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작가가 쓴, 여성 주인공이 등장하는 미스터리 소설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를 깨닫기 위해, 역설적으로 무수한 남성 작가의 무수한 남성 탐정 미스터리를 읽는 선행 과정이 필요했다. 그런 깨달음은 늘 뒤늦게, 그렇게 긴 우회로를 거치고 나서야 찾아온다는 게 아쉬울 뿐이다. 그러니까 어릴 땐 ‘남자 작가들 책이 더 재밌는걸?’이라고 생각하며 게걸스럽게 읽어댔다. 그 시절을 주름잡았던 대표적인 (남성) 작가들이 있고, 그 작가들의 대표작이 갖는 특유의 분위기, 이후 수많은 후대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친 스타일과 관점이 있다.

그러다가 여성 작가들의 책(동료 남성 작가들과 달리 꽤 오랜 시간 동안 평가절하당했던)을 나중에서야 찾아 읽었을 때 흠칫 놀랐다. 달랐다. 특히 여성을 묘사할 때, 그리고 당연히 남성을 묘사할 때 달랐다. 인물이 달라지니 사건의 과정과 해결도 달라졌다. 남성 작가들이 쓰지 않았던, 그들이 알지 못했던 현실의 이면을 여성 작가들이 적극적으로 끌어들임으로써 미스터리 장르의 폭이 경이롭게 확장되었다는 걸 그때서야 깨달았다.

남성 중심적 하드보일드 공식을 깬 『나의 로라』(비라 캐스퍼리, 엘릭시르)

비라 캐스퍼리의 『나의 로라』(이은선 옮김, 엘릭시르 펴냄)는 1943년 작이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 진행 중이고, 젊은 남성 대부분이 전쟁터에 나가 있어서 그전까지 가로막혀 있던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활발하게 이뤄지던 시기.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맡아 온갖 종류의 글쓰기에 닥치는 대로 뛰어들어 성공을 거둔 작가의 삶처럼, 주인공 로라는 콜로라도에서 평범하게 성장해 엄청난 야망을 품고 뉴욕으로 건너와 광고계에서 대성공을 거뒀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아름답고 똑똑한 여자, 로라의 대외적인 이미지는 그러했다. 그러다가 뉴욕 한복판의 호화로운 맨션에서 그녀가 시체로 발견된다.

여기서는 ‘누가 로라를 죽였는가’만큼이나 ‘로라는 대체 어떤 여자였는가’라는 질문이 중요해진다. “자기가 얼마나 똑똑한지 알고 있었고, 자신의 재능을 증명해 보일 수만 있다면 수백 번이라도 퇴짜를 맞을 준비가 되어 있”던 로라는 사람들의 장식품이었고,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그 위치를 이용했고, 또한 그녀 자신의 위치를 위해 사람들을 이용했다. 남성들의 욕망의 대상이었던 여성은 그 남성들 각자의 독점욕과 판단 기준에서 미끄러지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그 때문에 남자들을 당황케 하고, 결국엔 그녀를 규정짓는 것 같던 수많은 이미지와 선입견의 호화찬란한 프레임을 파괴한다. 그렇게 남성들의 시선으로 그려진 ‘나의 로라’가 아니라, 타인에게 스스로를 이해시키고 그녀 자신도 스스로의 어둠을 이해하는 과정이 이어진다. 범인의 정체만큼이나 이 여성의 진면목을 알아가는 재미는 21세기의 독자에게 더 큰 즐거움을 줄 것이다. 비라 캐스퍼리와 동시대 남성 작가들이 사회 진출한 여성들을 무시무시한 팜므 파탈로 그렸던 것과 정반대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행복한 가정’ 신화를 깬 『엿듣는 벽』 『내 무덤에 묻힌 사람』 (마거릿 밀러, 엘릭시르)

비라 캐스퍼리보다 열여섯 살 어린, 동시대를 함께 살았던 작가 마거릿 밀러의 범죄 소설 또한 지금 읽어도 여전히 흥미진진하다. 『엿듣는 벽』과 『내 무덤에 묻힌 사람』(모두 박현주 옮김, 엘릭시르 펴냄)은 행복해 보이는 가정을 배경으로 한다. 서로 지극히 사랑하고 아끼는 부부, 그러나 아내가 모종의 사건을 겪은 뒤 이 완벽한 가정의 토대가 기만과 배신으로 가까스로 균열을 감춘 허약한 지대였음이 폭로된다. 두 여자 친구가 여행을 떠났고 그중 한 명이 호텔 방에서 추락사했다. 죽은 여인은 어쩌면 살아남은 여인의 남편과 모종의 관계를 맺었을지도 모른다. 미쳐버리기 일보 직전이 된 살아남은 여인을 데려가기 위해 남편이 달려오지만……먼 길을 달려 집에 도착했을 때 남자는 ‘혼자’다.(『엿듣는 벽』)

