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Metoo) 운동은 ‘평범’하게만은 보이는 남성적 삶이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를 만들었다. 남성적 삶이 중심이 돼 여성적 삶을 타자화하고, 남성적 욕구의 충족을 위해 여성적 삶은 대상화·수단화되는 현실을 #미투 운동이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런데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면전에서 직접 지적당하는 경우 일단 부인하고 불쾌해 하는 속성을 갖고 있다. 미세먼지가 무섭다고 어린이집에서 아이들 산책도 제대로 못시키는 날에 아이를 데리러 온 부모는 아무 생각 없이 엔진공회전을 하고 있다. 이를 보고 뭐라고 하면 미안해하거나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오히려 불쾌해하면서 무슨 지적질이냐는 반응이다. #미투 운동이 드러내는 평범한 남성의 악마성에 대한 반응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평범하게 살아온 내 인생을 두고 (잠재적) 가해자라는 지적질이 못마땅하기만 하다.

그래서 다수 남성들이 “우리 모두를 (잠재적) 가해자로 취급한다”는 불쾌한 반응과 함께 이른바 펜스 룰(Pence Rule)로써 대응한다. 일부 ‘나쁜 놈’의 소행에 불과한데 공연히 여자들이 나서서 문제를 키우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이러한 현실에서 살아남는 길은 그런 여자들 피해서 ‘조심조심’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살다가도 긴장의 끈을 놓는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아예 여자들과의 사회적 관계를 맺는 상황은 만들지 않는 것도 좋다고 여긴다. 남성지배적 사회구조에서 여성을 배제하더라도 얼마든지 사회생활이 가능하니 쉽게 실천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사귀는 여자는 내가 원하는 것은 모두 받아주는 ‘착한 여자’이길 바란다.

너무나 당연하게 내면화했고 그래서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면서 경험한 그 모든 ‘자연스러움’을 잘못된 것이기 때문에 되돌아보면서 반성해 보자는 지적이 기분 나쁠 수 있다. 그러나 순간의 기분나쁨이 내 안의 악마성에서 벗어나서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그래서 행복한 삶으로 가는 인간관계를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 한번쯤 기분이 나빠도 되지 않을까? 그리고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일부 남성의 개인적 일탈이 아닌 가부장적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가져온 결과로서 성폭력을 받아들이는 성찰적 고민으로 사고의 과정을 이어가면 어떨까?

생물학적으로 다르게 타고 난 몸에서 나온 남성다움이 여성에게 인간적 매력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적 매력을 폭력적 행위의 원천으로 만드는 가부장제의 구조적 모순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을 보자는 이야기다. 일부 남성의 빗나간 행동으로서 성폭행을 보고 싶은 자기 부인·부정의 기제가 작동함을 인정해 보자. 이렇게 내 모습을 직시하는 순간 펜스 룰로써 배제했던 세상 사람들에게 말 걸기가 가능해질 것이다. 그러면 내가 배제했던 사람들의 생각과 상황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내가 그 사람들에게 더욱 평등한 관계에서 이해받을 수 있는 계기도 생겨난다.

학교 강의 시간에 무심코 사용한 용어, 말 한마디를 성차별적이라고 지적해 주는 학생들이 있다. 당장 면전에서 하는 경우도 있고 시간이 흐른 후 문자 메시지를 보내기도 한다. 그럴 때 기분 나쁨까지는 아니지만, 성평등 정책화를 연구하는 입장에서 당황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곧 잘못을 감추기 위한 변명이 필요하지 않을만큼 마음이 편해진다. ‘지적질’이 나를 변화시키고 더 나은 세상을 볼 수 있는 안목을 주기 때문이다. 지금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은 ‘시끄러운 여자들’이 아니라 남성다움에 악마성을 심어놓은 가부장적 사회구조다. 이렇게 생각을 바꾸면 남성다움, 여성다움을 인간적 매력으로서 함께 나눌 수 있는 행복한 세상에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미투 운동이 남성에게 말하고 있다. “세상을 함께 바꾸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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