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고, 듣고, 쓴다. 소설 『다크 챕터』의 위니 리 작가가 자신의 성폭력 경험 이후 해온 일들이다. 한국판 출간 기념으로 서울을 방문한 그를 27일 서울 중구 순화동천에서 만났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말하고, 듣고, 쓴다. 소설 『다크 챕터』의 위니 리 작가가 자신의 성폭력 경험 이후 해온 일들이다. 한국판 출간 기념으로 서울을 방문한 그를 27일 서울 중구 순화동천에서 만났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인터뷰] 소설 『다크 챕터』 작가 위니 리

“6살 때부터 글을 쓰고 싶었다. 그게 내가 세상과 교류하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15세 소년에게 성폭력을 당한 후에도 글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미국 출신 작가 위니 리(39)는 29세 때인 2008년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힐즈를 여행하던 중 낯선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그날 리의 삶이 둘로 쪼개졌다. 하버드대를 나와 영국 런던에서 전도유망한 영화 제작자로 살던 여성과, 매일 불면증으로 항우울제를 복용하며 사법 절차만 기다리는 여성이 모두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힘들었다. 살아남기 위해 리는 입을 열었다. 친구들에게 자신이 느낀 수치와 아픔을 숨김없이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들은 이들도 자신들이 당한 폭력을 고백했다. 사람들이 들춰 보여준 삶의 ‘어두운 장면(dark chapter)’들이 리의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였다.

5년이 흘렀다. 성폭력 생존자는 작가가 됐다. 리는 자신이 겪은 범죄의 원인과 영향을 사유하고 연구해 2015년 책을 펴냈다. 자전적 소설 『다크 챕터』는 성폭력이 가해자와 피해자의 삶을 어떻게 바꾸는가에 관한 치밀한 기록이다. 걸출한 데뷔작이라는 찬사를 받았지만, 편안한 마음으로 읽을 책은 아니다. 생생한 폭력과 고통의 묘사가 수백 페이지에 걸쳐 이어진다. 끔찍한 폭력을 겪은 여성이 어떻게 무너지지 않으려 버티는지, 경찰과 사법부와 사회가 피해자에게 어떤 고통을 가하는지 가까이서 볼 수 있다. 영국 가디언 지 선정 ‘2017년 독자가 뽑은 최고의 소설’에 들었다. 영국·미국·독일 등 10개국에서 출판 계약을 맺었고 최근 아시아 최초로 한국에서 출간됐다. 한국어판 번역자인 송섬별 작가는 2016년 문단 내 성폭력 말하기 운동에 적극 나섰던 성폭력 생존자이기도 하다.

출간 기념으로 서울을 방문한 리를 27일 만났다. 다시는 여행하지 못할 줄 알았다던 리는 요즘 매달 전 세계를 돌며 성폭력 피해생존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강연하고, 토론하고,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유명 글로벌 화장품 브랜드의 광고에 출연하고, 페미니스트들과 여러 행사를 기획하고, 여성이 겪는 불평등에 관한 새 소설을 집필하며 바쁘게 산다. 리를 무너뜨리지 못한 순간들이 그의 자양분이 됐다. 그는 두 가지를 말한다. 숨기지 않고 고통을 말할 것. 타인의 고통에 귀 기울일 것. 언어는 생존자들의 힘이자 무기다. 리가 그 증거다.

 

 

위니 리의 소설 『다크 챕터』(한길사, 2017) ⓒ한길사
위니 리의 소설 『다크 챕터』(한길사, 2017) ⓒ한길사

- 성폭행을 겪은 지 1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때의 일을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기까지 (성폭행을 당한 날로부터) 약 5년 반이 걸렸습니다. 인생의 두 번째 시기를 맞이하면서 그 경험에 관해 쓰기로 했어요. 여성이 성폭력 때문에 쉽게 무너져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고통스러운 시간을 지나 나아가는 생존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2014년 제 성폭력 경험담을 페이스북에 올렸어요. 미국 여성들이 온라인을 통해 대학 내 성폭력 고발에 나서던 때였죠. 그 글을 읽고서야 제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안 사람들은 무척 놀랐을 거예요. 그 때 제가 겉보기에는 꽤 멀쩡하고 근사했거든요. 속은 무너져 내려 산산조각이 났지만요. 하지만 그 사건이 제 인생을 영원히 파괴할 수는 없어요. 저는 살아남았어요. 배낭여행을 다시는 못할 줄 알았지만 지금 한국을 여행하고 있고요. ”

- 예기치 못한 경험으로 삶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얘기하셨죠. 

