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세 맞은 김옥라 각당복지재단 명예이사장

전쟁 직후 폐허 속에서

한국걸스카우트 재건

교회 여성운동 이끌고

자원봉사·웰다잉 운동

그의 손에서 시작해

남편의 죽음이 불러온

삶·죽음에 대한 물음이

‘웰다잉’ 연구로 이어져

100년 사는 동안

후회나 미련 없어

삶의 이유는 ‘사랑’

“모두 사랑하기 위해

이곳에 태어났습니다”

 

김옥라 각당복지재단 명예이사장은 “사람은 살아온 것처럼 죽어간다”면서 좋은 죽음을 맞이하려면 좋은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김옥라 각당복지재단 명예이사장은 “사람은 살아온 것처럼 죽어간다”면서 좋은 죽음을 맞이하려면 좋은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한 세기를 살아온 여성운동가는 미소를 머금고 죽음에 대해 이야기했다. “잘 죽는다는 것은 잘 산다는 것이지요.” 그는 “사람은 살아온 것처럼 죽어간다”면서 좋은 죽음을 맞이하려면 좋은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100년이라는 생애를 통해 체화한 이야기이기에 그의 말은 귀에서 끝나지 않고 가슴에 와 닿았다.

1918년생이니 올해 꼭 100세. 김옥라 각당복지재단 명예이사장은 1세대 여성운동가이자 한국에 ‘웰다잉’(Well-dying) 운동을 전파한 죽음준비 교육자다. 일제강점기를 지나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거친 그와 마주하는 일은 한 세기의 역사와 만나는 일이었다.

그는 일제강점기 강원도 간성의 평범한 시골 마을에서 10남매 중 여덟째로 태어났다. 간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독학으로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일본 도시샤여자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그는 미군정청과 대한민국문교부에서 근무했다. 그는 한국전쟁의 폐허로 황폐하던 50년대 한국걸스카우트의 재건과 성장을 이끌며 국제사회에 대한민국의 존재를 다시 알린 ‘민간 외교관’이었다. 한국여신학자협의회 회장 등을 지내며 교회여성의 권리신장을 위한 여성운동에 기여했고, 세계감리교 여성연합회 회장을 지내며 유엔(UN) NGO 가입과 활동을 주도했다. ‘자원봉사’라는 개념조차 없던 80년대 최초의 자원봉사 단체인 한국자원봉사능력개발연구회를 설립했으며, 죽음을 터부시하던 90년대 호스피스 봉사자 교육과 웰다잉 운동을 주도한 죽음 준비 교육의 개척자다.

김 명예이사장을 만나기 위해 서울역사박물관 뒤편 오래된 주택이 모여있는 신문로 골목에 위치한 이층집을 찾았다. 작은 마당에는 우뚝 솟은 향나무와 절정이 지난 작약 꽃이 초여름을 만끽하고 있었다. 문을 열고 거실에 들어서자 김 명예이사장이 반달 웃음으로 인사를 건넸다. 상수(上壽·100세)를 맞은 그는 계단을 오르내릴 때만 주위의 도움을 받을 뿐, 말하고 듣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연도와 인명을 척척 읊는 명쾌한 기억력은 기자를 압도하고도 남았다. 몇 년 전 재단 이사장을 그만두면서 이전처럼 매일 출근은 하지 않지만, 그는 아직도 강의를 하고 글 쓰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그는 “글을 쓰다 보니 연도를 잘 기억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그와 마주 앉은 거실은 세월이 묻어나는 가구와 소품, 책으로 장식돼 있었다. 특히 벽과 테이블 위는 가족사진들로 빼곡했다. 네 아들과 며느리, 손자·손녀 6명, 증손자녀 7명의 사진이 다양한 크기로 거실을 채웠다. 엊그제 태어난 증손자의 사진도 종이에 프린트돼 한 자리를 차지했다. 가장 큰 액자에는 남편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남편은 1986년 가정법률상담소가 제정한 제1회 외조공로상을 수상할 정도로 소문난 애처가이자 든든한 후원자였다.

