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할 권리’ 박탈당하고 투명인간으로 산 재일 한국인들”
“‘사랑할 권리’ 박탈당하고 투명인간으로 산 재일 한국인들”
  • 김은정 한국여신학자협의회 공동대표
  • 승인 2018.04.10 10:04
  • 수정 2018-04-21 15: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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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이쿠노 한인촌을 가다]

 

조선학교 안의 표어 ⓒ김은정
조선학교 안의 표어 ⓒ김은정

한국과 재일, 일본 여성들이 함께 모여 동북아 평화를 모색하는 여성신학 포럼(제2회, 통산22회)이 올해는 2월 19일부터 22일까지 일본 오사카 이쿠노 한인촌에서 열렸다. 일본과 한국을 번갈아 가며 열리는 이 포럼을 오사카 한인촌에서 열게 된 것은 재일 여성들의 특별한 초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 오사카에서 벌어지는 혐오 선동은 재일에 대한 일본정부의 차별과 사회적 인식이 나아지기는커녕 더 심해지는 것을 보여준다. 한국 여성들은 1970년대 박종석 군 히다치사 입사 지원운동, 한국 원폭피해자들의 원폭수첩사건에 대한 지원, 한국의 독재 정권이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조작한 1970년대, 80년대 일본유학생 간첩단 사건들에 대한 신원운동, 1990년대 조선학교 학생들이 등하굣길에 당한 테러, 이른바 찢긴 저고리 사건 등 재일 문제를 여론화하고 함께 대처해왔다.

상인의 도시 오사카는 번화하고 구경거리가 많다지만 우리 일행은 곧장 이쿠노 한인촌으로 향했다. 여기는 삼국시대부터 한반도의 정치적 유민들이 건너와 살던 곳으로 한인들의 역사적인 주거지다. 중심에 있는 한국식 전통시장의 이름도 백제시장이다. 한인촌에는 일본적(日本籍), 한국적(韓國籍), 조선적(朝鮮籍) 등 세 가지 국적의 사람들이 한 골목에 살고 있다. 이들이 그런 국적을 갖게 된 것은 전후 일본의 외국인등록증 발급 정책, 그리고 이후에는 남북분단으로 인한 임의적인 결과와 생존의 필요가 만들어 낸 것이었다. 하지만 그 임의성은 이데올로기적 경계가 되어 사람들을 괴롭히고 두려움과 편견의 벽이 됐다. 여기에서는 포럼에서 나온 증언들을 중심으로 우리가 다녀온 이쿠노 한인촌을 소개하겠다.

 

포럼 참가자들. 두번째줄 가운데 흰 옷을 입은 나가사키 유미코, 그 왼쪽에 정숙자, 그 옆에 신영자씨 등 세 명이 증언했다. ⓒ김은정
포럼 참가자들. 두번째줄 가운데 흰 옷을 입은 나가사키 유미코, 그 왼쪽에 정숙자, 그 옆에 신영자씨 등 세 명이 증언했다. ⓒ김은정

어디가 내 고향인가?

한국 측 발표자인 정숙자 목사(남양주 이주여성센터장)은 재일여성으로 한국인과 결혼해 ‘귀향’을 했건만 모국에서조차 환영받지 못하는 재일여성의 소속과 정체성을 고민해온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 발표를 준비하다가 떠오른 영감으로 노랫말을 쓰고, 작곡가인 딸이 곡을 붙였다. 이제는 이쿠노도 고향이라 부를 수 있고 남양주도 고향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그 고통의 역사(어찌하리오)를 창조의 힘(평화세상 창조해)으로 바꿨다.

발표를 듣고 난 후 한국 측 한 참가자는 자신의 어머니도 오사카 출신으로 해방 후 한국으로 돌아와 사셨지만 평생 우울증으로 힘겨워하셨고 제일 큰 이모도 그리 행복하지 않은 삶을 살다 운명했는데 아마 누구도-딸마저도- 공감해주지 않는 그들만의 이야기를 풀어놓지 못해서일 것 같다고 했다. 정숙자 목사의 맏딸인 작곡자 김경의씨는 어머니가 출입국사무소에서 겪은 이야기를 듣고 이주민노동자 사역을 하면서 오래전 경험으로 인해 먼 거리도 마다 않고 달려가 그들을 도와주는 어머니를 비로소 이해할 것 같다고 했다. 증언에 나온 결혼할 당시 일본에 돌아갔다 재입국하는 과정에서 부산출입국사무소에서 겪은 호된 감금과 취조 이야기는 어디에서도 한 적이 없으셨다고 한다. 재일동포들이 간첩으로 의심받던 그 시절 겪은 폭력의 무자비함을 한국에서는 이야기할 데도 없고 오로지 외국인 노동자들과 삶으로 나눌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민족보육과 조선학교로부터 배운 것

