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주진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관장

첫 역사학자 출신 관장

‘정치적 산물’ 비판 벗고

다양한 콘텐츠로 변화

균형적 역사인식 바탕으로

재미있는 콘텐츠 선보일 것

통사관 줄이고 여성사 등

다양한 주제관 늘리고

IT 접목한 체험관 확대

‘나만 옳다’ 고집해선 안돼…

공감·공유하는 공간 만들 것

 

 

4.19혁명부터 6월 항쟁, 2002 월드컵, 촛불 시위까지 서울 광화문은 근현대사 역사의 현장이다. 그 한복판에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를 보여주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우뚝 서 있다. 지난해 11월 취임한 주진오(61)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관장은 아이너리하게도 첫 역사학자 출신 관장이다. 그동안 정치학자가 관장을 맡아왔다는 사실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태생과 관계가 깊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건국 후 60년은 성공·발전·기적의 역사였다”며 근현대사박물관 건립을 추진했고, 그 결과물로 2012년 12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태생부터 건국절 논란을 불러왔고 당시 정권의 역사관을 그대로 담았다는 우려가 쏟아졌으며, 한국 역사학계는 아예 박물관을 외면해왔다. 이러한 맥락 속에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 선봉에 섰던 역사학자가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을 이끌게 됐다는 점은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

주 관장은 지난 취임 이후 지난 5개월을 “한쪽으로 치우쳤던 박물관을 정상화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정치적 산물이라는 비판을 벗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박물관으로서 제대로 기능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가 인터뷰에서 수차례 강조한 말은 ‘균형’과 ‘재미’ 였다. 균형잡힌 역사 인식을 바탕으로 재미있는 콘텐츠를 선보이겠다는 것이다. 대학 강단에서 22년간 한국 여성사를 가르친 경험을 바탕으로 ‘여성사’를 수면 위로 끌어 올려 하나의 주제관으로 만들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박물관의 변화를 위해 내부 조직 문화도 지시 중심에서 토론 중심으로 ‘소통의 리더십’을 보여주고 있다. 획일화와 권위주의를 온몸으로 거부해온 그의 인생철학은 박물관 운영 방향에도 그대로 스며들고 있었다. 스포츠 스타 토크콘서트, 무용가와 관람객과 함께하는 춤 워크숍, 주한 외국 공관장이 직접 자국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는 ‘엠버서더 렉쳐’, 문화소외계층을 초청해 진행하는 역사문화 체험교육 ‘다함께 대박’ 등 다양한 문화행사도 진행 중이다. 주 관장은 “일부만 공감하는 역사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역사를 위해 균형이 필요하다”며 이를 바탕으로 “박물관을 누구나 체험하고 공유할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으로 만들겠다”고 강조했다.

-취임하고 5개월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가장 주력한 부분은 무엇인가요.

“그동안 정말 바쁘게 지냈어요. (집무실 창문 밖을 가리키며) 농담삼아 이렇게 환상적인 전망이 있는데도 바라볼 시간이 없을 정도라고 할 정도예요. 박물관이 전시 해놓고 전시를 보러 오는 관객을 맞이하는 공간이 아니라 다양한 활동이 이뤄지는 공간이라고 생각해요. 다양한 프로그램을 시작하고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어요. 인력이 부족해 직원들이 많이 힘들 것 같은데 꼭 하지 않아도 되는 프로그램, 박물관과는 거리가 있는 사업은 정리하는 식으로 바꿔 나가려고 하고 있어요. 처음 박물관이 만들어졌을 땐 전 정권 역사관의 홍보를 기대했던 측면이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역사학계가 협조나 참여를 거부해왔죠. 정권이 바뀌면서 이제는 정상화 돼야 하지 않느냐는 목소리가 높았어요. 그래서 5개 역사 관련 학회를 초대해 박물관에 대한 평가를 부탁했습니다. 박물관다운 박물관이라고 하기엔 아직 미흡한 부분이 있어 그 부분을 정상화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변화를 위해 가장 중점을 두신 일은.

