와서 봄에 사고 또 샀다. 그런데 꽃이 화려하게 주렁주렁 달려 마루청 앞에 두고 매일 보면서 물도 열심히 주지만 점점 죽어갔다. 장날마다 여는 단골 꽃가게 아주머니가 싸게 주시더니 아마 죽어가는 꽃을 나에게 싼값에 팔았나보다 하고 단골 꽃장수를 의심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우연히 후쿠시아가 더우면 죽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작년에 다시 후쿠시아를 세 그루 샀다. 바깥이 짙은 붉은 색이고 속은 보라색인 것 한 그루와 겉은 흰색이고 속이 붉은 색 두 그루를 샀다. 한여름에는 우리 집 마당에서 시원한 곳을 찾아 옮겨보기도 하고 한낮에 햇볕을 너무 많이 쬐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키웠지만 아니나 다를까 나의 정성에도 불구하고 다 죽었다. 올해 또 샀다.

한련화를 처음 본 것도 영국에서였다. 영국 가정집은 물론 특히 팝에는 바구니에 화려하게 꽃을 키워 걸어놓는데, 한련화는 페추니아와 더불어 바구니에 담는 주요한 꽃이다. 여름에도 기온이 좀처럼 30도 이상 올라가지 않아 우리나라 늦가을 날씨 같았던 영국에서 한련화는 여름 내내 피어 있었다. 양재 꽃시장에서 한련화를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사서 마당에 심고 키웠다. 그러나 한여름에 다 죽어버렸다. 다시 봄이 와서 또 사서 심었다. 우연히 씨앗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갖가지 화려한 색으로 폈던 꽃 하나하나가 줄무늬의 홈이 있는 밝은 연두색의 콩같이 생긴 씨앗 두 개 또는 세 개가 돼 6월 말에서 7월 초가 되면 익어서 씨앗을 마당에 흘려놓는다. 첫해에 몇 개를 주워 그다음 해에 심었더니 꽃이 폈다. 꽃으로부터 제법 많은 씨앗을 수확해 올해는 마당 여기저기에 심고 친지들에게 나눠줬다. 그런데 한련화는 기온이 30도 이상 올라가면 기운을 못 차리고 시들해져 버린다. 이때 뽑아내지 말고 그늘을 만들어주고 아침저녁으로 물을 주면서 더위를 식혀주면, 9월 찬바람이 나기 시작할 때 일제히 다시 꽃을 피운다. 첫서리가 내릴 때까지 정원을 아름답게 장식해준다.

 

둥글레꽃 ⓒ김경애 편집위원
둥글레꽃 ⓒ김경애 편집위원

자스민도 더우면 꽃을 피우지 않는다. 큰 나무가 그늘을 만들어 주는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두면 한여름이 되기까지는 꽃을 피우고 향기를 선사하다가 더위가 기승을 부리면 꽃을 피우지 않는다. 그러다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짙은 보라색의 작은 몽우리를 또다시 맺는다. 이태리봉선화도 기온이 높고 햇볕이 쨍쨍하게 내려 비추는 것을 싫어해서 한여름이면 시들시들하다. 그늘을 지워주고 물을 자주 주면 서리 내릴 때까지 계속 꽃을 피운다. 서리 내리기 직전 파서 화분에 심어 실내에서 잘 보관하면 다음해 다시 마당에 심어도 된다.

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여름이 무르익어갈 때쯤에 피어나서 늦여름에 우리 마당을 장식하는 꽃은 다알리아다. 영국으로 유학 가서 처음 살았던 곳이 루이스라는 작은 읍이었다. 바로 이 루이스에 다알리아만 심어놓은 정원이 있었다. 이 정원에 가기 전에는 어릴 적 흔히 본 다알리아가 우리나라 꽃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사실이 아니어서 놀랐고 더욱 놀란 것은 그 종류가 엄청나게 다양하고 예쁘다는 것이었다. 다알리아는 꽃 모양이 촌스러운 것 같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날 다알리아에 관한 좁은 식견과 편견이 한 방에 날아가 버렸다.