두 번째 발표자인 나가사키 유미코씨는 일본인으로 대학생 시절, 박정희 정권이 무기징역과 사형을 선고한 일본유학생 정치범 구조활동에 참여하면서 재일한국인들의 민족정체성 문제를 알게 됐다고 한다. 일본인들의 차별 속에서도 꿋꿋이 한국어를 배우고 민족문화를 배우려는 재일한국인들에게서 깊은 감동을 받고 약혼자를 설득해서 자신의 고향 나고야를 떠나 오사카에서 재일한국인들의 ‘민족보육’에 동참하게 됐다. 나가사키씨가 일하던 보육원은 기독교 계통으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존재이며 상대방을 사랑하고 인정하는 것을 보육의 기본으로 삼았지만 민족교육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존재했다. 기본적으로 보육원 아이들은 한국이름과 일본이름 두 개가 있었고 이 중 어느 것을 쓰느냐는 개인의 선택이었다. 그런데 보육원에서 아이들에게 이중언어에 노출되는 기회를 자주 만들고 한국 음식을 식단에 넣고, 점차 전래동화, 민족악기 연주, 부채춤 등을 가르치자 학부모들과 교사들은 아이들에게 일어난 긍정적인 변화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이들은 한 명의 인간으로 자부심을 되찾아갔으며 부모 세대들도 민족의 뿌리가 회복될 때 차오르는 만족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나가사키 선생님도 “인간으로서 있는 그대로를 인정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배웠다고 한다. 일본인으로 태어난 자신의 아들도 재일 보육원에 다니면서 재일의 문화를 멋지다고 여기고 편견 없이 상대방의 문화를 존중하는 일본인으로 자라났다.

나가사키씨는 현재 조선학교를 지원하는 모임에서 활동하고 있다. 오사카 지역에서 2002년부터 시작된 이 모임은 조선학교 아이들이 일본사회에 대한 증오심을 갖고 자라기보다 인정받고 격려받으며 교육의 본래 목적인 자유로운 자기추구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자 하는 취지에서 출발했다. 일본 기독교단 오사카 교구와 공동으로 조선학교의 공개수업이나 학교행사에 참여하면서 조선학교 학생들과 학부모들과 진심을 나눌 만큼 친밀해졌을 뿐 아니라 그 안에서 이뤄지는 민족교육이 자신의 국가만이 정당하고 우월하다고 가르치는 교육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자부심을 갖도록 하는 교육이라는 점을 이해하고 알리는 모임이 됐다. 또 5년 전부터는 오사카부청 앞에서 매주 화요일마다 일본 정부가 고교무상화정책에서 조선학교를 배제한 것에 항의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나가사키씨의 남편이 화요일에 일을 쉬기 때문에 화요모임이 됐다고 한다. 일본인들의 책임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화요모임은 일본인들이 주최한다.

 

이카이노에서 이타이해

가장 큰 고통의 당사자인 재일 측에서 나온 신영자 목사는 빈곤과 차별 속에서 진리, 곧 자기 자신을 찾아 떠난 여정에 대한 증언을 했다. 그는 재일 2세 여성으로 아버지를 여의고 고향인 홋카이도를 떠나 10살 때 오사카의 빈곤한 한인촌 이카이노에 정착했다. 이카이노는 이쿠노의 옛 이름으로 ‘돼지를 키우는 들판’이라는 뜻이다. 그곳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차별을 정당화하는 경멸적인 이름이었다. 그는 자신이 조선 사람이라는 것을 가능하면 숨기고 조선 이름도 사용하지 않으면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일본 사회에서 조선인이라는 것을 밝히면 거기에 따른 차별과 편견, 무시의 눈초리,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등의 헛소문을 다 견뎌내야 했다. 어릴 때부터 어려움을 당한 어머니의 처지를 도우려고 자기를 억압하고 어머니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습관은 성인이 돼 문제를 일으켰다. 뿌리가 약한 자아는 캐나다 유학생활 중에 심인반응으로 나타났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는 마침내 1989년 오사카 고등재판소에서 지문날인 거부 재판의 증인으로 섰고, 2007년에는 그 증언과 일본사회의 동화정책에 대한 투쟁사를 책으로 냈다. 그는 일본의 동화정책 속에서 조선인들은 자기 자신을 “사랑할 권리”를 박탈당하고 투명인간으로 살아왔다고 했다. 그는 자신 안에 있는 자기혐오의 기억을 찾아내고 사랑으로 마주했다. 그가 청소년기에 “나는 한국인이다”라고 고백한 것은 마음의 병이 있던 동생을 사랑해주지 못했던 것, 이쿠노 길거리의 넝마주이 같은 할머니, 할아버지를 동포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었다.

