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21일 막을 올린 tvN 드라마 ‘나의 아저씨’ ⓒtvN
지난 3월 21일 막을 올린 tvN 드라마 ‘나의 아저씨’ ⓒtvN

이제 막 시작한 16부작 드라마에 대해 논하는 게 무용해 보일지 모른다. 21일 막을 올린 tvN ‘나의 아저씨’는 방영 전부터 비판받았다. 남녀주인공의 물리적 나이 차와 제목이 발산하는 수상한 기운 때문이다. 그런 비판이 성급하다는 반론도 존재한다. 여성 주인공에게 부여된 굳건한 주체성이 그 근거다. 이 드라마를 좀 더 지켜봐야 한다는 의견을 이해한다. 한편 그것이 하필이면 지금 이 시점에 세상에 나온 것이 심히 유감스럽다. 무엇보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맥락에서 그것이 응당 비판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아직 구체화되지 않은 내용 때문이 아니라 첫 시작부터 공고히 드러나는 영상문법의 이상한 욕망 때문이다.   

영상문법이란 그것과 마주한 우리가 미리 앉아 있어야 할 자리를 정해주는 절차다. 카메라의 자리가 곧 피사체와 마주하는 우리의 자리다. 피사체를 가까이서 혹은 멀리서 찍느냐에 따라 그것에 대한 우리의 정서는 일정 부분 결정된다. 그렇게 찍은 숏들을 연결하는 논리도 중요하다. 쪼개진 숏을 어떤 방식으로 배치하고 봉합하느냐에 따라 그것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완전히 달라진다.

‘나의 아저씨’는 열심히 일하는 회사원들을 포착하며 시작된다. 그때 사무실에 벌레가 나타난다. 이 설정의 의도는 남녀주인공의 캐릭터를 환기하는 것이겠지만 사실상의 진심은 남녀주인공만을 클로즈업으로 포착하는 카메라의 과시적 시선이다. 클로즈업은 전체 맥락을 제거한 채 인물의 표정에 밀착한다는 점에서 ‘감정’의 시선이다. 드라마의 출발선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21세의 이지안과 45세의 박동훈이 감정적으로 얽히는 풍경인 것이다. 이후 드라마는 남녀주인공의 고난을 나열하는 데 시간을 할애한다. 요약하자면 어린 여성은 극도로 가난하고 중년 남성은 극도로 처량하다. 이때 의심스러운 것은 감정적으로 얽힌 각각의 고난을 배치하고 봉합하는 숏의 전개 방식이다. 무능한 형제들과의 술자리에서 씁쓸한 미소를 짓는 박동훈의 얼굴을 포착한 후 숏은 곧장 퇴근 후에도 식당 설거지 아르바이트에 한창인 이지안의 모습으로 전환된다. 그 직후 우리는 기적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만남을 목격한다. 지하철에 몸을 실은 박동훈 앞에, 하필이면 바로 그때, 귀가 중이던 이지안이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숙명은 드라마가 시작된 지 채 1시간이 지나지 않아 다시 한번 반복된다. 이지안은 귀가 후에도 쉴 수 없다. 사채업자와의 실랑이가 기다리고 있고, 할머니가 입원한 요양병원에도 가야 한다. 박동훈 역시 편안해 보이지 않는다. 회사는 착하고 성실한 그에게 골치 아픈 업무만 떠넘긴다. 더구나 그의 아내는 외도 중이다. 이 상황에서 퇴근길 마트에 들른 박동훈의 시야에, 역시나 하필이면 바로 그때, 계산대에 서 있는 이지안이 들어오는 것이다. 

 

21일 tvN 드라마 ‘나의 아저씨’ 첫방송엔 사채업자 광일(장기용 분)이 빚을 갚지 못한 지안(아이유 분)을 폭행하는 장면이 나왔다. ⓒtvN 방송화면 캡처
21일 tvN 드라마 ‘나의 아저씨’ 첫방송엔 사채업자 광일(장기용 분)이 빚을 갚지 못한 지안(아이유 분)을 폭행하는 장면이 나왔다. ⓒtvN 방송화면 캡처

문제는 이러한 절차 직후에 이어지는 선정적인 장면이다. 사채업자에게 가차 없이 구타당하는 이지안의 처참한 상황이 그것이다. 남성에게 폭행당하는 여성의 이미지를 거리낌 없이 전시했다는 것만으로도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그것만큼이나 문제적인 것은 그때까지 지속된 영상문법이 이 장면을 기점으로 분기하며 본색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폭력의 수위가 높아질수록 우리의 뇌리에 절실하게 떠오르는 인물은 누구인가? 이지안과 감정적으로 얽혀 있고, 이지안과 마찬가지로 고난을 겪고 있으며, 이지안과 기적처럼 마주치는, 참혹한 상황에서 영상문법이 우리로 하여금 떠올리지 않으면 안 되게끔 설계한 구원자는 누구인가? 바로 박동훈이다. 

이것은 뭔가 이상하다. 이지안은 박동훈을 기적처럼 만났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오직 박동훈만의 시선으로 처리된다. 박동훈 역시 이지안이 사채업자에게 구타당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는 그곳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폭행 상황과 마주하는 우리는, 카메라 시선과 쇼트의 절차를 따라 그들의 정서적이면서도 운명적인 관계를 전지전능한 자리에서 안내받은 우리는, 거의 자동적으로 ‘나의 아저씨’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이것이 이 드라마의 진짜 욕망이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흔히들 생각하는 로맨스가 아니다. 혹은 추후 16부작이 마무리될 때까지 우리는 이지안과 박동훈 사이에 그런 로맨스를 발견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내용적 차원에 불과하다. 그것을 구성하는 영상문법의 절차는 정확히 로맨스이기 때문이다. 기적이 일어나는 동화 같은 시공간에서 피할 수 없는 절대성으로 결합된 관계, 그 운명적 호명이 로맨스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이 관계는 위선이다. 이지안에게 주어지는 박동훈이라는 구원자는 벼랑 끝에서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는 기만적인 선택지에 불과하다. ‘21세 여성’을 고난의 최대치로 몰아세워 자기결정권을 최소치로 좁힌 후 선심 쓰듯이 베푸는 ‘45세 남성’인 것이다. ‘나의 아저씨’의 영상문법은 바로 이 선의를 가장한 사실상의 결박을 감정의 시선과 고난의 전개와 기적의 아우라로 적극 미화하는 중이다. 이 미적 욕망은 아무리 그럴 듯하게 포장되더라도, 중년 남성은 운명처럼 20세 이상 어린 여성과 사귈 수 있다는, 속물적 ‘영포티’의 승인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위험하다. 여성을 어떻게든 패배의 자리로 몰아세워 끝까지 남성의 가시권 안에 가두려는, 가부장제의 음흉한 욕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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