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희롱 사유로 해임된 교수

복직하라는 원심 파기 환송

성범죄 재판 첫 판단 기준 제시

성인지 감수성·2차 피해 유념·

피해자 시각에서 판단 강조

 

지난 3월 15일 열린 ‘#미투 운동과 함께하는 시민행동’ 출범식 현장.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지난 3월 15일 열린 ‘#미투 운동과 함께하는 시민행동’ 출범식 현장.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성범죄 관련 소송에서 재판부가 성인지 감수성을 갖추고 피해자의 입장을 중시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이 성범죄 재판의 판단 기준을 제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최근 ‘미투’(#MeToo) 운동이 확산되는 상황에서 대법원이 약자의 편에 서겠다는 원칙을 강조해 주목받고 있다.

대법원(주심 대법관 권순일)은 12일 성희롱을 사유로 해임된 대학교수를 복직시키라고 판단한 2심 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이 사건은 대구 모 대학 교수 A씨가 소속 학과 여학생들에게 “뽀뽀를 해주면 추천서를 만들어 주겠다”, “엄마를 소개해 달라” 등 수차례 성희롱을 하고 수업시간에 여학생들을 뒤에서 안는 이른바 ‘백허그’ 자세로 지도하는 등 불필요한 신체 접촉을 했다는 이유로 2015년 4월 징계해임된 후, 이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이다.

1심 재판부는 교수의 성희롱을 인정해 원고인 장씨가 패소했다. 2심 재판부는 “피해자가 A씨와 격의 없이 지냈기 때문에 성적 굴욕감을 느꼈다고 보기 어렵고, 일부 피해자는 자신의 피해 사실을 소극적으로 진술했다”는 이유로 성희롱을 인정하지 않고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대법원은 성희롱을 부정한 2심을 뒤집으며 성희롱에 대한 재판부의 판단 기준을 제시했다. 우선 법원이 성희롱 관련 소송의 심리를 할 때는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양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명시했다. 성인지 감수성(gender-sensitive)이란, 사회 모든 영역에서 법령, 정책, 관습과 각종 제도 등이 여성과 남성에게 미치는 영향을 인식하는 능력을 말한다(양성평등기본법 제18조). 즉, 여성과 남성의 성별 입장과 경험을 동등하게 고려해 성차별적인 영향을 배제할 수 있도록 하는 데 필요한 통찰력과 기술, 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  

재판부는 또한 “우리 사회의 가해자 중심적인 문화와 인식, 구조 등으로 인해 피해자가 성희롱 사실을 알리고 문제 삼는 과정에서 오히려 부정적 반응이나 여론, 불이익한 처우 또는 그로 인한 정신적 피해 등에 노출되는 이른바 ‘2차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한 “성희롱 피해자가 2차 피해에 대한 불안감이나 두려움으로 인해 피해를 당한 후에도 가해자와 종전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는 경우도 있는 등 피해자가 처해 있는 특별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을 가볍게 배척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어 “법원이 어떤 행위가 성희롱에 해당하는지를 판단할 때는 우리 사회 전체의 일반적이고 평균적인 사람이 아니라 피해자와 같은 처지에 있는 평균적인 사람의 입장에서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낄 수 있는 정도였는지를 기준으로 심리·판단해야 한다”고 적시했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은 대법원의 이번 판결에 대해 논평을 내어 “성희롱에 대한 전향적인 기준과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이라며 환영의 뜻을 밝혔다.

여성연합은 “이번 대법원 판결이 성희롱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성폭력 범죄 판결에 있어 주요한 판단 기준이자 근거로 작용해 성폭력 피해자들의 인권 보장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며 “이러한 대법원의 변화가 성폭력 근절을 향한 의미 있는 진전이자 뿌리 깊은 성차별적 사회구조의 개혁을 요구하는 미투 운동에 대한 응답의 씨앗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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