 

동오사카 조선제4초급학교 학생들이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고 있다. ⓒ김은정
동오사카 조선제4초급학교 학생들이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고 있다. ⓒ김은정

“사랑하라” 가르치는 조선학교

그 다음날 우리는 말로만 듣던 조선학교를 방문하게 됐다. 포럼 장소에서 걸어서 2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조선학교는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초급학교였다. 반바지 교복을 입고 곧은 다리에 반양말을 신은 아이들은 우리를 만나면 환하게 웃으며 큰소리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했다. 30여명의 방문객들을 맞으러 교장선생님이 직접 나와 조선학교에 대해 설명했다. “1946년 우리 조선학교는 230만이나 되는 조선 이주민들의 말과 이름을 되찾아주기 위한 민족교육을 위해 시작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듣자 오래 전 해방의 소식을 듣고 희망에 부푼 부모들이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아이들을 삼삼오오 모아놓고 ‘조선어’를 가르치는 장면이 머릿속에 단박에 그려졌다. 바로 이쿠노 한국촌 이 골목길 사이사이에서 이뤄진 일이었다.

현재 유치원생 22명에, 초급생 78명을 가르치는 교원은 담임 9명과 교장 한 명이었다. 어려운 형편이지만 모두 젊고 헌신적이라 아이들을 즐겁게 가르친다고 했다. 남아도는 일손이란 없기 때문에 교장 선생님이 허드렛일부터 모든 일을 하시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귀국 적응 교육이 목적이었지만 현재는 재일교포 4~5세 아이들에게 일본사회에서 살아가는 상식과 지식을 가르치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똑바로 자라나도록” 가르친다고 한다. 조선학교의 ‘조선’은 한반도 조선을 가리키고, 창립할 때 잠시 조총련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북한학교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지금은 북한으로부터 어떠한 지원도 받지 않고, 일본 전역의 조선학교들이 교과서 편찬위원회를 만들고 교육과정을 운영한다고 한다. 이 학교의 자랑이 무엇이냐는 마지막 질문에 교장선생님은 “아이들의 눈동자를 보면 아실 겁니다”라고 대답했는데 아이들은 정말 탐나도록 사랑스러웠다.

조선학교 방문 후 저녁에 가졌던 토론에서 우리들은 식민지와 분단의 아픈 역사가 이 아이들에게 아직도 영향을 주고 있으며 그 피해를 고스란히 이 아이들이 담당한다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고 이야기했다. 고베에서 목회하는 최호자 사모는 자신 안에 있던 차별의 층위를 고백했다. “저는 유치원에서 고등학교까지 민족학교를 다녔습니다. 박정희 시대였는데 민족학교 교사의 3분의 2는 한국에서 장군 하던 사람들이 교사로 왔어요. 그분들이 조선학교는 무서운 곳이라고 말씀하셔서 내 마음에 편견이 있었어요. 그래서 조선학교를 방문하는데 무서운 마음이 들었어요. 그런데 오늘 교장선생님이 북한과 정치적 연결이 없다고 말했을 때에야 비로소 두려움과 편견에서 해방됐어요. 앞으로 동창생들에게 알리겠습니다.” 그분은 사회복지사 일을 시작하면서 노인돌봄 제공자로 등록했지만 일본 노인들이 이름이 무섭다고 번번이 거절하는 바람에 그 일을 그만뒀고, 양로원에도 취직하려 했지만 이름을 말하자 거절당했다는 얘기도 했다.

 

히라노가와. 한국촌을 가로지르는 인공 개천으로 조선인들의 노역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김은정
히라노가와. 한국촌을 가로지르는 인공 개천으로 조선인들의 노역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김은정

잘못된 경계를 옮기고 연대하는 일

일본에서도 북풍을 정치에 이용하는 정치가들이 조선학교와 재일동포들에 대한 혐오를 방조하고 조장하는 현실을 보았다. 재일 여성들은 천사나 누구라도 도와줬으면 간절히 원한다고 했다. 그들을 도와주는 일본인들은 “비국민”, “조센진”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었다. 과거의 한국 정부가 재일동포를 희생양삼아 국민여론을 반공으로 하나 되게 만들었던 역사를 생각하면 한국 여성들은 그 이분법에서 벗어나야 했지만 아직도 우리 안에 경계선을 넘는 두려움이 있었다. 다양한 경험을 이야기하다 보니 우리 마음의 잘못된 경계선이 옮겨지고 국가도, 종교도, 민족도 보호해주지 못한 사람들에게 안전한 울타리를 만들어주는 일이 바로 연대라는 생각을 했다. 교육학자인 리월순 선생님을 특별강연자로 모시고 최근에 실시한 재일한인여성 실태조사의 내용과 분석에 대해서도 들었는데 재일여성들은 정치적 억압과 민족적 차별 때문에 젠더불평등에 대해서는 아직 말도 꺼내지 못하는 현실도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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