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이기에 용기 냈지만 ‘명예훼손 피의자’ 됐다

제 딸은 10살입니다. 어린 딸을 둔 엄마로서 특히 성범죄 관련 사건은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올해 초 언론매체를 통해 ‘미투’ 운동을 접했습니다. 상당히 인상적인 사회 현상이었습니다. 사회적 강자 중심의 성문화와 인권의식을 바로 잡는데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지요.

저 역시 10세 전후의 나이에 친척으로부터 성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습니다. 확실한 기억으로는 최소 2회. 당시 그는 저희 집에 사시던 할머니께 인사드리기 위해 약 2차례 저희 집에서 자고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마다 할머니와 같은 방에서 자던 저는 그로부터 성폭력을 당했습니다. ‘미투’를 접하고 난 후에야 제가 겪은 성폭력이 사회적 약자로서 부당하게 당한 것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림자처럼 평생을 따라다니며 저를 괴롭혔던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함구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던 중 ‘미투’ 운동을 보면서 제가 겪은 일이 제 딸의 세대에서만큼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졌습니다.

며칠을 고민한 끝에 저와 제 친척들이 모여 있는 단체 카톡방에 제 성폭력 피해 사실을 고백하고,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세대에서는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길 바란다고 당부했습니다. 너무나 오랜 세월 가슴속에 담았던 일을 한 순간에 쏟아내려니 자판을 두드리는 손은 떨렸고, 가슴은 터질 듯 뛰었습니다. 하지만 제 고백과 당부가 친족성폭력 근절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마음을 추스르며 글을 써내려갔습니다.

처음 글에서는 성폭력 가해자의 실명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친족성폭력 근절을 바란다’는 제 당부에 초점이 맞춰지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해자와 비슷한 연배의 다른 친척 분이 가해자로 지목될 것이 우려됐고, 고민 끝에 이후의 글에서 성폭력 가해자의 실명을 카톡방에 밝혔습니다.

그런데 가해자는 ‘자신은 그런 기억이 없다’며 저를 ‘허위사실 적시 명예훼손’으로 고소했습니다. 심지어 고소 사실을 아신 저희 어머니께서 그에게 전화하셨을 때 ‘OO이 정신질환이 있는 것 아니냐’ ‘이혼 한 것 아니냐’며 저와 제 어머니께 모욕감을 주는 말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저는 제가 겪은 성폭력이 허위가 아닌 사실임을 밝히기 위해 그 치욕스러운 경험을 더 또렷이 기억하고 증명해내야 하는 2차적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저는 성폭력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공소시효 만료 때문에 법적으로 대응할 방법이 없습니다. 제가 가해자의 실명을 밝힌 것이 죄가 된다면, 어린 제게 성폭력을 저지른 친척의 죄 또한 심판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명예훼손 관련법이 개선되거나 사실적시 명예훼손죄가 폐지되지 않는 한 현재의 ‘미투’ 운동은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미성년자 친족성폭력으로 인한 정신적 상처

아동 성범죄는 개인의 영혼까지 유린

지금껏 잘난 것 없어도 도덕과 윤리를 지키며 당당하게 살아오려 노력했습니다. 정조 관념에 대해서도 남편에게 떳떳합니다. 때문에 어릴 적 성폭력 피해에 대한 기억은 너무나 강렬하게 남아 평생을 따라다녔습니다. 결혼 후 남편에게 이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것 또한 괴로웠습니다. 아동 성범죄는 육체적 인권유린일 뿐만 아니라 한 개인의 영혼까지 짓밟는 것임을 오랜 세월이 흘러서야 깨달았습니다. 저는 친족성폭력 근절을 위해 제가 당한 피해를 알리고, 그러한 행위가 얼마나 큰 인권침해인지를 호소하고 싶습니다.

성폭력 당시 저는 어린 나이였고, 가해자는 익숙한 친척이었습니다. 성폭력에 대한 수치심은 점점 커져갔고, 가족모임이나 친척들에 대한 얘기가 들려오면 가해자가 먼저 떠올랐습니다. 과연 그 사람도 모임에 오는지 불안해했습니다. 그를 볼 때마다 치욕감이 들었고, 가족 모임이나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 부담스러웠습니다. 다른 남자형제들도 ‘그럴 수 있는 사람들’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제게 그런 성폭력을 저지르고도 집안에서는 모범적인 사람으로 인정받는 모습이 위선적으로 보였습니다. 특히 제 결혼식 때 그 친척을 보며 느꼈던 치욕감은 떠올리는 것조차 괴롭습니다. 침묵하면 할수록 제 잘못이 아닌데도 마치 죄인으로 사는 듯이 불안하고 불편한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현실의 벽에 부딪히며

명예훼손 소송의 피의자가 된 후부터 평범하던 제 삶은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범죄자가 된 것 같은 제 자신이 낯설고, 이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하루하루 마음을 단단히 무장해야 합니다. 그리고 제가 겪은 현실의 한계를 좀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해 힘든 상황을 타개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 이야기를 믿고 들어주는 여성단체와 어머니, 친형제들, 이제 이 사실을 알고 저를 응원해주는 남편이 제 든든한 버팀목입니다.

경찰 조사를 받은 지 3주 정도가 지났고, 판결을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물론 그 전에 추가 조사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어렵게 용기 내어 고백했던 ‘미투’가 명예훼손죄와 공소시효 만료라는 문제 앞에서 무기력해지는 현실을 절감합니다. 하지만 법 제도 개선을 위해 더 많은 사람들이 힘을 모으고 목소리를 높인다면, 미래는 지금보다 나아질 것이라 믿습니다. 제 딸의 세대에서는 반드시 변화가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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