한여름을 장식하는 또 다른 꽃은 백일홍이다. 백일홍은 백일 동안 피어있다고 해서 백일홍이다. 백일홍은 서울의 강변 산책길에 아름답게 피어있다. 내 휴대전화에서 한동안 나를 대신한 것이 바로 강변에서 찍은 백일홍 사진이었다. 백일홍 꽃은 여러 색깔에 모양도 다양해 어우러져 있는 모습이 아름답다. 또 한 송이 한 송이마다 켜켜이 박혀있는 꽃잎들을 보고 있노라면 절로 감탄이 나온다. 우리마당에는 백일홍 꽃씨가 떨어져 절로 피어나곤 했는데 어느새 사라지고 없다. 하수도 공사 후 공터가 된 마당 한켠에 백일홍 씨앗을 1000원어치 사서 뿌려 놓았더니 싹을 틔우고 무럭무럭 자라 꽃을 피웠다. 올해 여름에는 그 씨앗이 떨어져 싹을 틔우고 꽃이 피기를 기다리고 있다.

채소꽃

우리는 채소 뿌리나 잎 그리고 열매를 채취해 식재료로 써서 채소의 꽃은 관심 밖에 있다. 그런데 채소도 저마다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채소 꽃 중에 대표적인 꽃이 메밀꽃과 유채꽃일 것이다. 이효석의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으로 강원도의 메밀꽃밭은 관광명소가 됐고, 제주도의 유채꽃밭 풍경은 채소 꽃의 아름다움을 대변하고 있다. 메밀이나 유채뿐만 아니라 다른 예쁜 채소꽃도 많다. 참깨꽃, 감자꽃, 땅콩꽃, 부추꽃, 달래꽃, 둥글레꽃, 더덕꽃 등 이 예쁜 채소 꽃들을 시골 와서 처음 보고 새로운 발견이나 한 것처럼 기쁨을 만끽한다. 부추꽃은 활짝 피면 작은 흰 별들이 뭉쳐있는 것 같다. 더덕꽃은 푸른빛으로 작은 종 모양의 끝이 보라색을 띤다. 참깨꽃은 종 모양의 꽃이 주렁주렁 이어진다. 둥글레꽃은 잎 아래 조그마한 흰 구슬을 여러 개 달고 있는 모양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채소 꽃은 도라지다. 단아하고 기품 있는 모습에 반해 우리 마당 제일 한가운데 씨앗을 뿌렸더니 해마다 흰색과 보라색의 아름다운 꽃이 나를 기쁘게 했다. 작년 추석에 도라지 뿌리를 캐서 나물로 만들어 차례상에 올렸다. 덤으로 얻은 행복이었다. 어릴 때 호박꽃이 예쁘지 않다고 “호박꽃도 꽃이냐”면서 누군가를 비하할 때 호박꽃에 비유했던 일이 기억난다. 호박꽃을 볼 때마다 이 말이 생각나 미안하다. 예쁘고 노란 호박꽃이 지면서 그 아래 봉곳이 호박을 맺어 점점 커진다. 이탈리아에서는 호박꽃 속에 치즈를 넣어 튀겨 먹어 호박꽃이 귀한 식재료라는데 따기가 아까워 아직 해먹어보지 못했다. 호박꽃도 예쁘기만 하다.