“네. 세상에 널리 퍼진 엄청난 여성혐오를 깨닫게 한 경험이었죠. 사실 예전부터 페미니즘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제 어머니도 페미니스트고, 저도 성장 과정에서 다양한 성폭력·성차별을 체감했죠. 아시아 여성이라는 이유로 이중의 차별을 겪기도 했고요. 대학 졸업 후 수년간 영화계에서 일하면서 업계에 뿌리내린 여성혐오에 진저리쳤어요. 그러다가 성폭행 사건을 겪었고, 2013년부터는 직장을 관두고 반성폭력 활동가로 살고 있어요.”

- ‘미투(#MeToo)’ 운동이 한국을 포함해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습니다. 

“미투 운동은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소리가 모여 거대한 힘이 된다는 걸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성폭력이 이 세계에 얼마나 만연한지, 피해자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를 알리는 중요한 흐름입니다. 피해자들과 반성폭력 활동가들은 종종 외톨이가 되어버린 느낌을 받아요. 이런(성폭력) 문제를 이야기하려는 움직임은 아직도 소수니까요. 그래도 세상에 이런 일들이 있다고 알리는 것 자체가 커다란 진전입니다. 저는 성폭행당한 직후 친구들에게 그 경험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는데요. 자신감 넘치던 제가 하루아침에 딴사람이 돼 버렸고, 북아일랜드 언론이 이미 제게 일어난 일을 보도해 버린 상황이라서 친구들에게 숨길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제가 이야기를 꺼내자 친구들도 말 못했던 자신들의 경험을 털어놓더군요. 그때 깨달았어요. 우리가 모여서 정말 하고 싶었던 얘기를 나누고, 서로 연대한다면 다른 미래, 더 나은 사회를 꿈꿀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여성들의 고발로 사회 유력 인사들의 성폭력이 드러나는 등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저는 서울에 머무는 동안 한국의 성폭력 생존자들, 페미니스트들과 만나 대화할 계획입니다. 우리가 대화하며 서로 인식의 지평을 넓히고, ‘이런 일을 겪은 게 나 혼자만은 아니구나’ 하며 힘을 내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 『다크 챕터』 한국어판 번역자인 송섬별 씨도 성폭력 생존자이자 다른 피해자들과 연대해 온 분입니다. 두 분의 만남으로 책이 출간되다니 뜻깊은 일이네요.

“굉장한 일이지요. 폭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과 만나 다양한 방식으로 연대하는 일이 결국 세상을 바꾼다고 믿어요. 사실 아시아계 여성이 쓴 책이 이렇게 여러 나라에서 출간되는 일이 드문데요. 이 (서구·백인 중심적) 세계에서 아시아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게 어떤지를 아는 한국 여성들에게 제 경험을 전함으로써 우리가 연결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소설은 성폭력 생존자만이 아니라 가해자의 처지에서도 성폭력 당시와 이후의 일들을 조명합니다. 왜 가해자에게도 목소리를 부여했나요?

“가해자가 ‘괴물’이라서 범죄를 저지르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사람은 모두 순수하게 태어나지만 어떤 영향을 받느냐에 따라 범죄자가 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오랫동안 고민했어요. 그 15세 소년은 왜 제게 그렇게 잔혹한 폭력을 휘둘렀을까요? 그를 ‘괴물’이라고 부르기는 쉽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대신에 그 ‘사람’을 자세히 들여다봐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아무도 강간범에게 공감하고 싶어하지 않지만 ‘공감의 태도’로 가해자의 생애와 동기를 살피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무엇이, 우리 사회의 어떤 요소가 범죄자를 낳았는지 살펴보고, 이해하고 공유해야만 성폭력을 뿌리 뽑을 수 있을 테니까요.”

 

2015년부터 영국에서 매년 열린 페미니스트들의 플랫폼 ‘클리어 라인스 페스티벌’(The Clear Lines Festival) ⓒCLEAR LINES
2015년부터 영국에서 매년 열린 페미니스트들의 플랫폼 ‘클리어 라인스 페스티벌’(The Clear Lines Festival) ⓒCLEAR LINES

위니 리는 페미니스트들의 플랫폼 ‘클리어 라인스 페스티벌’(The Clear Lines Festival)의 공동 설립자다. ‘동의 없는 성적 접촉은 성폭행일 뿐이라고 이제 분명히 선을 긋자’고 선언한 페미니스트들이 2015년 함께 만들었다. 매년 런던에서 만화·연극·코미디 등 다양한 예술로써 성폭력 이슈를 표현하고 토론하는 행사를 연다. 각계 전문가들은 물론 유색 인종, 성소수자, 장애인 등 다양한 이들의 경험을 나누는 자리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왔다. 곧 미국과 스코틀랜드에서도 비슷한 취지의 플랫폼이 열릴 예정이다. 

