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성 변호사의 이러시면 안됩니다

피해자 익명성 보호, 익명신고 없이도 가능하다

 

박찬성 변호사
박찬성 변호사

토론회에 다녀왔다. 한 발제자가 성희롱·성폭력 등 사안에 대해 익명의 신고를 접수하여 사건을 처리할 수 있는 제도를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필자는 절대 안 될 말이라고 강하게 반박했다. 익명신고를 왜 반대하느냐고?

아무리 진짜 가해행위를 한 악인이라 하더라도 충분한 방어권 보장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우리 헌법과 법률에 따른 기본적 원칙이다. 그리고 반대신문권, 그러니까 피혐의자 측이 반박 취지의 질문을 던질 권리는 이 원칙 준수를 위한 중요한 장치다. 법원이 재판 절차에서 성폭력 피해자의 특별한 보호를 위한 여러 제도를 마련하면서도 가해자로 지목된 자의 반대신문권을 포기한 바는 이제껏 없었다. 이만큼이나 반대신문권의 보장은 중요한 것이다.

각 기관 내에서 자체적 징계처분을 위해 성희롱·성폭력 사안을 조사·심의하는 경우에는 피해자 보호를 위해 피혐의자 진술을 피해자와는 시·공간적으로 분리하여 진행하도록 권장하고 있고, 실제로도 통상적으로 이와 같이 분리하여 진행한다. 징계절차가 법원의 재판과 동등한 성격을 갖는 것은 아니지만 불이익 조치를 결정하는 절차인 이상, 여기서도 피혐의자 방어권이 적절한 방식으로 충분히 보장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징계실무에 있어서 위와 같이 제도가 운용되고 있다 보니 피혐의자의 반박 질의할 권리가 충실하게 보장되기 어려운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재판과는 달리 법률전문가가 절차를 주재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피혐의자의 방어권 행사가 합리적 이유 없이 제약당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하는 듯 보인다. 모 기업체에서 있었던 일이다. 얼마 전 필자가 변론의견을 제출했던 피혐의자 사례이다. 성희롱으로 판단되기 어려운 사실관계를 피혐의자 소명 기회도 주지 않은 상태에서 주먹구구식으로 우선 자의적으로 판단하여 성희롱이라고 결정해 버리고는, 그 결정에 이의를 제출하라고 했단다. 반박 질의 기회는커녕 소명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게다가 성희롱도 아닌 것을 성희롱이라고 하다니! 어디서든 어떤 절차든 이런 식으로 진행되어서는 안 된다.

현실은 아직도 이렇다. 그런데 거기에 더해서 이제는 피해자가 누군지, 정말 실재하는지조차 확인도 하지 않고 사건을 진행할 수 있게 하자고? 이건 어떻게 보더라도 너무하지 않나? ‘누구인지 알 수는 없지만 아무튼 당신은 우리도 누군지 모르는 그 누군가를 만진 적이 있나요?’ 이런 질문에 가능한 답변이 뭘까? ‘뭐요? 뭐라구요?’ 밖에 더 있을까? 아무리 진짜 나쁜 사람이라 하더라도 ‘깜깜이 조사’와 ‘원님 재판’을 받아서는 안 된다. 그건 정의라는 미명 하에 또 다른 부정의를 자행하는 것일 뿐이다.

익명신고는 현행법 제반규정 상의 여러 원칙에도 정면으로 어긋난다. 국가인권위원회법은 진정이 익명이나 가명으로 제출된 경우에는 조사 진행 없이 그 진정을 바로 각하하도록 정한다. 공익신고자 보호법에서도 마찬가지다. 공익신고는 반드시 공익신고자의 이름, 주민등록번호, 주소 및 연락처 등 인적사항을 기재하여 신고해야 한다.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에서는 피해자 보호를 위해 수사와 재판 진행 중에 신상 등 인적사항을 조서나 그 밖의 서류에서 공개하지 않도록 하고 가명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지만, 검사나 사법경찰관 등 수사 주재자가 피해자의 정확한 신원을 확인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것은 생략하지 않는다. 당연하다. 어떠한 경우에도 깜깜이 조사를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문제점은 또 있다. 성희롱·성폭력 사건의 실체적 진실 확인에 있어서 피해자 진술의 일관성과 구체성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기준이다. 익명으로 신고가 들어왔고 이를 접수했다고 치자. 그러면 피해자에 대한 추가 진술은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일회적 진술만으로 조사를 끝내라는 것인가? 누군지 알 수도 없는 그 분에 대해서 미심쩍은 부분에 관한 추가 사실확인을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방도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익명신고만으로는 진술의 일관성 여부 판단이 불가능하다.

