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소셜벤처 액셀러레이터 SOPOONG 

국내 최초 젠더 관점의 투자 보고서 발간 

5단계 투자 과정서 젠더 요소 추가 

“투자 과정서 여성, 남성 아닌

창업가 개인의 특성 고려해야” 

 

왼쪽부터 유보미 심사역, 고영곤 PR매니저, 홍지애 액셀러레이팅 매니저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왼쪽부터 유보미 심사역, 고영곤 PR매니저, 홍지애 액셀러레이팅 매니저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남성 위주의 투자 관점이 형성된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여성 창업가들이 살아남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벤처투자계 90% 이상은 남성으로 구성돼 있다. 한국벤처캐피탈협회에 따르면 2015년 기준 여성 투자 심사역은 57명으로, 전체 747명 중 7.1%에 불과하다. 여성창업 지원기관도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분위기 속 성 평등적 관점에서 투자 프로세스를 만들고 이를 적용한 투자사가 있다. 소셜벤처 전문 투자사 에스오피오오엔지(SOPOONG)는 지난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젠더 관점의 투자’ 보고서를 발표했다. 실제로 SOPOONG가 5단계에 걸친 모든 투자 과정에 ‘젠더’ 요소를 추가했더니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다. 2017년 하반기 투자가 결정된 팀 가운데 단 한 명도 여성이 없었지만, 올해 상반기엔 투자가 결정된 기업의 30%가 여성 창업 기업으로 나타났다. 작년 하반기와 비교해 10%P 이상 오른 수치다.

SOPOONG는 사회문제를 비즈니스로 해결하는 스타트업에게 씨드투자와 액셀러레이팅을 제공하는 소셜벤처 ‘인큐베이터’다. 소셜벤처라는 개념이 생소하던 2008년부터 쏘카, 텀블벅 등 30개 소셜벤처를 발굴해 총 기업가치 4426억원을 달성했다. 상·하반기 정기투자를 통해 다양한 분야의 소셜벤처에 투자하고 있다. 

국내 최초로 ‘젠더 관점의 투자’ 보고서를 만들고 이를 심사에 적용한 SOPOONG의 고영곤 PR 매니저, 유보미 심사역, 홍지애 액셀러레이팅 매니저를 만났다. 이들은 “젠더편향적인 투자생태계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투자자와 액셀러레이터는 물론, 창업가까지도 ‘젠더 렌즈’를 끼고 자신의 역할을 다시 바라볼 것을 제안한다”고 강조했다.

 

유보미 심사역은 “큰 틀에서 젠더 관점의 투자를 시도해본 뒤 의견을 제시해준다면 기울어진 투자 운동장을 함께 개선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유보미 심사역은 “큰 틀에서 젠더 관점의 투자를 시도해본 뒤 의견을 제시해준다면 기울어진 투자 운동장을 함께 개선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 보고서에 “이 리포트는 업계의 동료들에게 보내는 제안서이자 호소문”이라는 표현이 있다. 보고서를 발간한 지 3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는데, 업계에 유의미한 변화가 있었다고 보나.

유보미 심사역(이하 유): 크고 작은 투자 기관에서 ‘보고서 잘 봤다’ ‘이런 화두를 던져줘서 고맙다’는 피드백이 왔다. 보고서를 통해 기존 투자 프로세스를 점검할 수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업계 전반에 이런 흐름이 확산되기까진 아직 갈 길이 멀다. 투자사마다 바라보는 관점과 프로세스가 다르다. 따라서 젠더 관점의 투자 프로세스는 특정한 방식으로 정형화할 수 없다. 큰 틀에서 시도해본 뒤 오히려 의견을 제시해준다면 기울어진 투자 운동장을 함께 개선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 전 세계적으로 ‘다양성’이 기업의 주요 과제와 가치로 통용되고 있다. 보고서가 나오게 된 것도 이런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 다양성이라는 이슈가 급부상하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젠더 관점의 투자를 위해 어떤 프로세스를 구축하고 이를 적용해 발표한 곳은 없었다. 여성, 남성이 아닌 창업가 개인의 특성이 고려되는 투자 생태계를 만들고 싶었다. 보고서에서 사회적 성인 ‘젠더’라는 개념을 설명한 이유다. 이런 사례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다른 투자자들한테는 자극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고영곤 매니저(이하 고): 실제로 해외에선 여성과 소녀를 위한 서비스, 여성 창업가를 육성해야 한다는 내용을 더 많이 강조하고 있다. 다만, 이를 국내 사정에 맞게 톤 다운(tone down)시킨 경향이 있다. 해외 기관 리포트의 개념적인 부분을 참고했지만 과정상으로는 참고할만한 곳이 많지 않았다. ‘젠더 관점의 투자’라는 결과 값을 만들기 위해 시작된 실험적인 결과물이다.