“사람 대접받는 조직 문화를 만들고 싶었어요. 성별이나 나이를 내세워 갑질 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고 직원들에게 당부했고 저부터 노력하겠다고 말했어요. 내부 조직뿐 아니라 용역이나 하청으로 일하는 분들과도요. 최근에 용역 계약을 맺었던 청소 담당자들을 직접 고용 형태로 전환하고 정년도 60세에서 65세로 늘렸습니다. 일하는 부모들이 편하게 일할 수 있는 직장 문화도 강조했습니다. 공무원 사회가 유연근무제나 모성보호제도가 있지만 눈치 보느라 제도를 활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일은 없도록 당부했죠. 정시퇴근이나 유연한 점심시간 이용 같은 작은 것부터요. 특히 위에서 아래로 하달하는 권위적인 문화가 아니라 대화하고 토론하는 문화로 바꿔 나가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조직 문화를 바꾼다는 게 쉽지 않을 수 있어요. 작은 관행이 바뀌다 보면 전체 조직 문화도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박물관에서 강연과 토크콘서트 등 다양한 행사가 열리고, 전시에도 전자북이 이용되는 등 새로운 시도들이 보입니다.

“박물관은 근본적으로 재미있는 공간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억지로 부모 손에 이끌려서 오는 곳이나 진열된 유물을 수동적으로 관람하는 것이 아닌 누구나 체험하고 공유할 수 있는 복합문화예술공간이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처음에는 부모나 선생님 손에 이끌려 왔더라도, 다음에는 부모에게 또 가보자고 말하는 공간, 어른이 돼 서는 혼자서도 가보고 싶은 박물관이에요. 박물관을 글로 배운 역사를 직접 체험해보고 의문을 가져보고 질문을 하고 토론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어요. 이것은 역사교육에 대한 제 생각이기도 해요. ‘토론이 있는 수업, 질문이 있는 교실’이라는 역사교육에 대한 제 생각을 박물관에서 실현해 보고 싶어요. 재미없는 것은 콘텐츠가 될 수 없어요. 외면받는 콘텐츠는 실패했다고 생각해요. 다양하면서도 질적으로 우수한 콘텐츠를 시도하는 것도 이 때문이에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처음 설립될 때부터 논란이 있었습니다. 지금 전시 중인 ‘제주4·3 이젠 우리의 역사’ 특별전을 두고 비판의 목소리가 있는데요.

“역사를 정치화나 이념화해서 불필요한 논쟁을 만드는 일에 휘둘리지 않으려고 해요. 지난 10년 동안 좌편향 됐다는 매도와 함께 숱한 공격을 받았지만, 무너지지 않으려고 노력했죠. 부당한 공격에 휘둘리면 그들의 의도에 말려드는 일이 될 테니까요. 이번 제주 4.3 특별전이 남로당을 옹호하는 전시 아니냐는 분들께는, 옹호할 생각 없다고 설명하기보다는 ‘와서 보시라’고 말하고 싶어요. 실제로 한 일간지 논설위원이 직접 특별전을 보시고 일부의 비판과는 다르다고 칼럼을 쓰셔서 반가웠어요. 이번 전시는 제주 4.3을 정치와 이념의 눈이 아닌 제주도민의 입장에서 보자는 취지로 기획됐어요. 화해와 치유의 전시회가 됐으면 하고요. 당시 많은 제주도민은 이념이나 정치와는 무관하게 살다가 피해를 봤습니다. 가해자 입장에 공감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전시 내용이 불편하겠죠. 반대로 생각보다 전시 내용이 ‘약하다’고 말하는 분들도 계세요. 하지만 지금 시점에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제주 4.3 전시를 한다는 사실 만으로 비판보다는 환영의 뜻을 내세우는 분들이 많고요. 의도하지 않았지만 특별전 덕분에 박물관 관객 수가 지난달에 비해 두 배가 됐어요. 공공의 역사는 하나의 입장일 수 없어요. 이 전시를 바라보는 시각도 정말 다양합니다. 자신의 시각만 옳다고 고집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22년간 여성사를 강의한 남성 교수로 유명하신데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는 여성사 관련 콘텐츠를 어떻게 선보이게 될지 기대가 큽니다.

