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논단] ‘소비자는 왕’이라는 미사여구
[여성논단] ‘소비자는 왕’이라는 미사여구
  • 김양희 젠더앤리더십 대표·여성환경연대 공동대표
  • 승인 2018.03.21 15:50
  • 수정 2018-03-25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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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소비가 미덕이라고 가르친다. 시장에는 상품이 넘쳐나고 기업은 광고매체를 통해 소비를 조장한다. ‘소비자는 왕’이라는 문구도 종종 등장한다. 정부는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기업이 생산하는 상품의 제조와 판매허가 규격을 정한다. 대부분의 경우 정부의 규격은 상품의 효능과 소비자의 안전을 보장하는 최소기준일 뿐, 최대기준이 아니다. 그래서 해외 각국에서 등장한 것이 제조물책임법(일명 PL법)이다. 우리나라도 2000년 1월 12일 민사특별법으로 제정했다. 이 법의 취지는 매우 강력하다. “제조되어 시장에 유통된 상품(제조물)의 결함으로 인하여 그 상품의 이용자 또는 제3자의 생명, 신체나 재산에 손해가 발생한 경우에 제조자 등 제조물의 생산, 판매과정에 관여한 자의 과실 유무에 관계없이 제조자 등이 그 손해에 대하여 책임을 지도록 하는” 법이다. 지난해 3월 30일 국회 본회의에서는 제조업자의 손해배상 책임을 강화하고 피해자의 입증 책임을 완화하는 동법 개정안을 가결한 바 있다. 가습기살균제 피해 사건 이후 피해자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조처였다. 이제 제조업계는 제품 설계에서 출시까지 전 공정에 걸쳐 결함을 분석해 만일에 발생할지도 모르는 위험을 방지할 의무를 가진다.

타일레놀 사건은 제조물 책임의 모범사례로 자주 인용된다. 1982년 9월 29일 시카고에서 타일레놀 복용자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누군가 독극물로 오염시킨 것이었다. 타일레놀 제조사인 존슨앤존슨사는 경찰 수사와 별개로 즉각 전 미국의 타일레놀을 회수하는 결정을 내렸다.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부담해야 하는 과감한 결정이었다. 회사는 소비자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발표했다. 사건이 해결된 후 소비자들은 회사의 배려에 보답했다. 타일레놀 매출이 사건 발생 전보다 더욱 증가했던 것이다. 만약 회사가 경찰 수사결과를 기다리며 시간을 낭비했다면 사상자는 더 늘어났을 것이며, 소비자들의 분노는 결국 회사에 더 큰 손실을 발생시켰을 것이다. 최근 폭스바겐의 티구안 디젤배기가스 조작과 애플사의 배터리 성능저하를 감추기 위한 운영체제 조작 사건이 있었다. 소비자들의 집단소송으로 이어진 두 사례에서 기업들은 어떤 교훈을 배워야 하는지 깨달아야 한다. 스마트 모바일 기술의 보급으로 소비자들의 정보력이 예전보다 더욱 막강해진 결과다.

의약품의 제조 판매는 인간의 생명과 직결되는 분야다. 국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해 정부의 규제가 어떤 상품보다도 강한 편이다. 일차적으로 동물시험으로 독성을 확인한 후 이차적으로 인체를 대상으로 세 차례의 임상시험을 거쳐야 한다. 임상시험은 제한된 수의 환자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제약사들은 판매허가를 득한 이후에도 사용 중 부작용사례를 수집해 매년 식약처에 보고해야 한다. 부작용이 심하면 허가를 취소하기도 한다.

생리대는 약사법 제2조 제7호 가목에 해당되는 의약외품이다. 정부 규제도 의약품만큼 강하지 않다. 식약처가 허가절차를 담당하는데, 신제품은 안전성·유해성 심사 대상이 된다. 기존 제품도 일부 변경하는 경우나 국내에서 사용된 적이 없는 첨가제를 사용할 경우에는 해당된다. 안전성·유해성 심사는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드는 절차이기 때문에 기업들은 대부분 기존 허가제품과 동일한 품목으로 신청해 안전성·유해성심사를 피해가는 수법을 쓴다. 작년 8월 27일 양승조 국회 보건복지위원장이 식약처에서 받은 생리대 인허가 자료에 따르면, 2009년 이후 시중에 유통된 생리대 1082개 품목 중 식약처의 안전성·유해성 검사를 받은 생리대는 단 4개(0.4%)에 불과했다. 검사를 받은 4개 품목은 완전히 새로운 화학물질을 썼거나 기능성이 강화된 제품이었다.

작년에 소비자 5000여명이 집단소송을 제기한 K사의 특정 제품의 경우, 2007년부터 75개 품목의 신고·허가를 받으면서 안전성·유효성 심사자료 제출을 모두 면제받았다. 제조업체가 식약처 고시에 따라 생리대 기준규격을 맞추겠다고 하거나, 이미 허가된 품목과 같은 성분으로 생리대를 만들면 안전성·유해성 검사를 면제했다. 식약처는 실제 제조사가 규격 기준을 준수했는지 확인하지 않았다. 식약처가 제시하는 기준규격은 형광증백제, 산·알칼리, 색소, 포름알데히드, 흡수량, 삼출 등 9개 항목이며, 발암물질은 포함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의약외품은 일시적으로 사용하지만 생리대는 한 개인이 일정 간격으로 수십 년간 지속적으로 소비한다. 식약처는 이 같은 특이성을 감안해 마땅히 사후 부작용 사례를 관리하고, 부작용이 심한 품목은 허가를 취소해야 한다. 기업들도 더 이상 정부 제도의 맹점을 이용하고 이익만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제조물책임법의 정신에 따라 소비자들의 안전을 보호하는데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기업의 비즈니스 윤리는 “소비자는 왕”이라는 미사여구가 아니라, 소비자들이 불편과 고통을 호소할 때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에 나타난다.

그동안 수많은 여성들이 생리대 사용 후유증을 호소해 오던 중 작년 국내에서 이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됐다. 소비자 개인이 나서기에는 너무 어려운 과제이므로 시민단체가 나서서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식약처는 여성들의 부작용 경험에 주목하기보다는 문제를 덮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국민들 사이에 비판 여론이 확산되자 전성분표시제 도입 결정과 전수조사 등 뒤늦게 대책마련에 나섰다. 현재 환경부를 중심으로 예비건강영향평가도 진행 중이다.

그런데 최근 문제를 제기한 시민단체는 K사로부터 3억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당했다. 그 단체는 바로 필자가 속한 여성환경연대다. 공익의 목적으로 일회용 생리대의 유해물질을 이슈화한 단체 때문에 손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과연 소비자들이 왕으로 대우받고 있는지 묻고 싶다. 단 한 명이라도 부작용을 호소하면 정부와 기업은 귀를 기울여야 한다. 생리대 사태를 겪으면서 여성 건강과 소비자의 안전보다 기업의 매출과 이익을 우선하는 사회의 단면을 본다. 사회적 사명과 기여를 위해 노력하는 이 시대의 모범기업을 더 많이 보고 싶다.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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