젊고 아름다운 여인은 꿈에서 자신의 무덤을 본다. 묘비에 적힌 자신의 사망 날짜는 지금으로부터 4년 전이다. 그녀는 반신반의하여 꿈에 나온 그 장소를 찾아가고 정말 무덤을 본다. 하지만 묘비 속 이름은 다른 사람의 것이었다. 이 사람은 누굴까? 저 날짜는 무엇을 뜻할까? 남편과 어머니는 여인의 건강을 염려하며 쓸데없는 데 신경 쓰지 말라고 권하지만, 여성은 멈출 수 없다. 그녀는 몰래 사립탐정을 고용하고, 커다란 집안 곳곳을 직접 뒤지며 단서를 찾아낸다. 4년 전 그날, 분명히 자신의 주변에 어떤 일이 생겼는데 가족들은 그것을 은폐하고 있다.(『내 무덤에 묻힌 사람』)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맞이한 1950년대는 남성들이 전쟁터에서 돌아오고, 전쟁 전 자신들의 위치와 권력을 다시금 요구해 탈환하고, 여성들은 원래 있어야 할 자리인 가정으로 돌아가라고 압박받고, 사회의 안정을 위해 가정의 안정을 과장하는 ‘홈 스위트 홈’의 신화가 강고하게 자리 잡던 시기다. 마거릿 밀러는 그런 신화의 허상을 폭로하고, 그 가정의 단단해 보이는 벽에 귀를 갖다댄 채 그 안에 숨겨진 폭력과 피의 흔적을 지극히 신랄하고 우아한 시선으로 묘사한다.

영국 계급사회의 간극을 폭로한 『활자 잔혹극』(루스 렌들, 북스피어)

루스 렌들의 1977년 작 『활자 잔혹극』(이동윤 옮김, 북스피어 펴냄)도 빼놓을 수 없다. 1933년 프랑스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크리스틴과 레아 파팽 자매 사건, 두 하녀가 고용주의 아내와 딸을 잔혹하게 살해한 사건에 느슨하게 기반한 이 소설은 1970년대 영국 계급사회의 간극을 냉혹하게 폭로한 걸작으로 칭송받았다.

유니스 파치먼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그녀는 글자를 읽고 쓰는 법을 배우기 전에 시골로 피신해야 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났을 때 그녀는 여전히 문맹의 상태였다. 하지만 그녀는 뒤늦은 진도를 따라잡겠다는 생각 대신, “읽거나 쓸 줄 모른다는 사실을 감출 수 있는 각종 속임수와 수완”을 습득했다. 청소나 장보기, 요리 등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유니스는 나름대로 평온한 일상을 살았다. 가장 수치스런 비밀만 잘 감출 수 있다면 그녀는 자신에게 완벽하게 만족한 상태로 살다 죽었으리라. 하지만 이제 47살이 된 유니스는 커버데일 가의 하녀로 새로 취직했다. “유별나게 많이 배운 축”에 속하는 커버데일 가의 저택, 집안 곳곳에 유난히 책이 많이 꽂혀 있고, “난 우리와 같은 부류의 사람을 고용할 수 있다는 헛된 상상을 해요. 멋진 저택의 가사 일을 기꺼이 맡아 주려는, 적당히 교육받은 사람이면 좋을 텐데”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지성과 부를 겸비하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상류층 가족의 허위가 공기처럼 감싸고도는 그 저택에. 커버데일 가족은 “이기심이란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타인에게 자신의 방식대로 살라고 요구하는 것임을 절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유니스와 커버데일 가의 건널 수 없는 간극은 점점 넓어지고 깊어지며, 결국 유니스가 가족을 향해 총을 겨누는 끔찍한 몰살의 현장으로까지 숨 막히게 진행된다.

모든 엄마들의 악몽, 『리틀 페이스』(소피 해나, 레드박스)

소피 해나의 2006년 작 『리틀 페이스』(박수진 옮김, 레드박스 펴냄)는 모든 엄마들의 악몽에서 출발한다. 귀여운 딸 플로렌스가 태어나고 2주가 지난 어느 날, 엄마 앨리스는 몇 시간 동안 시내로 외출하고 집에 돌아온다. 그런데 요람에 누워 있는 아기는 플로렌스가 아니다! 앨리스는 아기 얼굴을 보자마자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고 확신하지만, 누구도 그녀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다. 벌컥 화를 내고 울부짖는 아이 엄마의 앞뒤가 안 맞는 말을, 경찰들도 삐딱하게 듣는다. 게다가 앨리스는 결혼 전부터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렸던 전적이 있다. 불안정한 그녀를 감싸 안고 받아들인 믿음직한 남편과 시어머니의 말에 더 무게가 실리는 건 당연하다.

최근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미스터리의 거대한 경향인 ‘믿을 수 없는 화자’의 전형, 사회는 불안정한(혹은 그렇게 보이는) 여성의 말을 귀 기울여 듣지 않는다는 현실을 반영함으로써 독자들 역시 이 화자의 진술을 믿을 수 있을지 확신을 갖지 못한 상태로 계속 불안을 공유한다. 뒤바뀐 아이, 그리고 남편 전처의 죽음이 뒤섞이면서 천부적이라고 믿어지는 모성의 신화, 완벽한 남편이 숨기고 있던 더러운 비밀,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의 압박이 쉴 새 없이 씨줄날줄을 엮는다. 철저하게 숨겨진 죄악이 드러나는 순간, 여성에 대한 편견의 실체 역시 가감 없이 폭로된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