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애의 시골살이] ③ 점점 인구가 줄어드는 동네, 그리고 새 이웃
[김경애의 시골살이] ③ 점점 인구가 줄어드는 동네, 그리고 새 이웃
  • 김경애 여성신문 편집위원
  • 승인 2018.04.10 13:07
  • 수정 2018-04-16 16: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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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사람들은 낯선 사람들이 들어오는 것을 경계하기도 하지만 농촌에는 점점 사람이 줄어들어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오히려 반긴다. (…) 농촌사람들이 무조건 인심이 좋은 것은 아니고 때로 각종 행사를 치를 때 무리하게 기부를 요구하기도 한다. 하지만 최대한 존중하고 가진 것을 나누면 그렇게 염치없게 들이대지만은 않는다.

 

함께 두부를 만드는 주민들 ⓒ김경애 편집위원
함께 두부를 만드는 주민들 ⓒ김경애 편집위원

우리 동네는 송씨들의 집성촌이고 남편 집안도 몇 집 살고 있다. 내가 처음 이 동네에서 여름방학을 지내기 시작했던 당시에는 마을회관에 동네사람들이 모이면 회관이 빽빽하게 찼다. 밥도 커다란 전기밥솥 하나와 작은 전기밥솥 하나 2개에 해야 했다. 그런데 밥을 안치는 담당이었던 양동댁이 몇 해 전에 갑자기 저세상으로 돌아갔다.

그 외에도 내가 알고 있는 이 동네 이웃 중에 이 몇 년 사이에 돌아가신 분들이 여럿 있다. 노인회 회장으로 불리던 분은 80세가 넘었는데도 꼿꼿한 자세를 유지했고 풍수에 능한 분으로 경운기에 부인인 박실댁을 태우고 농사를 지었다. 그 분을 볼 때 마다 어찌하여 저 나이에 저렇게 왕성하게 일하고 의식도 명징한가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 분이 갑자기 쯔쯔가무시병으로 돌아가셨다. 감기인 줄 알고 병원을 가지 않은 탓에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나도 심한 감기몸살 같은 증상으로 응급실로 뛰어가서 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 은행을 주우면서 윗옷을 벗어놓았는데 거기에 붙어있던 벌레에 물려 쯔쯔가무시병에 걸린 것이다. 이 분은 평소에 건강하셔서 아마 좀 심한 감기몸살인 줄 알고 금방 털고 일어날 줄 아신 모양이었다.

밥 담당이었던 양동댁 할머니는 우리 집 바로 옆집에 사셨는데 80대의 나이로 재작년에 돌아가셨다. 큰 아들이 병에 걸려 돌아와 같이 얼마간 산 기간 외에는 오랜 동안 혼자 사셨다. 집은 허물어져 가고 있어 부엌 한쪽에는 벽이 없어져 버렸고, 방에 불이 잘 지펴지지 않아 겨울에 전기장판 하나에 기대 추위를 견딘다고 하소연하시곤 하셨다. 버리는 책과 읽은 신문지를 모아다드리면 군불 땐다고 좋아라하셨다. 그래도 언제나 깔끔하게 옷을 차려 입고 계셨다. 나에게 주신 장독 하나를 아직 잘 간직하고 있다.

건넛집의 70대 남자도 작년에 죽었는데, 나는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젊은 아내와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이 남자와 그의 사무실 여성 직원이었던 젊은 아내에 대한 풍문이 많았고, 동네 사람들과는 별로 접촉이 없이 살았다. 다만 내가 그 남자와 관계한 것은 면사무소에 이 남자를 고발한 일이 있다는 것이다. 이 남자는 비어 있는 앞집 공터에서 쓰레기를 매번 태웠는데 플라스틱도 같이 태워 그 매연 때문에 질식할 지경이었다. 동네 사람들이 가서 아무리 말려도 듣지 않았고, 동네사람들 눈을 피해 새벽 4~5시에 쓰레기를 태우기 시작했다. 이웃과 언쟁하는 것을 극도로 기피하는 남편에게 비밀로 하고 몰래 면사무소에 신고한 것이다. 아무튼 이 남자가 사망하고 난 후 매연 때문에 고생하는 일은 없어졌고 그 젊은 아내는 알콜 중독 치료차 입원했다가 돌아왔다. 하루는 아침에 마당에서 일하고 있는데 꽃이 예쁘다고 해서 들어와 구경하라고 했더니 고맙다고 하며 나에게 “언니”라고 하겠다고 해 그러라고 했다. 그런데 요즘에는 다시 동네에서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지난 겨울 마당에서 이웃들과 함께 김장을 했다. ⓒ김경애 편집위원
지난 겨울 마당에서 이웃들과 함께 김장을 했다. ⓒ김경애 편집위원

