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변호사의 이러시면 안 됩니다-14]

필자에게는 이번 4월이 참 잔인했던(!) 한 달로 기억에 오래도록 남을 것 같다. ‘알아두기에 쓸데 있는’ 강의를 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그래도 여기저기서 아주 쓸모없는 소리를 늘어놓았던 건 아니었는지, 전라북도교육청에서 장장 열흘에 걸쳐서 20강좌를 출강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길이 비록 멀지만 성희롱·성폭력 예방을 위해 힘을 좀 보태어 달라는 호소에 차마 거절할 수가 없어 승낙하고 말았더니, 그 덕에 4월 한 달 동안만 이제까지 3,200킬로미터 남짓 운전하며 돌아다니는 고행 중이다. 이제 두 번 남았으니, 800킬로미터만 더 달리면 된다.

관내 모든 초·중·고 교장선생님들을 대상으로 10회기 총 20개 반으로 운영되는 프로그램에서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보통 이런 종류의 강의는, 조금 노골적으로 말해도 좋다면 하루 몰아치기 일정으로 그저 순수하게 ‘요식행위’로 진행되곤 하는 모습을 많이 보았는데, 이번에는 꼬박 1박 2일 동안 강의와 토론, 역할극 등을 다채롭게 섞어서 교육현장에서의 성희롱·성폭력 예방을 위한 최고 관리자 인식 개선 교육을 시행하고 있다. 아직까지는 국내에서 최고 관리자 대상으로는 이와 유사한 교육 프로그램을 시도한 전례가 없다고 하니, 앞으로 더욱 더 복합적이고 심층적인 예방교육이 곳곳에서 널리 행해지게 되기를 바란다.

사실, 별 기대가 없었다. 뻔하지 않나. 원래 다 그런 것을. 큰 사고가 나고 ‘아, 이게 정말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로구나!’ 라는 것을 절감하기 전까지는 언제나 ‘남의 일’인 것만 같고, ‘나하곤 별 상관없는 일’로 치부해 버리곤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 말이다. 고충상담 실무자라면 혹시 또 모를 일, 최고 결정권자인 기관장 대상 강의에서 과연 몇 명이나 맨숭맨숭한 정신으로 끝까지 강의를 듣겠나 하는, 체념하는 마음으로 강의장에 들어갔다.

하지만 생각보다 훨씬 많은 교장선생님들이 끝까지 열심히 수업에 임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잊을 만하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학교 현장의 교사 성추행 소식들이 우리 마음에 분노의 불길을 타오르게 하지만, 필자가 늘 이야기하듯 작지만 소중한 한 사람 한 사람의 노력과 관심이 우리의 현실을 끝내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 주게 될 것임을 믿는다. 그런 믿음이 헛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기에, 필자도 기꺼운 마음으로 하루 400킬로미터 가까운 고된 운전을 참아가며 그곳으로 간다.

 

이번 강의에서 빼놓지 않고 소개하는 판례가 있다.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원에서 2009. 1. 22. 선고되었던 2008가합2136 판결이다. 초등학교에서 교사에 의한 학생 성추행 사건이 발생했다. 학교 현장에서 이와 같은 피해가 발생하였다면 이때 관리감독 기관인 지방자치단체에도 손해배상책임이 있느냐 하는 부분이 쟁점으로 판단되었던 사안이다. 지자체는 폭력예방교육을 시행하는 등으로 관리감독의 모든 책임을 다했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학교 현장에서 학생에게 성폭력 피해가 발생하였다면 이 경우에는 지자체가 보다 더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예방조치 노력을 다하지 않은 한, 그 책임이 면제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한 판결이다. 참 귀한 판례다.

법원은 이렇게 판시했다. 지자체는 학교교육과정에서 학생의 존엄한 성을 보호할 법률상의 의무를 부담하고 있고, 초등학교 교육과정에서 교사의 학생에 대한 추행사건이 종종 발생하고 있는 상황에서 학교 및 교사에 대한 지도·감독 권한 및 의무가 있는 지자체로서는 교사들에 대하여 정기적으로 전문가에 의한 심층적인 인성검사나 면담 등을 통한 교원적격검사를 실시하여 학생에 대한 성희롱 등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 교사가 없는지를 사전에 확인하고 전문가가 그러한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교원에 대하여는 최소한 40시간 이상의 개인상담을 포함한 특별연수를 시행하고 지속적으로 관찰하는 등의 방식으로 학생에 대한 성추행을 사전에 방지할 효과적인 제도나 프로그램을 운영하여야 할 의무가 있다고.

누군가는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른다. 관리감독자가, 최고 결정권자가 일일이 모든 업무를 다 꼼꼼히 챙길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결국 성희롱·성폭력 예방이든 또 다른 업무든 실제로 일이 잘 돌아가게 하는 것은 담당 실무자의 역할 아니냐고.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세세한 실무는 일선의 업무담당자가 꼼꼼히 챙겨야 할 일이겠지만, 실무자가 적극적으로 충분한 노력을 다할 수 있도록 든든한 뒷받침을 제공하고 올바른 방향을 설정해 주어야 하는 것은 모든 현장에서 그 최고 결정권자인 기관장의 역할이지 다른 누군가의 책임이 될 수 없다.

같은 맥락에서 바로 위의 판결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법원은 지자체의 책임임을 확인하였지만 사실은, 실무 현장에서 가해 우려가 있는 교사가 있는지 없는지 여부를 직접 확인하여 어떠한 사전적 조치가 필요한지를 기민하게 판단하고 1차적으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역할은 결국 지근거리의 최고 관리자이자 결정권자인 교장선생님들의 몫이 될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 아니겠나?

필자는 어느 기관의 폭력예방교육 점검보고서에서 “저희 기관장님은 아무런 의지가 없으세요.” 라고 하는, 당혹스럽기 그지없는 인터뷰 내용을 본 적이 있다. 이런 기관에서 교육과 사건 처리가 잘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팬더가 바람을 가르고 하늘을 날아가기를 기대하는 것보다도 더 어려운 일이다. 반면, 기관장이 솔선수범하여 기관 내 성희롱·성폭력 근절을 위해 노력을 다하는 사례도 보았다. 현실이 이런 귀한 노력을 배반하는 일은 없었던 듯 싶다. 그렇다. 우리에게 더 많이 필요한 것은 강력한 의지를 시현하고자 하는 민감한 관리자들, 귀와 마음을 열어 두고 있는 최고 결정권자들이다.

이를 잘 알기에 필자는 또 다시 이른 새벽에 차를 끌고 먼 길을 나선다. 언젠가 머지않은 때에 이 모든 사람들의 노력이 복된 결실을 맺게 되기를.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