고 매니저는 “지난해 10월 미국에서 열린 ‘소캡 콘퍼런스(SOCAP‧Social Capital Markets)’를 통해 ‘젠더관점의 투자’라는 용어와 맥락이 있는 것을 알게 됐다”며 “갔다 온 뒤 보고서를 작성하기까지 6개월 정도가 걸렸다”고 했다. 소캡은 세계 최대의 임팩트 투자 콘퍼런스를 뜻한다.

- 젠더 관점의 투자 확산으로 어떤 점을 기대하나.

: 사회 곳곳에서 기업이 만들어낼 수 있는 젠더 관점의 변화를 기대했다. 소셜벤처에 투자하는 이유는 사회 말단까지 기업이 전할 수 있는 임팩트가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기업의 CSR(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자선단체 등과는 다른 방식으로 가치사슬 면에서 큰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를 위해 ‘성별과 관련 없이 투자가 이뤄져야 한다’는 메시지 전달을 위해 노력했다.

- 젠더 관점의 투자를 위해 여성창업 기업 할당제를 실시하고 있다. ‘역차별’이라는 말도 나올 텐데. 

: 투자 과정에서 특정성별에 특혜를 주거나 역차별로 오해를 사진 않을까 우려도 없지 않다. 그럼에도 내부적으로 할당제를 실시하는 이유는 토론 과정에서 여성 창업가들에게 불리하게 기울어져있는 투자 운동장을 바로잡기 위해 좀 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SOPOONG는 2018년 상반기 투자부터 젠더 관점의 투자 가이드라인을 전면 적용했다. 투자 결정 시 최소 1개 이상의 여성 대표 기업이 포함되도록 했으며, 서류 평가 시 대표를 포함한 구성원 전체의 성별을 고려한 심사 원칙을 적용했다. 사전 면접 시엔 ‘젠더 관점의 관찰자’가 참석한다. 투자 심의 과정에선 ‘다양성과 젠더 렌즈’ 항목을 추가해 제품 혹은 서비스와 가치사슬, 업무 환경과 거버넌스 측면에서 젠더평등을 지향하고 있는지 검토하도록 했다.

 

고영곤 매니저는 실제로 여성 창업가의 사전 액셀러레이팅 시 젠더 관점의 관찰자 역할로 참석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고영곤 매니저는 실제로 여성 창업가의 사전 액셀러레이팅 시 젠더 관점의 관찰자 역할로 참석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 젠더 관점의 ‘관찰자’ 역할과 효과는.

: 투자를 유치하려는 대표자와 투자사의 심사역 간에는 의도치 않은 권력 관계가 형성된다. 평가자와 피평가자로 구분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보다 객관적인 평가와 젠더 감수성에 대한 긴장감을 유지하기 위한 장치로, 여성 창업가의 사전 액셀러레이팅 시에는 빠짐없이 참석했다. 면접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진 않는다. 다만 젠더편향적인 발언이 있을 경우 문제 되는 부분에 대한 의견을 전달하며, 사전 액셀러레이팅이 종료된 후 내부 피드백을 제공한다.

- 젠더 관점의 투자를 위해 경계해야 할 편견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나.