소중한 나의 이웃들

남편이 “채고아재”라고 부르는 80대 남자는 친척이 되는 분으로 3년 전에 돌아가셨다. 나이와 상관없이 힘이 장사로 부지런하고 억척같이 농사일을 해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 우리 집 위쪽에 있는 대나무밭에 나무를 마음대로 잘라내 밭을 만들고 채소를 심었다. 땅주인이 찾아가서 항의하자 오히려 자신이 일한 품삯을 내놓으라고 우겨 다들 아연하게 만들기도 했다. 젊었을 때는 군대에 갔다가 제대할 날짜가 지났는데도 돌아오지 않았다. 공짜로 밥 주고 옷 주니 좋아서 그냥 눌러 있었다는 것이다. 가난한 시절이었다. 그래서 시아버지가 동네 분들을 보내 군대에서 찾아 데리고 왔다는 신화 같은 이야기도 있다. 술을 먹으면 아무나 때리고 행패를 부려서 공포의 대상이었다. 우동댁 남편을 다짜고짜 때려 갈비뼈를 부러뜨리는 일도 있었다. 고소, 고발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모두 기피하는 대상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고혈압으로 쓰러졌다. 일 년 정도 후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시 농사일을 하시곤 하셨는데 어느 날 돌아가셨다. 채고아재의 부인은 죽전댁인데, 말을 못하신다. 동네 이웃과는 이 동네에서만 통하는 수화와 “어 어”하는 소리로 서로 의사를 주고받아 문제가 없다. 마을회관에서 식사를 같이 해먹으면 동네 이웃들은 꼭 불러 많이 먹으라고 격려하며 언제나 함께 거두면서 지낸다. 그런데 밥을 엄청나게 많이 먹어 가끔 놀라움과 미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가난한 시절 밥을 제대로 먹지 못했던 때 겪었던 배고픔의 기억 때문일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그렇지만 죽전댁은 일을 억척같이 잘해서, 앞 다퉈 일손으로 부르는 인기 있는 일꾼이다. 머리가 명석한 아들들은 군청 공무원이 됐고 어머니에게 효자다.

이동댁 남편도 대구에 입원해 있다가 노환으로 80대 후반의 나이로 재작년에 돌아가셨다. 이동댁은 근처 초등학교에서 운영하는 노인학교에 다닌다. 가방을 메고 일주일 2~3번 학교에 가서 한글을 배우는데, 글짓기 시간에 병든 남편을 사랑하고 끝까지 지키겠다고 약속하는 글을 써서 방송에까지 출연했다. 대구 병원에 입원한 남편에게 조금이라도 소홀하면 딸들이 그 약속을 지키라고 다그친다면서 이동댁은 열심히 남편 병문안을 다녔다.

푼할머니라고 불리며 혼자 살던 할머니는 매일 우리 집 앞에 있는 마을 회관 앞에 나와 앉아서 들녘을 하염없이 바라보시곤 했다. 재작년 보다 작년에는 좀 나아지신 것 같았는데, 마을에서 안 보였다. 갑자기 치매가 와서 밤에 소리를 지르고 어딘가로 가려고 해서 양로병원에 입원했다고 한다. 연명 치료만 한다는데, 문병 가보고 온 분들이 병석에 누워 있는 모습이 너무 비참하다고 말해 우리는 모두 연명 치료를 거부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마을의 여러 사람이 죽어 나갔고 요양병원으로 떠났다. 농번기에 다들 일하러 나가면 나 혼자 동네에 남아 적막함을 감당해야 한다. 2030년에는 없어지는 마을이 많을 것이라고 하는데 우리 마을도 10년이 지나면 어떻게 될지 모두 걱정이다. 인구가 점점 노령화되고 줄어들고 있는 마을에 동남아 여성들이 시집와서 아이들을 낳아 그나마 우리 마을에 고등학교에 다니는 두 남자아이가 있다. 골목길에서 만날 때마다 꼬박고박 인사를 잘한다. 모두 귀여워하고 귀하게 여긴다. 몇 해 전에 밥 한 끼 같이 하자고 이 가족을 우리 집으로 초대했는데, 영어나 필리핀 말을 모르는 남편과 한국말이 서툰 아내는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 남편은 아내의 필리핀 가족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예전에 부부싸움이 잦을 때, 필리핀댁은 나에게 도움을 청하러 오기도 했다. 친정 엄마 같다고 하면서.