일관성 확인은 어렵더라도 구체성이 확인될 수만 있다면 문제되지 않을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반론할지 모른다. 아니다. 구체성도 당연히 문제된다. 불편한 진실이지만 필자는 객관적인 여러 반대증거에 비추어 보았을 때 사실이라고 믿을 수 없는 내용을, 그러니까 거짓말을 아주 구체적으로 그럴싸하게 기술한 사례를 본 적도 있다. 겉보기에는 정말 그럴 듯하기도 했다. 그러니, 소스라칠 정도로 구체적이더라도 그것이 사실과는 다를 수도 있다.

그래서 일관성과 구체성은 함께 평가될 필요가 있다. 구체적인 듯해도 실제 있었던 일과 다른 내용을 꾸며낸 것이라면 세세한 여러 질의사항 속에서 허점이 드러나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방으로부터의 익명신고, 그러니까 추가 조사도 불가능한 단 한 번의 진술만을 막연히 믿고서 제재나 처벌을 하라고? 절대로 동의할 수 없는 주장이다.

피해자들의 아픔과 두려움을 모르는 바 아니다. 사실은 안타까운 마음이 더 크다. 왜 스스로를 드러내기를 두려워하는지 그 우려하는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한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가 피해자를 제대로 보호해 주지 못한 탓이다. 우리들의 책임이다. 100건의 익명신고가 있다고 해 보자. 그 가운데 아마도 80~90건의 내용은, 어느 정도의 과장이 보태어져 있건 아니건 일단 대체로는 사실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 중 단 1~2건이라도 무고 내지 음해성 신고가 섞여 있을 수 있다면? 애꿎게 가해자로 몰린 그 억울한 1~2명에 대해서는 무어라고 할 것인가? 미안했다고? 정의를 세우는 도중에 발생한 부수적인 피해일 뿐이었으니 양해해 달라고? 아니면, 당신의 고귀한 희생에 감사한다고? 그럴 수는 없는 법이다. 어떠한 이유에서도 그래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꼭 기억해야 한다. 이건 통계나 확률의 문제가 아니다. 100개 중에 90개만 맞춰도 되는 게임이 아니다. 오판 가능성은 늘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제도 그 자체의 내재적 본질상 단 한 명이라도, 오로지 단 한 명이라 할지라도 억울하게 누명을 쓰는 사람이 나올 수 있고, 이런 오판 가능성을 그 제도 자체적으로는 막아낼 방법이 없는 구조라면 그런 시스템은 어떠한 명분으로도 채택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90명의 정의를 위해 1명의 부정의를 용인할 수는 없다. 영화 「재심」을 보며 눈물을 흘리고 마음아파 했던 사람이라면 익명신고라는 달콤한 유혹에 빠져서 함부로 손을 들어 주어서는 안 된다.

피해자가 두려움 없이 문제제기하고 신고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 대외적 익명성 보호, 그러니까 피해사실이 함부로 공표되거나 누설되는 일이 없으리라는 신뢰를 줄 수 있어야 한다. 조사 절차 내부적으로도 가명사용 등으로 그 익명성을 최대한 보장해 줄 필요도 크다. 피해자에게 오히려 불리한 처우를 하거나 피해자를 모욕하고 명예를 훼손하는 자에 대해서는 최대한의 단호하고 엄중한 제재로 다스려야 마땅하다. 그러나 익명신고의 길을 열어주는 것은 올바른 길이 될 수 없다. 피해자 익명성 보호는 익명신고 없이도 가능하다. 등이 가려운데 배를 긁고 있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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