 

왕마늘꽃 ⓒ김경애 편집위원
왕마늘꽃 ⓒ김경애 편집위원

모든 채소에는 꽃이 있지만 꽃을 피워 본 적 없는 채소 꽃이 있다. 양파 꽃과 마늘 꽃이 그렇다. 채소 꽃은 사람들이 그 채소의 어떤 부분을 취하느냐에 따라 운명이 바뀌는데, 양파와 마늘은 뿌리를 튼실하게 키워 수확하기 위해 꽃을 피우지 못하게 한다. 양파 밭에 꽃대를 죽 올려서 하얀 꽃을 맺는 양파는 ‘숫놈’이라고 하면서 “양파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꽃이 피면 속에 딱딱한 심이 생겨서 양파로 먹을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꽃이 피기도 전에 뽑혀버린다. 작년 여름 산책길에서 우연히 논두렁에서 영국 정원 관련 책에서 늘 보던 꽃과 비슷한 보라색의 예쁜 꽃을 발견했다. 주워 와서 물병에 꽂았다. 동네 아지매들에게 이 예쁜 꽃이 왜 논두렁에 있는 것이냐고 물어보니 왕마늘의 마늘쫑을 따주지 않아서 핀 꽃인데 누군가가 마늘만 떼어가고 버린 것이라고 한다. 마늘 꽃이 있는 줄 처음 알았다. 뿌리인 마늘도 실하게 성장하게 하기 위해서는 꽃을 피우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한다. 시장에서 봄이면 파는 마늘쫑이 바로 마늘이 꽃을 피우기 위해 올린 꽃대이다. 봄에 마늘쫑을 빼거나 마늘쫑 위를 잘라버려 꽃을 못 피우게 하는 것이 중요한 농사일이다. 나도 그간 마늘쫑을 열심히 빼주고 얻어, 나눠주고 또 볶아먹고 장아찌 만들어 먹었다. 그 마늘쫑이 금지된 꽃의 줄기였던 것이었다. 마늘 꽃! 피워 본 적이 없는 꽃이었다. 아름다운 왕마늘 꽃을 피워보는 것이 올해의 나의 과제다. 이웃으로부터 얻은 왕마늘 알을 지난 11월 앞마당에 심고 오랫동안 기다렸다. 영국 정원 부럽지 않은 보라색 꽃이 피어났다.

뿌리를 먹는 감자와 땅콩도 꽃이 맺히면 따버린다. 예쁜 꽃들이 사라져버린다. 부추는 뿌리를 두고 계속 잎만 잘라 먹는 채소로, 계속 잎을 잘라내기 때문에 부추도 꽃대를 올리지 못한다. 달래는 뿌리째로 채취해서 먹는다. 그래서 그 아름다운 부추나 달래의 꽃을 보기가 쉽지 않다. 파나 상추도 꽃이 피면 억세져서 더 이상 먹지 못해 꽃이 피기 전에 다 뽑혀 꽃을 피우는 것을 허락받지 못한다. 꽃이 중요한 채소는 열매를 먹을 경우다. 가지는 보라색 꽃을, 토마토와 오이와 호박은 노란색 꽃을, 고추는 흰색 꽃을 피운다. 이 꽃들이 열매로 커나간다. 그러나 실하고 풍성한 열매를 얻기 위해 잎을 버려야 하는 경우가 있다. 가장 심하게 잎을 따버리는 채소는 토마토다. 토마토는 잎을 내면 그 잎이 금방 가지로 뻗어 나가는데, 토마토는 오직 한 가지만 남기고 잎을 족족 따버려야 열매가 많이 맺힌다. 동네 근처에 있는 토마토를 키우는 비닐하우스를 들여다보면 잎은 거의 없고 줄기가 뱀처럼 바닥에 똬리를 틀고 있고, 거기에 토마토가 주렁주렁 열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도 우리 텃밭에 심어놓은 토마토 잎을 아침마다 열심히 따준다.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채소 꽃은 씨앗도 맺는다. 어쩌다 잘리지 않았거나 뽑히지 않은 부추와 달래가 꽃대를 올려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그 꽃에서 씨앗이 맺혀 흩어진다. 파나 상추도 씨앗을 받기 위해 몇 포기를 남겨 두고 꽃이 피는 것을 허락한다. 둥글레는 그 아름다운 꽃이 푸른 씨방을 만들어 영글어 터져 씨앗을 여기저기에 뿌리고 또다시 새싹을 틔운다. 채소의 꽃들은 소중하고 또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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