지난 100년은 그에게 “감사한 삶”이다. ‘인생에 후회되는 순간이 있느냐’는 물음에 그는 “후회 없는 삶을 살았다”고 단언했다. “유학 대신 결혼을 택했지만 후회 안 해요. 당시 스물일곱 살이었지만 결혼 생각이 없었어요. 결혼보다는 공부와 일에 집중했지요. 그때 한 남성에게 구혼장을 받았어요. 우리 남편이었죠. 반려자가 돼달라는 그의 말에 저는 ‘결혼보다 유학을 원하고 있고 비자를 기다리는 중’이라고 답했어요. 남편은 포기하는 대신 함께 유학을 가겠다고 했지요. 남편의 배려에 결국 결혼을 택했고, 하느님의 이끌림에는 의미가 있으리라고 생각했어요. 결혼을 안 했으면 귀한 아들들도 만날 수 없었겠지요.”

자신이 원하는 삶보다는 신앙이 이끄는 대로 살아온 그는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이 남지 않았다고 했다.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걸어온 그는 지금도 여전히 ‘늙어감’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떨치고 ‘오늘’을 최선을 다해 기쁨으로 채워가고 있었다. ‘꿈을 꾸지 않으면 젊어도 노인’이라고 했다. 수필집을 준비하며 여전히 내일을 계획하는 그는 영원한 청년이다.

 

100세 맞은 김옥라 각당복지재단 명예이사장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100세 맞은 김옥라 각당복지재단 명예이사장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요즘도 매일 출근하시나요? 건강은 어떠세요.

“이제 은퇴해서 매일 출근하지는 않아요. 요즘 건강은 좋아요. 정초에 조금 아팠는데 지금은 괜찮아요.”

-100년이라는 세월 동안 이사장님께서 처음 시작한 것이 많으세요.

“모든 일은 제가 챌린지(challenge·도전)하려고 한 게 아니라 필요해서 한 거예요. 필요에 의해 하나둘씩 일을 시작했지요. 한국자원봉사능력개발연구회와 삶과죽음을생각하는회도 그렇게 출발했지요.”

-특히 한국전쟁 직후에 걸스카우트 재건에 뛰어드셨지요.

“미군정청에서 일할 때 같은 건물 지하에 대한소녀단(걸스카우트 전신) 사무실이 있어서 교류하고 교육도 받았지요. 1948년 미국에서 한국 걸스카우트 육성을 위해 훈련 강사인 미스 마거릿 투이를 보냈어요. 당시 미국 지원으로 걸스카우트 훈련을 받은 한국인 지도자가 두 명 있었지만 사이가 좋지 않아 사무실 문을 닫은 상태였어요. 그래서 미스 투이는 한국 부인들을 모아놓고 걸스카우트 강습을 했는데 통역을 도와 드렸지요. 미스 투이는 6개월가량 한국에 머물다 일본으로 건너갔어요. 그런데 한국전쟁 중 부산으로 피난을 가서 우연히 만난 걸스카우트 지도자에게 미스 투이가 일본에서 만들었다는 걸스카우트 가이드북을 전해 받고 너무 속이 상해 눈물이 났어요. 그동안 일본에 억눌려 살았는데 한국 여성들이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일조차 일본에 뒤지는 것 같았죠. 그래서 그 길로 걸스카우트 일에 뛰어들었어요. 애국심에 시작한 일이었지요.”

-걸스카우트 간사장을 맡아 15년을 이끄셨어요.

“이웃 주부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걸스카우트를 알렸고 당시 창덕여고 교장을 찾아가 창덕소녀대가 조직될 수 있도록 부탁드려 처음으로 만들어지기도 했지요. 집 근처 초등학생을 모아 ‘브라우니’(7~10세 걸스카우트 단원을 이르는 말)를 조직해 바닷가에서 게임도 하고 캠핑도 했지요. 피난 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와서도 다시 처음부터 시작했지요. 경기, 이화, 숙명 등 여학교 교장선생님을 찾아가 학교에서 걸스카우트 교육을 하자고 말씀드렸고, 결국 교육청에서 정식 교사가 학생들을 가르치도록 결정했지요. 세계본부에 편지로 도움을 청해 훈련 강사가 한국에 들어왔고 그와 전국을 다니며 걸스카우트대를 조직하고 훈련을 했어요. 결국 한국걸스카우트는 1963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세계대회에서 정회원으로 승인됐지요. 맨땅에서 시작해 어려움이 있었지만 결코 희생한다고 생각하진 않았어요. 소녀들이 올바른 길을 가도록 돕는다면 보다 좋은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애국심이 컸지요.”