“상명대가 상명여대였던 1995년 교양과목으로 여성사 강의를 시작했어요. 여성사를 교양과목으로 넣으면 좋겠다고 아이디어를 냈다가, 강의할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제가 강의를 맡게 된 게 시작이었죠. 수백명이 듣는 인기 강의가 되면서 이후 여성사전시관 자문위원,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강의와 여성신문 편집위원 등을 맡기도 했어요. 하지만 저는 페미니스트라기보다는 휴머니스트라고 생각해요. 저는 권위주의 문화, 사람이 사람을 억압하는 사회가 너무 싫어요. 제 동생(주진형 한화투자증권 전 사장)과 닮은 부분이 없지만 그거 하나는 비슷해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요. 부당하게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한테는 비판적이고 순응하지 않는 거죠. 힘을 가진 입장에선 껄끄럽고 불편한 거고요. 여성 문제도 그중 한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박물관에서도 여성 학자와 여성사 관련 콘텐츠를 확대할 생각이에요. 그동안 3.1 역사콘서트의 주제를 여성독립운동가로 잡고, 여성이 한 명뿐이던 운영자문위원회에 여성 위원을 6명으로 늘리면서 점차 바꿔 나가고 있어요. 강연 프로그램을 기획할 때도 여성 학자 등을 발굴하려고 노력하고요. ‘너무 여성만 우대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있을 수 있죠. 하지만 그동안 남성 위주로 해왔기 때문에 균형을 맞추기 위해선 좀 더 적극적으로 여성들이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맞다고 해요.”

 

-최근 4.3 특별전이나 공연에서도 여성들이 많이 보입니다. 전자책 같은 IT기기를 활용한 전시도 눈에 띄고요.

“여성사 관련 주제관을 만들 계획도 세웠습니다. 현재 세 개 층에 자리 잡고 있는 통사관이 조금 부담스럽다는 의견들이 있고 규모를 줄이고 장기적으로 주제관과 체험관(디지털, 토론)을 늘릴 생각입니다. 주제관 중 여성사 주제로 한 관도 만들 예정입니다. 일단은 통사관부터 정비하는 수순으로 진행하려고 합니다. 그동안 소외됐던 사람들의 역사가 정당한 대접을 받을 수 있도록 균형 있는 시각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형제가 모두 권위주의를 거부하는 것은 아버님(진보경제학자 주종환 전 동국대 교수)의 영향인가요.

“당대 엘리트였던 아버지는 농민과 노동자를 위해 많은 활동을 하셨어요. 공부라는 게 출세하고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하는 게 아니라 사회를 위해 필요한 역할을 위해 하는 것이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신 분이셨어요. 어린 시절에는 불만도 있었지만 아버지는 여동생(주은경 참여연대 아카데미 느티나무 관장)까지 우리 삼남매와 많이 대화하고 토론하셨죠. 지금도 기억나는 장면 중 하나가 80년 서울의 봄 시절이에요. 복학해 연세대 3학년이던 저와 서울대 4학년이던 주진형, 고려대 2학년이던 주은경이 각자 시위를 하다 최루탄 냄새 잔뜩 묻혀 집에 와서 대화를 나누던 풍경이에요. 다른 친구들은 집에서 시위 나가지 말라고 뜯어 말렸지만 우리집은 오히려 서로 무용담을 나눴으니 부러움의 대상이 됐죠.”

-앞으로 계획은.

“디지털, VR기술이 접목된 체험형 프로그램을 늘릴 계획입니다. 수동적으로 보는 전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전시로 바꿔 나갈 생각입니다. 사회공헌 프로그램도 다양화하고 외연을 확장할 예정입니다. 관장 취임 이후 진행한 프로그램인 ‘다함께 대박’은 국민 서비스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기도 합니다. 경제적 혹은 물리적으로 박물관까지 찾아오기 어려운 환경에 놓인 분들을 위한 프로그램인데, 관람하시는 분들도 만족하시지만 박물관 직원들도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등 보람을 느껴 앞으로 정규 사업으로 편성할 계획입니다. 이런 기회를 통해 박물관이 특정 계층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고 싶습니다.“

 

주진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관장

연세대 사학과, 동 대학원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30여년간 상명대학교 역사콘텐츠학과(사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한국 근대사1』, 『한국 여성사 깊이 읽기』, 『고등 한국사 교과서』, 『중학 역사 교과서』 등 한국 근현대사와 관련한 활발한 저술과 연구 활동을 하고 있는 근현대사 분야 전문가다. 전국대학문화콘텐츠학과협의회 회장, 한일 역사공동연구위원회 근현대분과 간사를 맡고 있다. 문화재청 근대문화재분과 전문위원, 서울시교육청 역사교육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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