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버닝’ 포스터
영화 ‘버닝’ 포스터

*본문에는 영화 ‘버닝’의 전개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버닝’은 모호한 영화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모호가 생산적인 질문으로 확장되는지는 의문이다. 확장된다 해도 어디까지나 남성에게만 한정될 뿐이라는 사실에 주목하고 싶다. 주요인물 중 하나인 해미(전종서)의 입장에서 ‘버닝’은 오히려 투명하고 납작한 영화다. 해미를 다루는 영화의 차별적 태도가 이 자리의 관심사다.

영화의 초반, 해미는 초등학교 동창 종수(유아인)와의 만남에서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를 진지하게 설명한다. 전자가 단순히 배고픈 상태라면 후자는 삶의 의미가 궁핍한 상태다. 그레이트 헝거가 되고 싶다는 해미의 말은 물질보다 정신적 가치를 지향하는 그녀의 세계관을 지시할 것이다. 이에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이 세계관이 추후 이어지는 장면들과 만나 유력한 파장을 일으키는 일은 딱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은 이상한 방식으로 철저히 소외된다.

해미는 그레이트 헝거를 보듬기 위해 아프리카 여행을 다녀온다. 그녀의 계획은 일단 성공한 듯 보인다. 종수 앞에서 해미는 그곳을 회상하며 무언가 깨달은 듯 눈물까지 흘린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이후 영화는 그녀의 성장한 내면을 구체화하는 데 관심이 없다. 대신 그 빈자리를 해미가 아프리카에서 만난 벤(스티븐 연), 즉 포르쉐를 몰고 최고급 빌라에 살며 놀면서 돈을 번다는 남성의 출현과 그가 일으키는 파장으로 채운다. 그렇다면 해미의 여행은 해미를 위한 것이 아닌 게 된다. 영화의 논리를 따를 때 그것은 차라리 상류층 벤의 등장을 위한 서사적 장치에 가깝다. 아프리카에서 해미가 얻은 게 돈 많은 사내의 옆자리라는 것인가.

그도 그럴 것이 이후 해미는 언제나 벤과 함께 하며 벤의 친구들과 어울린다. 그녀는 기꺼이 그들의 구경거리가 된다. 그들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과장된 제스처로 솔직하게 드러내며 우스꽝스러운 춤까지 춘다. 그녀는 순수해 보이지만 그들의 시선은 의심스럽다. 벤의 표현을 빌리자면, 상류층에게 그녀는 그저 “재밌다.” 오해해서는 안 된다. 이 장면의 진의, 말하자면 하층민을 진기하게 소비하는 부유층의 위선을 논하려는 게 아니다. 이상한 것은 이를 묘사하는 영화 역시 그녀를 구경거리로 취급한다는 사실이다. 그곳에서 그녀가 재밌는 대상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오직 그녀뿐이다. 해미가 구경거리인 진짜 이유는 그녀를 그런 상황에 던져놓고선 끝까지 무지의 자리에 방치하는 영화의 태도 때문인 것이다. 아프리카에서의 깨달음이 겨우 무지 상태란 말인가.

해미가 무지의 자리에 머물러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우리는 ‘버닝’의 주인공이 종수고 그 역시 해미와 함께 벤의 초대에 응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종수 역시 재밌는 대상으로 초대됐을 터지만 대처는 판이하다. 그는 딱히 말이 없으며 부유층의 태도를 위화감 어린 시선으로 관찰한다. 특히 자신의 누추한 집이 벤에게 재밌는 대상으로 취급당했을 때 일그러진 표정을 짓기도 한다. 해미와 달리 종수는 알고, 의심하며, 분노하는 것이다. 물론 이 정념이 이후의 주된 서사를 지탱하는 에너지일 것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해미의 지위는 앙상해진다. 뭔가 깨달았다는 해미의 실상이 종수의 그럴듯한 정념을 구축하는 에너지원 이상도 이하도 아니란 말인가.

그러다 해미가 사라진다. 이를 기준으로 ‘버닝’은 1부와 2부로 나뉠 수 있다. 누군가의 말처럼 이 영화는 이창동 감독의 새로운 시도처럼 보인다. 1부에서 우리는 이창동 감독의 전작들과 비슷한, 리얼리즘의 시선이라 부를 수 있는 일련의 풍경들과 마주한다. 반면 2부에서 우리는 이창동 영화에서 보지 못한, 미스터리라 부를 수 있는 기묘한 시선들과 마주한다. 이 두 묶음이 단순한 병렬이 아니라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2부의 영화적 자의식은 1부를 잊게 만들만큼 압도적이다. 2부의 절정에서 뛰어다니는 종수 뒤로 펼쳐진 새벽녘의 안개와 장엄한 철새의 행렬, 그것만큼이나 유려한 카메라의 움직임을 우리는 기억한다. ‘버닝’은 지금껏 시도되지 않았던 이창동 영화의 자의식(미스터리)이 지금까지의 자의식(리얼리즘)을 집어삼키는 영화인 것이다.

 

이창동 감독은 ‘버닝’이 젊은 세대의 분노와 무기력에 대한 영화라고 했다. 그는 한국의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고투를 미스터리로 여길 거라 생각한 모양이다. 이것이 미스터리 장르를 전면화한 이유다. 되묻고 싶어진다. 젊은 세대가 분노하는 이유는 오히려 너무나 명확한 것 아닌가. 명확하지만 권력을 쥔 기성세대가 그것을 방치하기 때문은 아닌가. 그렇다. 이것은 진짜 집어삼키는 행위다. 기성세대의 장르적 자의식이 유효화되면서 그것에 담기는 후속세대의 구체성이 무효화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젊은 세대의 삶을 도구로 창궐하는 기성세대의 예술적 자의식에 동의할 수 있는가.

심각한 것은 그 도구화된 자리조차 종수에게만 한정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해미의 방에서 반복되는 종수의 자위는 문제적이다. 이것으로 영화가 제일 끝자리로 밀쳐내는 존재가 누구인지 드러난다. ‘버닝’은 청년 세대(를 대표하는 종수라는 남성)를 미스터리의 대상으로 구경한다. 종수는 미스터리의 무기력이라는 미명 하에 해미를 성적으로 구경한다. 대체 해미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영화가 말을 안 해주니 알 길이 없다. 그러나 그녀에게 제시된 영화의 자리만큼은 분명하다. 그것은 참담하다. 돈 많은 남자의 옆, 무지 상태, 가난한 남자의 에너지원을 지나 그녀에게 최종적으로 할당되는 자리는 기성세대의 구경거리에서도 배제되는 (청년 남성의) 구경거리, 그러니까 구경거리의 구경거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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