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생각한다] 성희롱 증거 있어도 ‘경범죄’ 벌금 10만원?
[이렇게 생각한다] 성희롱 증거 있어도 ‘경범죄’ 벌금 10만원?
  • 대학생 A
  • 승인 2018.06.06 08:55
  • 수정 2018-06-14 20: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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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거주하는 대학생 A씨(가명)가 지난 5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본인 동의하에 일부 수정해 게재합니다.

 

어젯밤 지하철 성신여자대학교입구역 내에 앉아있는데, 40대로 보이는 남성이 다른 자리를 두고 굳이 내 옆에 앉았다. 내게만 들리게 “자위하고 싶다, 딸딸이 치고 싶다, 만지고 싶다, 어차피 너도 하잖아. 똑같은 거야 같이 하자”라고 했다. 내가 반응하지 않자 조금 뒤 “같이 술 마시러 가자, 외롭다”며 직접 말을 걸어왔다.

평소에 스마트폰 음성 메모 앱을 켜두고 다니는 습관 때문에 이 부분이 정확하게 녹음됐고, 경찰에 신고했는데, 직접적인 접촉이 없어서 처벌 항목이 없으며, 굳이 처벌한다면 ‘불안감 조성’으로 경범죄 처벌, 1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물 것이라고 한다.

그 사람이 무임승차를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경찰은 “성희롱이나 성추행으로 처벌하기는 어려울 것 같고 무임승차죄로 처벌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내게 한 언행보다 무임승차 쪽에 처벌의 초점이 맞춰졌다. 아무래도 무임승차의 처벌이 성희롱보다 훨씬 커질 모양이다. “그럼 이 사람이 내게 한 언행에 대해 어떤 처벌도 할 수 없느냐”고 반복해 묻자, 그제야 나온 처벌이 ‘불안감 조성으로 인한 경범죄’였다.

성희롱으로 처벌할 수 없는 이유는 그 사람이 나를 향해서 말했다는 증거가 없어서, 특정성이 성립되지 않아서라고 했다. 그렇다고 명예훼손이나 모욕죄가 성립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내게만 들리게 말했냐”는 경찰의 질문에 “그렇다. 그 공간에 둘만 앉아 있었다”고 했더니 “공공연하게 말한 게 아니라 처벌이 안 된다”고 했다. 가해자는 내게만 말했지만, 발언 중 나를 특정한 게 없어서 성희롱 혐의도 인정되지 않는다고 한다.

나와 가해자, 둘이 있었고 가해자는 “너”라는 말까지 써가며 음담패설을 했지만, 공연성이 없어 명예훼손이나 모욕이 아니다. ‘너’라는 지칭이 나를 말한다는 확증이 없으니 특정성이 성립되지 않아 성희롱이 아니다. 대한민국 법 환멸 난다.

그 사람은 끝까지 자기 언행을 인정하지 않았다. 경찰이 ‘경범죄 처벌을 위해서 음성파일을 보내달라’길래, “이 부분은 성희롱이 맞지 않나요? 정말 처리가 어려운가요?”라고 질문했지만 경찰은 “잘 받았습니다”라며 무시했다.

변태 새끼한테 10만원 이하의 범칙금을 부여하기 위해 나는 총 2시간 이상을 소비했다. 이제 저 사람은 알 것이다. 여자들 뒤에 가서 ‘하고 싶다, 만지고 싶어, 딸치고 싶어’라고 꿍얼거려도 법적 처벌이 없을 거라는 것을. 음성 메모 파일이 존재할 때도 가해자는 10만원 이하의 범칙금만 내면 되는데, 음성 녹음을 하지 않은 여성들이 신고했다가 허위 신고로 몰릴 수도 있다는 것을 저 ‘경’범죄자가 알게 될 거라는 게 제일 소름 끼친다. 얼마나 활개를 치고 살까?

여성이 성희롱, 불법촬영 같은 범죄를 신고하려면 범죄자 손목을 낚아채면 안 된다. 재작년 키 180cm 이상 거구의 불법촬영 범죄자를 현장에서 붙잡아, 손목을 잡고 경찰이 올 때까지 버티고 있던 내게 경찰이 해준 조언이다. 그럴 경우 오히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퍽치기’를 하고 도망가는 사례가 많으니 가해자를 직접 잡지 말라고 했다.

피해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은 가해자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몰래 경찰에 문자를 보낸 후, 경찰이 눈치 없이 전화를 걸면 위치를 말해주며, 가해자가 눈치채고 도망치거나 내 얼굴을 기억하거나 내게 ‘퍽치기’를 할까 봐 불안해하면서 경찰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며 마냥 가해자를 놓치지 않고 쫓는 것이다. 나만 해도 성신여대 개찰구 바깥에서 일어난 성희롱 가해자를 서울역까지 쫓아가서 잡았다. 가해자의 대각선 방향에 앉아, 그가 눈치챌까 불안해하며 얼굴을 가린 채, 경찰에게 온 10통이 넘는 전화를 일일이 받아, “정확히 말해주세요!”라는 경찰에게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가해자에게 들리지 않게 노심초사하며 “곧 회현역에 도착한다”고 속삭이는 게 최선이다. 경찰은 이마저도 ‘하지 말라’고 했다. 그냥 당하고 피해자로 사는 걸 권유받는 삶이다.

성희롱 사건 다음날, 관할인 성북경찰서에 방문해 신고하겠다고 했다. 경찰은 해당 사안이 ‘불안감 조성’ 사안으로 처리돼 경범죄 즉결심판 처분 진행 중이고 재판날짜까지 나왔다고 했다. 내가 조금만 늦었다면 이 사건은 성희롱이 아닌 ‘경범죄’로 진행되고, 일사부재리(판결이 내려진 사건에 대해 두 번 이상 심리·재판을 하지 않는다는 형사상의 원칙) 원칙에 따라 다시는 성희롱으로 처벌할 수 없을 뻔했다. 다행히 늦지 않았고, 성북서 경찰관의 노력 덕에 성희롱 사건으로 처리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을 ‘경범죄’로 처리했던 경찰관은 내게 전화해 사과했다. 하지만 피해자에게 명확한 설명 없이 은근슬쩍 해결하려고 하는 경찰의 태도에 크게 실망했다.

등굣길이 무섭다. 음성 메모 앱을 켜둔 탓에 빠르게 닳는 스마트폰 배터리, 혹시나 보복범죄가 있을까 봐 불안해하며 지하철역을 두리번거리게 되는 마음은 왜 오로지 내 몫인지 불공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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