- ‘클리어 라인스 페스티벌’을 통해 어떤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나요?

“주류의 시선에는 잘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곳이죠. 서구의 미디어는 젊은 백인 중산층 여성 피해자의 이야기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어요. 하지만 나이 많은 여성도, 이주여성도, 장애인도,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여성도, 남성도 성폭력을 겪습니다. 남성 피해자는 여성에 비하면 극소수지만, 남성들이 더 힘들어하고 더 심각한 낙인에 시달리기도 하고요. 다양한 배경과 처지의 개인들이 어떻게 이 폭력의 시간을 통과하는지, 어떻게 회복하는지를 듣고 말하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 아직도 ‘피해자다움’이라는 편견은 강고합니다. 피해자가 용감하고 이성적으로 행동하면 ‘피해자치곤 너무 당당하다’ ‘너무 차분하다’는 의심의 눈초리를 받지요.  

“사람들은 ‘성폭행 피해자’라고 하면 흔히 ‘연약한 여성’을 떠올리는데요. 현실은 다릅니다. 피해자라고 해서 늘 울고 있어야 하나요? 아니잖아요. 그런데 뉴스는 멍든 얼굴, 울고 있거나 얼굴을 손으로 가린 채 방구석에 처박혀 있는 피해자의 이미지를 보여줍니다. 미디어의 의사결정권을 남성들이 거의 독점하고 있어서 그런 게 아닌가 싶어요. 

때론 영화가 그런 편견을 만들고 퍼뜨립니다. 여성을 자율적인 주체로 그리기보다 남성의 소유물로 취급하는 영화가 아직도 많아요. ‘녹터널 애니멀스’, ‘엘르’(2016)처럼 여성들이 강간·살해당하는 내용을 전체 서사를 위한 도구로 소비하는 영화나, 성폭행 피해자가 성적으로 ‘밝히는’ 여자가 된다는 둥 비현실적으로 피해자를 묘사하는 영화들이 있죠. 영화 ‘룸’(2015)처럼 성폭력 피해자의 삶과 심경을 피해자의 관점에서 비교적 현실적으로 묘사한 작품도 있지만요. 성폭력이 피해자에 실제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구체적으로 알고 미디어를 통해 재현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런 결정권을 쥔 사람들 중 여성이 매우 드물다는 게 문제죠.

또 미국에서 성폭력 피해를 밝힌다는 것은 곧 돈 문제와 직결됩니다. 국가 지원을 받기가 어려워서 성폭력 피해자가 상당한 치료 비용을 직접 부담하는 형편입니다. 한국에서는 피해자들이 사실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죄로 고통받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꼭 개선돼야 할 문제죠. 법제도의 문제 때문에 피해자들이 자신을 위험에 몰아넣어선 안 되니까요.”

- 생존자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가요. 

“가슴 속에 묻어둔 고통은 사라지지 않아요. 당신의 경험을 애써 숨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성폭력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최적의 타이밍’은 결코 오지 않아요. 나만 더 상처받을 뿐이죠. 친한 친구나 상담사에게 말할 수도 있고, 온라인을 통해 익명으로 이야기할 수도 있어요. 침묵하지 말라는 게 아닙니다. 생존자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조심할 필요가 있죠. 다만 말하고 싶을 때 말하는 게 중요합니다. 공개적으로 발언할 필요도, 모든 걸 이야기할 필요도 없어요. 성폭력 생존자들이야말로 이 문제에 대해 가장 적절한 발언을 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목소리를 내시길, 그래서 이 사회가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할 수 있길 바랍니다.” 

- 남성들에게도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남성들은 제발 입 좀 다물고 여성들의 말을 좀 들으세요. 문제는 성폭력 피해 경험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그럴 의지도 부족한 많은 남성들이 피해자들과 관련된 문제를 결정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런 남성들보다는 차라리 여성이 그 자리에 올라가서 더 나은 정책을 만들어야 합니다.” 

 

 

위니 리 작가가 한국의 성폭력 생존자들에게 보내는 메시지. ⓒ이세아 기자
위니 리 작가가 한국의 성폭력 생존자들에게 보내는 메시지. ⓒ이세아 기자

리는 한국의 성폭력 생존자들에게 짧은 편지도 남겼다. “한국의 생존자들에게- 당신의 이야기는 중요합니다. 우리가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듣고, 우리의 집단 지식을 함께 사용할 때에만 사회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당신들의 이야기를 계속 나누고, 함께 힘을 기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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