최근에는 젊은 부부와 유치원생 딸이 있는 한 가족이 이 마을로 이사 왔다. 우리 집 뒤쪽 옆으로 새로 집을 지었다. 8개월간 집을 짓느라 소음에 시달렸고 무엇보다 대나무를 함부로 잘라 길을 내어 속상해 두 번이나 항의하러 찾아갔으나 주인은 숨어버렸다. 집을 다 짓고도 대나무 자르는 소리가 나서 자르지 말라고 소리쳤더니 단박에 “이 집에서 못 살게 하려는 거냐”라면서 도리어 큰 소리를 냈다. 그 후 길에서 만났더니 떡을 한 팩 줬다. 그래서 집을 짓기 전에 양해를 구하러 왔어야 되지 않느냐고 다그쳤다. 가장 피해가 큰 우리에게는 단 한 번도 양해를 구하러 오지 않았다.

 

배꽃 ⓒ김경애 편집위원
배꽃 ⓒ김경애 편집위원

값으로 매길 수 없는 것들

동네 앞에는 40대 부부가 도시에서 이주해 와 비닐하우스에서 유기농으로 딸기 농사를 지어 생활협동조합에 납품한다. 딸기 수확철인 겨울에서부터 봄까지 동네 아지매들은 하루걸러 종일 딸기를 따고 포장하는 일을 한다. 그런데 이 딸기 집 남자는 자신의 집에서 일해주는 아지매들이 일과 관련해서 뭘 물어봐도 퉁명스럽기 짝이 없었다고 한다. 나와 마주쳐도 외면하고 못 본 척했다. 재작년 겨울에는 이 남자가 가출을 했는데, 그 부인이 남편 때문에 엄청 속상해하자, 아지매들은 그 사연을 듣고는 부인에게 남편이 돌아오면 받아주지 말라는 판정을 내렸다. 남자가 스스로 돌아왔으나 결국 지난 겨울 이혼하고 말았다. 남자는 떠났고 싹싹하고 상냥한 여자가 홀로 딸기 농사를 짓는다. 동네 아지매들은 모두 딸기 집 여자를 위로하고 이혼하기 잘했다고 다독여줬고, 반면 그 남자는 성질이 “더러웠다”고 입을 모아 욕했다. 우리 집 바로 앞집에 세 들어 살던 40대 부부도 마을회관에서 식사를 같이 해먹을 때 초대해도 한 번도 오지 않았다. 주민들이 다니는 길목에 크고 사나워 보이는 개를 묶어놓은 것을 못하게 했다고 동네 인심이 사납다고 불평하면서 주민들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지내다가 어느 날 소리도 없이 이사 갔다.

 

민들레 ⓒ김경애 편집위원
민들레 ⓒ김경애 편집위원

농촌 사람들은 낯선 사람들이 들어오는 것을 경계하기도 하지만 농촌에는 점점 사람이 줄어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오히려 반긴다. 도시에서 귀촌한 사람들이 농촌사람들이 무례하고 요구도 많다고 불평하며 다시 도시로 돌아갔다는 말이 많다. 농촌사람들이 무조건 인심이 좋은 것은 아니다. 때로는 각종 행사를 치를 때 무리하게 기부를 요구하기도 한다. 하지만 최대한 존중하고 가진 것을 나누면 그렇게 염치없게 들이대지만은 않는다.

나는 해마다 마을 사람들을 위해 복날이 되면 삼계탕을 대접하고 영산홍이 한창 필 때면 우리 마당에 마을 사람들을 초대해서 삼겹살 바비큐 파티를 열고, 또 가끔 반찬거리와 과일과 과자를 사서 마을회관으로 들여보내지만, 이웃들이 내게 주는 것이 훨씬 더 많다. 힘들게 지은 마늘과 양파는 물론, 밭에서 수확한 온갖 채소를 수시로 나눠준다. 김장철에는 집집마다 김치를 나눠줘 김치가 한 가득이라 김장을 안 해도 될 지경이 됐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집집이 돌아가며 그 해 수확한 메밀로 메밀묵을 쑤고 도토리가 많이 열린 해에는 주운 도토리로 묵을 쑨다. 나는 얼쩡거리면서 사진 찍기 바쁜데도 완성된 메밀묵과 도토리묵을 나눠준다. 또 콩으로 두부도 직접 만드는데, 두부가 완성돼 돼지고기를 삶아서 함께 먹는 파티에 나를 기꺼이 끼워주고 또 집에서 먹으라고 싸주기까지 한다. 값으로 매길 수 없는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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