홍지애 매니저(이하 홍): 기혼 여성이 가사나 육아 대부분을 전담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업무 투입시간이 낮을 거라고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가사나 육아 전담율이 높은 것은 일‧가정양립을 위한 제도와 조건이 미비한 것이지, 여성의 역량 부족 때문이 아니다. 이는 여성만이 감당해야 할 몫이 아닐뿐더러, 기혼 여성이 모두 출산을 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사업 평가 시 고려할 사항이 아니다.)

: 실제로 리포트 작성을 위해 여성 창업가들을 인터뷰했는데 공통적으로 투자자들한테 ‘아기는 언제 가질 것인지’ ‘살림은 누가 하는지’ 등의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투자자의 경우 ‘비즈니스의 지속성’ 관점으로 이런 질문을 한다. 질문 자체가 잘못됐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 투자자뿐만 아니라 창업자의 젠더 관점을 강조하면서 ‘이지앤모어’의 예를 들었다.

: 이지앤모어는 여성들에게 월경컵 선택권을 넓혀주고 제품 구매 시 발생하는 포인트로 청소년에게 월경 제품을 제공한다. 조직 구성원 모두가 여성이기도 하다. 이지앤모어 뿐만 아니라 자란다, 위커넥트, 아빠랑 가자 등도 좋은 사례다.

이지앤모어는 여성들의 건강하고 현명한 월경 생활을 돕기 위해 제품과 정보를 제공하는 미디어 커머스다. 제품과 서비스가 생산되고 전달되기까지 만들어지는 모든 과정인 가치사슬에도 젠더 관점을 고려하고 있다.

- 여성 심사역의 수를 늘리는 것도 젠더 관점 투자의 한 형태가 될 수 있다. 이를 늘리기 위한 방안은.

: 여성 파트너, 심사역이 많아진다는 것은 젠더 안경을 낄 수 있는 사람이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아직까지 수치적으로는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다. 좋은 선례의 여성 파트너, 심사역분들이 많이 나와 ‘롤모델’이 되어 준다면 많은 주니어 심사역이 탄생하지 않을까.

: 젠더 관점으로 심사해야 하는 팀들이 많아질수록 투자사에서도 여성 심사역을 많이 뽑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적 흐름이 이동할수록 투자사들도 어쩔 수 없이 따라올 수밖에 없다. 선순환이다.

 

홍지애 액셀러레이팅 매니저는 “투자자와 액셀러레이터, 창업가 모두 젠더 렌즈를 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홍지애 액셀러레이팅 매니저는 “투자자와 액셀러레이터, 창업가 모두 젠더 렌즈를 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 일부 여성 창업가에겐 사회적인 부분을 짊어지고 가야 한다는 ‘착한 아이 콤플렉스’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 여성의 생애주기와 부모세대의 행동을 보고 학습한 효과들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본다. 사회적으로 약자의 위치에 있다 보니 그러한 비즈니스의 필요성을 느끼고, 결국 소셜벤처로 오게 되는 거다. 창업가부터 이러한 편견과 압박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 투자 과정에서 창업가들이 고려해야 할 팁을 한 가지 준다면.

: 가장 중요한 건 ‘과연 이 팀이 이 일을 해낼 수 있는가’다. 투자자들은 스타트업 비즈니스 모델이 계속 유지될 거라고 확신하지 않는다. 특히 씨드(Seed) 단계에선 팀만 보고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팀의 중요성이 크다. 이 팀이 미션을 위해 얼마나 뛰어 봤는지, 해낼 수 있는 의지와 실행력은 어느 정도인지 스토리와 인사이트를 진정성 있게 어필해야 한다.

- 정부 차원에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나.

: 창업 프로그램을 운영할 때 여성 창업 비율이 한쪽으로 기울지 않도록 다양성을 고려해줬으면 한다. 특히 테크(Tech) 분야의 여성 창업가 비율이 현저히 낮은데 이런 분야의 여성 창업가가 많이 탄생할 수 있도록 투자나 장려 지원금이 생기면 좋겠다. 사실 우리도 그런 팀에 투자하려고 하지만 찾아보기 힘들다. 민간에서 하지 못하는 부분을 정부 차원에서 끌어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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