 

문교부 근무 시절 김옥라 명예이사장
문교부 근무 시절 김옥라 명예이사장

-걸스카우트 간사장에 이어 세계감리교 여성연합회 회장을 맡으면서 해외 시찰을 많이 다니셨어요. 일을 하며 네 아들을 키우는 일이 쉽지 않으셨을 텐데요.

“남편과 시어머니의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요. 세계감리교 여성연합회 회장을 맡은 5년간 50개국 100개 도시를 돌았어요. 700만명의 회원들을 연결할 ‘사랑의 다리’를 놓아 서로 어려움을 나누고 소통할 수 있도록 직접 찾아다녔어요. 비행 거리를 계산해보니 26만 마일이더라고요. 네 아들은 시어머니가 돌봐주셨죠. 시어머니는 저를 딸 이상으로 사랑해주셨어요. 제가 퇴근하기 전에 저녁 준비를 다 해놓으시고 계절마다 치마와 저고리에 고운 물을 들여주셨어요. 어머니가 안 계셨으면 일하기 힘들었을 거예요. 남편도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이 가정에 있는 것은 사회에 진 빚을 갚지 못하는 것이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렇게 평생을 지지해준 남편분이 돌아가셨을 때 그 상실감은 정말 크셨겠어요.

“남편을 보내고 8개월을 앓았어요. 눈물을 흘리며 밤낮없이 기도를 했는데 그때 마음속에서 소리가 들렸어요. ‘죽음을 탁상 위에 올려놓고 공론에 부치라’는 한 마디였어요. 그 길로 가족을 잃고 상념에 빠진 지인들과 함께 ‘삶과죽음을생각하는회’를 창립했어요. 첫 강연회에 1000명이 넘게 왔어요.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알고자 하는구나, 저를 일깨웠어요. 그때부터 죽음에 대해 공부하면서 나 자신도 치유할 수 있었지요.

-죽음을 떠올리면 두렵습니다. 죽음에는 어떤 준비가 필요한가요.

“호스피스들이 증언하기를 남을 도우며 아름답게 살아온 사람은 죽은 뒤에도 얼굴에 화색이 있다고 해요. 좋은 죽음은 좋은 삶을 사는 거예요. 아름다운 죽음을 준비하는 것은 삶을 올바른 방향으로 재정립할 수 있는 기회지요.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님은 죽음은 하나의 관문을 건너는 것이라고 하셨어요. 남편이 떠나고 나서 저도 배웠어요. 우리가 사는 것에서 하나의 관문만 넘으면 죽음이라는 것을요. 죽음 이후의 세계는 펴보지 않은 책이라는 말도 있지요. 죽음을 막연하게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요. 아무도 죽음 이후를 알지 못하잖아요. 죽음을 준비하다 보면 죽음이 더 이상 두렵지 않지요.”

-생을 돌아보면 후회하는 일은 없으신가요.

“후회는 남지 않아요. 돌아보면 처음부터 이 길을 가고자 한 적은 없어요. 신앙의 이끌림에 따라 선택들을 이어왔고 주어진 길을 열심히 걸어왔어요. 왜 이렇게 열심히 살았을까 생각해보면 ‘사랑’ 때문이었어요. 사랑 없인 할 수 없었어요.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 비극이 넘쳐나는 이 세상에 태어났지요. 사랑을 배우기 위해, 사랑을 하기 위해 그리고 사랑받기 위해서요.”

-후배 여성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은.

“새로운 경험에 주저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어요. 세상에 늦은 것은 없어요. 저도 요즘 수필을 쓰고 있어요.”

 

김옥라 명예이사장

△1918년 강원도 간성 출생 △45년 일본 도시샤 여자대학 영문학과 졸업 △미군정청·대한민국 문교부·외자청 근무 △한국걸스카우트 간사장 △한국교회여성연합회 회장 △한국여신학자협의회 회장 △한국 감리교여선교회 전국연합회장 △세계감리교 여성연합회 회장 △86년 사회복지법인 각당복지재단 설립 △국민훈장동백장 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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